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란(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이영란 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가끔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면 누군가에게 치유 받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면서 나의 삶에 의미를 갖게 되고 사랑하게 만든다. 더불어 삶의 여러 문제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담아 놓은 일기나 또 다른 나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행복해지기도 한다. 최근 ‘인문치료’라는 용어가 여기저기 보이는데, 바로 이러한 나의 이야기를 할 때 스스로 치료가 되기도 한다.

중국 송(宋)왕조 시기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표현하며 인문치료를 하였던 여인이 있으니 바로 이청조(李淸照·1084∼?)이다. 그녀는 북송(北宋)의 멸망에서 남송(南宋)에 이르는 전란기를 살았던 여류 작가이다. 그녀는 열여덟살에 태학(太學)의 학생인 조명성(趙明誠)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암울한 시대적 상황인 당쟁과 전란으로 남편과 여러 차례 이별하는 삶을 살았다. 남편과 이별하는 슬픈 마음을 표현하는 유명한 ‘일전매(一剪梅)’라는 사(詞)를 쓰니, “……저 구름 속 그 누가 비단에 쓴 편지를 내게 전해 주려나? 기러기 떼는 돌아오는데 서쪽 누각엔 달빛만 가득하구나. 꽃잎도 무심히 흩날리고 강물도 무심히 흐르는구나. 그리움은 하나이건만 이별의 슬픔 두 곳에 있구나……” 가을의 서늘한 느낌을 강물에 비추고 있는 이청조의 이별 슬픔이 그대로 느껴지며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면서 슬픔을 달래기 위해 솔직하고 담백한 이야기로 자신을 위로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가 북송을 침입하고 부부는 피난 생활을 하게 되는데 조명성이 지사(知事)로 명을 받고 얼마되지 않아 학질에 걸려 4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이청조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적과 내통했다는 누명으로 박해를 받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다 위에서의 생활을 배경으로 한 사(詞)를 지어 노래하며 꿈속에서 자신의 여생을 걱정하는 생각으로 역시 자신을 토닥였다.

이청조는 말년에 ‘성성만(聲聲慢)’이라는 사로 적막하기만 하는 그녀의 삶이 몇 잔의 술로 달랠 수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아무리 찾아봐도 적막하기만 하니 처참하고 적막하다. 더웠다가 차가워질 때 보양하기가 가장 어렵지. 두세잔 술을 마신다고 어찌 막을까? ” 이어 “오동잎에 가는 비마저 떨어지는데 황혼이 되어도 비만 뚝뚝 떨어지니 이 심정을 어찌 근심 수 한 글자에 담을 수 있으랴?” 그녀가 말년에 이르러 그녀가 혼자 힘으로 전란과 외로움을 치열하게 싸워온 인생 여정을 돌이켜본다면, 작가이기 전에 한 여자로서 그녀가 겪어야 했던 삶이 얼마나 애달픈가를 알게 함과 동시에 자신의 아픔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며 치료해가는 듯한 모습도 그려진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담백하게 노래 가사로 담아내면서 자신 스스로 인문치료를 하면서 스스로 삶의 역경을 이겨나갔던 여인이었다.

인문치료는 인문학 정신을 바탕으로 인문학을 치료 방법에 활용하는 것으로 내러티브 테라피(Narrative Therapy), 이야기 치료, 스토리텔링 치료(Storying Therapy)) 등이 있다. 송대에 유행한 사(詞)는 형식이 비교적 자유롭고 간단하여 여성 문인들이 창작하기에 쉬운 장르로 인문치료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청조는 사를 지어 자신의 슬픔과 근심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힘든 시련 역시 과감하고 당찬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그녀는 스스로 인문치료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외롭고 애달픈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그녀는 이렇게 노래 가사를 지으며 스스로 치유를 해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희노애락, 그 자체를 사실대로 외부로 표출하면서 살아가는 그녀는 정신적 행복을 누리는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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