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남도일보 편집국장

현재 진행 중인 코로나19 상황이 종료되면 여행을 고려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국내여행 중 단연 으뜸은 기차여행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한 번쯤은 나름의 추억이 있을 것이고 차장 밖 전경은 늘 새롭게 다가오는 장면 중 하나가 아닌가.

오늘은 근대교통수단 중 하나인 기차와 우리의 삶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연기와 불을 내뿜는 수레’라는 뜻의 화륜거(火輪車)로 불렸던 기차는 1899년 9월18일 노량진과 제물포 간 33.2㎞의 철길이 열리면서 생경하게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

쇳덩어리 안에 사람과 짐을 싣고 두 줄의 철길을 달리는 기차는 현대인에게는 낯선 풍경이 아니지만 육상에서는 소달구지와 인력거가 오가고 강을 건너려면 나룻배를 타야 했던 당시 조선민중에게 기차의 등장은 적잖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시속 20㎞ 안팎에 불과했는데도 큰 덩치에 비해‘새보다 더 빠르다’고 할 정도로 속도감은 컸다. 여기에 기차가 움직일 때 내는 기계음은 이제까지 자연의 소리에 익숙한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첫 대면부터 깊은 인상을 준 기차는 도시의 흥망성쇠뿐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까지 큰 변화를 몰고 왔다. 기차가 멈추는 역사(驛舍) 주변 도시는 관청과 은행 같은 시설이 옮겨 오면서 도심의 부침에 상관성을 높였던 것이다.

기차가 민중 생활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사람들에게 시간관념을 심어준 것이었다. 열차 시간표는 분(分) 단위로 나뉘어 있어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하기 때문에 1분만 늦어도 타지 못했다. 지금까지 의존했던 자연의 순환적인 시간 감각인‘대충’으로는 통하지 않게 되면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기차는 여행문화를 뿌리 내리게 하는 역할도 했다. 장거리 여행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시절에 기차만 타면 쉽게 어디든 이동할 수 있게 됐다. 자연스럽게 역사 주변 해변이나 사찰, 고적, 명산 등이 주요 여행지로 부상했고 점차 명소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크게 변화해야 했다. 기차를 타고 바라보는 풍광은 예전처럼 360도로 마주하는 자연과 전혀 달랐고 180도로 제한된 새로운 시각체험을 하게 만들었다. 차창을 통해 훨씬 더 객관적인 입장과 시각으로 자연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기차는 또 반상(班常)과 성별, 나이가 문제되지 않는 남녀노소 평등의 공간이었다. 남녀 칸이 따로 없어 외간 남자와 여자가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도 무방했고 양반과 상민이 같이 이용하는 것이 당연했다. 남녀와 신분차이가 유별났던 사회 관념이 허물어진 것이다.

기차는 이밖에 공간을 가로질러 달리며 교통 환경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해안선과 하천이 발달한 지형 때문에 육상보다는 수로교통이 유리했고 포구중심의 해상교통망과 장시중심의 내륙교통망이 연결됐다. 그럼에도 기차는 수로교통에서 육상교통 중심으로 단숨에 운송체계를 바꿔버렸다.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몰고 온 기차는 식민과 제국주의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 않다. 일본의 상품을 전국으로 이송하고 약탈한 식량과 천연자원, 전쟁에 나서는 병력을 실어 나르는 주요 수단으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처음 기차에 가졌던 민중들의 두려움과 호기심도 차츰 고통과 증오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일본을 향한 적개심이 컸고 철로를 놓는 과정에서 조상의 유물인 땅과 산을 마음대로 깎아내렸다고 여겼다. 기차에서 불똥이 튀어 철도 인근 초가를 태우는 일도 빈번했다.

기차는 겉보기에 자유와 평등의 공간인 것처럼 보였으나 불평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위와 재산 정도에 따라 객차 이용 칸을 달리했고 내부는 여전히 남성 중심의 공간이었다. 철도와 기차가 조선인 소유가 아니어서 조선인은 짐짝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 박탈감을 실감해야 했다.

철도를 부설하면서 일본은 선로용지와 정거장 부지를 무상 또는 시중 거래가의 10분의 1에서 20분의1로 헐값으로 매입하는가 하면 철로 공사에 민중을 강제로 동원하면서 그 위를 달리는 기차에 대한 감정을 악화시켰다. 1907년 9월 하순부터 역사가 종종 의병의 공격대상이 된 이유다.

기차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05년 째 되던 2004년 4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른 교통수단으로 자리매김한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화륜거가 등장하던 당시보다 15배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상황을 맞이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는 한자성어는 이럴 때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빠르지 않은 열차를 타고 조만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차창을 통해 18세기 조선 민중의 삶을 돌이켜 겹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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