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규(광주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

임명규 광주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

지난 13일 국회에서는 ‘우리나라 정치 양극화 문제의 현황과 해법’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이 토론회의 자료집에는 장애인의 이동권 시위 문제로 장애인단체와 대결 중이던 이준석 국민의힘 당 대표의 환영사가 담겨 있다. “진영논리에 갇혀 양극화가 진행될 경우 정치가 민생이나 국가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는 장이 아니라, 오로지 정권 쟁취를 위해 각 정당들은 득표만 생각하며 국가 미래는 뒤로한 채 갈등하는 싸움의 장으로밖에 기능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신의 말이 자신의 행동을 반박하는 이런 유체이탈식 화법이 과연 그만의 문제일까?

최근 벌어지는 사회현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혐오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가 될 것 같다. 여성을 향한 혐오가 장애인 혐오로 확장되고 상대 정당에 대한 혐오가 특정 사회정책에 대한 극단적 찬반으로 이어진다. 혐오하는 대상이 일치한다면 우리는 이미 한 몸이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말(언어)을 타고 움직이는 혐오는 신체화된다. 혐오의 대상을 향한 소름 돋는 느낌, 기분, 정서는 본능적인 반응으로 자리 잡는다.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에 놀라듯이 동물적인 반응 속도로 혐오의 대상을 찾아낸다. 다른 생김새, 다른 신념, 다른 말투, 다른 의견을 다루는 공동체의 학습된 태도가 혐오의 대상을 직감으로 분류한다. 손쉬운 먹잇감(easy target)을 찾는 과정은 문화적이고 따라서 역사적인 산물이다. 혐오의 대상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지 확고부동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혐오의 대상은 만들어진다.

상상적 ‘우리’는 혐오를 통해 실감 나는 ‘우리’가 된다. 정치가 혐오 생산의 주체가 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혐오를 생산하고 유통하며 이익을 창출하는 일을 정치인과 정당이 활용하기 시작하면 불가역적인 혐오의 체제가 완성되고 그것은 공론장에서 정당화된다. 정치세력이 ‘논란’으로 유포시킨 혐오는 무목적·무차별적으로 자기 증식한다. 혐오가 누구도 중지시키거나 책임질 수 없는 사회 작동의 원리가 되는 일이다. 비극은 혐오의 대상이 된 집단과 개인이 혐오의 고리를 작동시키는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혐오에 대항하는 혐오 역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감정을 정당 일체감이라고 한다. 정당 일체감이 높을수록 자연스레 당파성도 강해진다. 당파성은 사회현상과 정치적 쟁점, 이슈를 이해하는 틀을 제공하며 개인이 입장을 선택하는 주요한 기준점이 된다. 1990년 이후의 모든 선거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유권자의 투표 성향이 당파성보다는 부정적 당파성(negative partisanship) 곧, 좋아서 자신의 정당에 투표하기보다는, 다른 정당이 싫어서 자신의 정당, 정치인에게 표를 주는 현상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싫어서 ‘우리’에게 몰아주는 한 표, 한 표가 양 진영을 사이에 두고 화살처럼 오고 간다. 목적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사라지고 수단과 방법만 악랄해진다.

정당의 이념과 지향, 정책과 그에 대한 평가가 당파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진영에 대한 강렬한 혐오가 자기 진영을 규정하는 정체성이 되었을 때, 시민은 불의한 권력에 분노하지 않고 일상의 주변을 혐오한다. 이런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할수록 상대 진영을 향한 혐오를 잘 조직하고 관리하는 양당 체제는 더 강해지겠지만 민주주의는 퇴보한다. 혐오의 정치는 정치혐오를 키우고 정치혐오는 혐오의 정치를 비판하지만, 오히려 이는 양당 체제를 키우는 자양분이 된다. 정치혐오가 대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난해 6월 학동참사, 올해 1월 화정동 붕괴 사고로 모두 15명이 숨졌다. 학동 참사와 관련해 서울시는 8개월 영업정지 대신 과징금 4억623만원을 HDC현대산업개발에게 부과했다. 이제 다시 또 유족만 남았다. 그 사이 대선은 끝나고 지방선거가 진행 중이다. 반복하지만 혐오에 대항하는 혐오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정치혐오가 대안이 되지도 못한다. 그러나 혐오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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