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광(광주시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교육학 박사)

최성광 광주시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잔디는 전 세계적으로 옥수수와 밀 다음으로 널리 재배되는 식물이다. 한국잔디학회에 따르면 전 세계 잔디 산업의 시장규모는 80조 원에 이르며, 우리나라도 1조3천억 원에 달하는 잔디 산업 시장이 조성되어 있다. 잔디는 그 자체로 부가가치가 있지만 잔디 기계, 농약, 스프링클러 등 다양한 산업과 연관되어 성장 잠재력이 매우 높은 식물이다.

잔디의 인기는 인간의 심리적 욕망과 맞물려 있다.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잔디밭에서 연설하고, 전 세계인이 관람하는 FIFA 월드컵은 잘 다듬어진 푸릇푸릇한 잔디 축구장에서 펼쳐지며, 누구나 동경하는 유럽의 궁전과 대저택의 정원에는 넓고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골프장을 가는 이유가 공을 치는 재미도 있지만 골프장 잔디를 밟을 때 발바닥 전체로 전해져 오는 포근포근한 느낌과 초록색 청량감이 마음을 편안하고 상쾌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사람들은 특별하고 고급스러우며 심리적 위안을 주는 잔디를 자신의 거주 공간에 들이고 싶어 한다.

사실 잔디는 인간의 생존과 전혀 관련 없는 가성비 떨어지는 풀에 불과하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래 인간이 키우는 모든 작물은 먹고 생존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작물을 얻으려면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 키우고 수확해야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노동과 정성이 필요한데, 먹지도 못하는 잔디를 키우는 것은 생존의 법칙에 맞지 않았다. 오히려 잔디는 작물 재배에 방해가 되는 풀이자 제거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먹을 수도 없고, 작물 재배에 방해만 되는 잔디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훔치게 되었을까?

잔디를 처음 인간의 영역에 들인 것은 16세기 초 프랑수아 1세가 지은 루아르 계곡에 있는 샹보르 성의 잔디밭이었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 귀족들이 자신의 저택에 잔디밭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잔디는 귀족을 상징하는 표식이 되었다. 잘 관리된 잔디밭을 갖기 위해서는 넓은 땅이 필요했고 수시로 물을 뿌리고 짧게 깎아야 하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가난한 농부들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잔디를 위해 소중한 땅과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지만, 귀족들은 키우기 어려운 잔디를 자신의 부와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지위의 상징으로 삼았다.

잔디밭은 엄격한 제한구역이었다. 잔디는 키우기도 어렵지만 사람들이 밟으면 쉽게 손상되는 특성을 갖기 때문에 관리를 잘해야 한다. 그래서 주인과 관리인을 제외하고 외부인들은 평소 특별한 이벤트나 행사가 아니면 잔디밭에 출입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궁전, 정부청사, 공공기관 등 잔디밭이 잘 조성된 곳에는 대부분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명령조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과거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잔디밭에 들어가는 것은 규칙과 도덕을 어기는 잘못된 행위로 제시될 정도로 잔디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은 전 국민적 금기 사항이자 어릴 때부터 각인된 사회적 통념이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는 잔디밭의 주인이 갖는 권위와 힘에 도전하지 말라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잔디밭은 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성역이자 힘의 상징이었다. 즉, 기존 권력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체계 속에서 권력이 시혜를 베풀 때만 잔디를 밟을 수 있고, 그때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권력과 권위에 저항하지 말라는 상징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넓고 푸른 잔디밭을 밟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 채 눈으로만 보거나, 남들 몰래 금지된 선을 넘어 도둑질하듯 잔디를 밟아보고 나오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한때 우리 교육은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Althusser)의 주장대로 권력자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권력 수단으로 사용되어 국민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학교는 모든 국민에게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를 내면화시키며 권위의 수용, 권력에 복종, 불평등의 인정과 계급 재생산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 결과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세월호의 아픔을 겪어야 했고, 지금 이순간에도 현장실습 학생들은 불합리한 상황에 침묵하며 위험에 노출된 채 노동에 참여하고 있다.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인간의 행위와 사고와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고 사회 체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권위와 권력이 민주적으로 교체되고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며 책임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주체적으로 판단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자율적 인간을 키워내는 교육이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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