박준일(남도일보 대기자)

정몽규 HDC그룹 회장이 현대산업개발 회장직에서 사퇴했다. 광주 서구 화정 아이파크 아파트 외벽 붕괴사고가 발생한 지 일주일만이다. 대국민 사과와 함께 해당 아파트의 완전 철거와 재시공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종자 가족과 대중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사고 현장에서는 6명이 실종되어 1명만 지하 1층서 사망상태로 수습되었으며 나머지 5명은 아직도 수색 중이다. 어쩌면 실종자들의 유해마저 수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광주 북구청 광장에는 붕괴사고 실종자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노란 리본이 하나, 둘 걸리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데다 영하의 날씨지만 기적적인 생존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다. 그만큼 이번 사고로 희생된 근로자들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정몽규 회장은 “최근 광주에서 2건의 사고로 너무나 큰 실망을 드렸다”며 “아파트의 안전은 물론 회사의 신뢰가 땅에 떨어져 참담한 말을 금할 길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어 실종자 구조에 총력을 다하고 현대산업개발이 시공하는 모든 골조 등 구조 안전 보증 기간을 10년에서 30년으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붕괴사고는 공교롭게도 지난해 6월 광주 재개발 철거 현장에서 5층 건물 붕괴 참사가 일어난 학동4구역의 시공사였던 현대산업개발이다. 당시 승강장에 정차 중인 시내버스를 덮치면서 9명이 목숨을 잃고 8명이 크게 다쳤다. 경찰 수사 결과 책임이 드러난 형사 입건자는 30여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5명은 구속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정 회장은 7개월 전 학동 붕괴사고 때도 “이런 사고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전사적으로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사고가 터지면 회사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광주시와 정부도 안전 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이번에도 사고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관리책임 부실 등 위법 사항은 무관용 원칙으로 엄정 처벌하겠다고 했다. 등록 말소까지도 염두에 두고 가장 강력한 행정처분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산 본사 소재지 지자체인 시울시와 영등포구청은 학동 붕괴사고에 대한 행정처분도 7개월이 되도록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대중에게는 모두가 공염불처럼 들린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실종자 수색작업이 끝날 때까지 사고 현장에서 ‘풍찬노숙’하겠다고 들었다. 광주시는 광주에서 진행 중인 현대산업개발의 모든 건축·건설 현장에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번 현산의 아파트 외벽붕괴는 대중들이 신뢰의 붕괴를 목격한 현장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광주시민단체들이 ‘학동 참사의 되풀이’라면서 양대 현장 시공사인 현산을 향해 “광주에서 떠나라”고 성토했을까.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안전 수칙을 도외시 한 채 진행된 철거 공사과정이나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레미콘 양생 기간을 지키지 않고 무리하게 콘크리트 타설 공사를 진행했던 과정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고 보는 것이다. 원청 회사가 하도급 업체에 단가를 후려치고 거기에 불법 재·하도급이 일상처럼 만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시민단체는 부실 수사와 솜방망이 처벌이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되풀이한 원인 중 하나였다고 지적한다.

도대체 학동 참사 이후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이용섭 시장도 자신의 페이스북 게시글을 통해 “현대산업개발은 우리 시민들에게는 참 나쁜 기업이다”고 했다. 이 시장이 자신의 지적처럼 현산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볼 일이다.

신뢰란 무엇인가? 신뢰는 작은 약속을 지키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우리 인간 사회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의 기반도 그렇고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도 상호 신뢰가 바탕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초빙교수로 있는 세계적인 신뢰전문가 레이첼 보츠먼은 그의 저서 ‘신뢰의 이동’에서 “지금이 신뢰가 사라져버린 불신의 시대가 아니라 단지 신뢰가 이동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신뢰는 우리가 살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행동한다. 신뢰의 붕괴는 곧 나라의 근간과 사회의 붕괴로 이어진다.

이번에 광주에서 발생한 2건의 건물 붕괴사고로 현대산업개발은 대중의 신뢰를 잃었다. 광주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아이파크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는 브랜드명을 바꾸어 달라는 말까지 들린다. 지금 현산의 처지가 그렇다. 현대산업개발의 이번 붕괴사고는 오는 27일부터 시행될 ‘중대재해처벌법’을 피해 갈 수는 있을지 몰라도 성난 민심 앞에 기업의 존폐마저 위태로운 처지가 됐다. 기업이 대중의 신뢰를 쌓기까지는 10년 혹은 수십 년의 세월을 필요로 하지만 그 신뢰가 붕괴하는 것은 하루아침, 한순간이다.

현산은 국내 10대 건설사 가운데 국내 주택 비중이 가장 높지만 연이은 붕괴사고와 인명사고로 사업위축이 불가피하게 됐다. 어쩌다 보니 운이 없어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다. 건설 현장에서 다단계식 재·하도급이 당연시되다 보니 인건비와 장비대, 자재비를 아끼려고 공사 기간 단축을 위해 서두르다 보니 부실 공사를 하게 된다. 현장에서는 안전사고에 대비한 철저한 메뉴얼이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니 제2, 제3의 안전사고가 기다리고 있다. 현산은 이번 건물 붕괴를 통해 신뢰가 붕괴하면 기업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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