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남도일보 편집국장

여성으로 짜여진 그룹형 가수를 우리는 걸그룹(Girl Group)이라 부른다. 주로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출신은 전세계에 한류바람을 주도하기도 했다.

걸그룹의 모태는 1996년에 데뷔해 2001년에 해체한 영국의 5인조 팝그룹 ‘스파이스걸스(Spice Girls)’로 알려져 있다. 전세계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누려 팝 역사상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 걸그룹 역사는 1997년 7월 데뷔한 베이비복스나 같은 해 8월에 데뷔한 디바를 원조로 꼽는다. 아직도 부침 속 수 많은 걸그룹이 스타덤에 오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알려진 것보다 80여 년 앞선 일제 강점기 때 이미 활약한 ‘진짜 원조’ 걸그룹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가 않다.

1939년에 데뷔한 ‘저고리 시스터즈’다. 조선악극단 소속으로 ‘목포의 눈물’로 스타덤에 올랐던 이난영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이 핵심 보컬이었고 일본 쇼치쿠(松竹)와 다카라스카(寶塚) 가극단 출신의 이준희와 김능자, 가수겸 무용가인 서봉희 등이 그룹을 이뤘다. 해외파까지 가세한 당대의 톱가수와 무용가가 총출동하면서 노래와 연기, 춤 등 다재다능한 재능으로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까지 큰 인기를 누렸다.

걸그룹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이보다 앞서 193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적 산업의 전개와 도시화에 발맞춰 서비스직 여성이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해 직업 이름에 일본식으로 ‘걸(girl)’이라는 접미어를 붙인 것이 시초다.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닌 일정한 교육을 받고 근대적 노동을 하는 20세 안팎의 여성을 이렇게 불렀다.

1932년 무렵 여성의 91.2%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보통학교나 중등학교 이상을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걸을 붙인 직업의 종류도 많았다. 일제하의 취업난과 여성의 일자리가 제한된 상황에서 서비스직은 여성들이 도전할 수 있는 중요한 취업 분야였고 취업을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다. 선발기준에서 중요한 것은 능력보다는 외모였다.

‘버스걸’로 불렸던 여성 버스차장은 ‘얼굴이 아름답고 똑똑하고 몸이 튼튼하다’는 조건하에 선발됐다. 백화점은 여자 점원이 있어야 물건을 사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이용해 여성을 고용하는 현상이 있는데 ‘데파트걸’이라고 했다. ‘자존심이 없고 첫인상이 좋은 미혼 여성’이라는 단서 하에 뽑혔다.

1921년 6월 21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한국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이 개장하면서 일부 부유층과 권력가가 골프장에 카페 여급이나 여성을 대동하기도 했다. 이들 여성들은 ‘골푸걸’로 불려졌다.

‘마네킹걸’은 광고하려는 옷을 입고 하루 종일 상점에 서 있거나 광고판을 들고 마네킹처럼 서 있는 여성을 말하고 ‘마니키아걸’은 이발소에서 남자 손님의 손톱을 다듬어 주는 여성을 지칭했다.

자동차에 기름을 주유하는 일을 했던 ‘개솔린걸’이 있었고 백화점 엘리베이터에서 층 버튼을 눌러주고 안내를 하는 ‘엘리베이터걸’, 전화 교환수인 ‘헬로걸’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기도 했다. 1903년 조선에 영화가 처음 전래됐는데 극장 매표원을 ‘티켓걸’이라 했고 당구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빌리아드걸’이라 불렀다.

이들이 맡은 ‘대인 서비스업’은 종종 에로틱한 직업으로 여겨지고 매매춘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노출되기도 했다. 공원에 혼자 온 남성과 산보를 같이해 주는 ‘스틱걸’이나 한강에서 보트를 함께 타면서 유흥을 즐겨주는 ‘보트걸’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서비스직 여성들은 대부분 미혼에 평균 임금은 1931년 기준 20∼30원이었다. 전문직보다는 낮지만 공장 여공에 비하면 안정된 수준이었다.

반면에 이들의 노동 강도는 아주 높아 감독의 심한 통제를 받았고 생활전선에서 비참한 대접을 받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20세기에 도입된 걸그룹이란 용어는 이제 한 세기를 맞이하면서 세상 만큼이나 그들의 처우나 이를 받아들이는 인식의 정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걸그룹은 시대에 따라 화려한 조명과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모습이 크게 대비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거의 한 세기를 지났는데도 다른 듯한데 닮아 보이는 것이 단순한 선입관 탓만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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