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필(귀농인·前 전남도 서기관)

김한필 귀농인·前 전남도 서기관

올 여름처럼 무덥고 또 국지성 폭우가 맹렬하게 내린 해가 또 있었을까. 강원·경기·서울과 충청 등 중부, 전북 일부까지도 비 피해가 심했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광주·전남은 예년보다 오히려 강우량이 적었다. 이도 지구온난화에 의한 이상기후 탓이라니 인류가 재앙을 만들고 이제 역으로 그 재앙을 당하고 있으니 자업자득이요 부메랑인 셈이다.

지난 8월 7일이 입추요, 8월 23일이 처서(處暑)였다. 여기서 處자는 장소를 지칭하는 ‘곳’이 아니라 ‘멈추다’, ‘그치다’라는 의미다. 그래서 처서가 되면 더위가 수그러들고 조석으론 선선함을 넘어 쌀쌀한 기운이 돈다. 그러나 한낮 기온은 그렇게 빨리 내리지 않아 “처서 밑에 까마귀 대가리가 벗어진다”는 속담도 있긴 하다.

처서쯤이면 벼들이 이삭을 패기 시작하는데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고 맑은 바람이 불어야 벼가 잘 익는다. 벼가 이삭을 패면 먼저 벼 알이 우유 빛의 액체로 채워지는데 이를 유숙기(乳熟期)라 한다. 유숙기가 지나면 현미가 풀과 같이 푸른색을 띤다. 이를 호숙기(糊熟期)라 한다. 이어서 현미의 푸른색이 사라지고 본래의 누런색으로 변하는데 이를 황숙기(黃熟期)라 하고, 다음 단계가 벼를 베는 완숙기(完熟期)다. 지금 벼들이 완숙기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 강원도에서는 조생종 벼를 수확하던데, 앞으로 며칠 남지 않은 추석 이후론 벼를 수확하는 콤바인이 논바닥을 종횡으로 누빌 것이다. 올해는 지난번 폭우 탓인지 수확량이 예년에 비해 다소 감소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쌀값은 지난해 대비 20%이상 떨어졌단다. “지금의 쌀값으로 미루어 보면 금년도 공공비축미 정부수매가격대비 일반 벼의 경우 적어도 30%이상 낮을 것”으로 농민들은 예측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시절 ‘튼튼한 농업, 활기찬 농촌, 잘사는 농민’이라는 거창한 농업 공약을 발표했다. 공약(公約)이란 국민에게 약속을 하고 유권자의 선택을 받은 것이니 만큼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고 따른다. 논어에서 공자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을 강조했다. 그렇다. 백성들의 신뢰를 잃으면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경제적으로 엄청난 위기에 봉착한 듯하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고유가의 4고에 더해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겹쳐졌다. 극소수 부유층을 제외하면 99%의 국민이 민생고를 겪고 있는데도 정부를 비롯하여 여야 정치인들은 아예 손을 놓고 있는 듯하다. 특히 농촌의 현실이 암울하기만 한 상황인데도 말이다. 시중에 유동성이 넘쳐나 인플레이션현상으로 물가가 오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비료·농약·농업용 필름 등 농자재와 인건비가 크게 올랐는데도 농촌의 현지 농작물 값은 제자리이거나, 쌀값의 경우 예년에 비해 두 자릿수로 크게 하락했다. 이는 농민에게 너무 가혹한 부담을 안겨주는 것 아닌가! 역대 정부가 우리의 농산물 유통체계가 구조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인지하고도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왕자이민위천 이민이식위천)’이란 구절이 있다. 임금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근본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정부와 여야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구두선만을 남발할 것이 아니라, 오직 민생 문제로 팍팍하고 고달픈 삶을 영위하는 민초들, 특히 농민들이 어둡고 긴 터널을 조속히 빠져나갈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차제에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물가를 빌미로 쌀값을 낮추는 정책을 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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