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남도일보 편집국장
박재일 남도일보 편집국장

오늘은 근대 빈자(貧者)의 은행인 전당포(典當鋪)를 통해 팍팍한 민중의 삶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전당포란 토지와 가옥, 재물, 채권 등을 담보로 돈을 꿔주거나 꿔 쓰는 ‘전당(典當)’에 가게를 뜻하는 ‘포(鋪)’자를 덧붙인 명칭이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三國志)’ 후한서에 전하는 전당 기록이나 ‘고려사(高麗史)’ 공민왕편에 인질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그 기원이 짧지 않음을 입증시켜 준다.

근대적 전당포는 1876년 개항과 함께 일본의 상업자본이 들어오면서 전당포 또는 ‘전당국’이라는 간판을 걸고 시작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전당포는 ‘질옥(質屋·시쯔야)’이라 했는데 이자보다는 유질될 토지 취득이 주목적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이후 전국의 주요 도시에 전당포가 우후죽순처럼 간판을 걸면서 전당포는 1897년 200여개였던 것이 1917년 1천158개, 1927년 1천522개로 증가했다.

전당포가 난립 수준이 되자 우려의 시각도 나타났다. 1902년 1월 21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논설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구하기 쉽고 부잣집 방탕아들은 손쉽게 돈을 구할 곳이 생겨 집문서, 땅문서, 옷, 그릇, 산업 도구 등을 모두 가져다 전당하기 때문에 온 나라를 가난뱅이로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전당포는 빈곤한 자에게는 구제금융 기관이나 다름없었다. 동아일보는 1920년 7월 7일자에서 “전당포가 없다 하면 아침, 저녁을 굶을 지경에 있는 사람이 경성 18만의 조선인 중에 6만명 가량”이라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전당포 한 집은 조선은행이나 한성은행 100개보다 필요하다”고 전했다.

서민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전당포는 자연스럽게 문학작품 속에서도 드러났다.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염상섭(1897~1963)은 한 잡지에 “가세가 궁함에 항상 전당포와는 인연이 가깝게 지낸다. 아침에 땔나무가 없어서도 저녁에 솥에 넣을 쌀이 없어도 부득이 의복이나 기구(器具)를 들고 행낭 뒷골 전당포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전당포를 찾는 자신의 빈한한 처지를 토로했다.현진건도 1921년 소설 ‘빈처’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아내 곁에 있는 전당포를 그리고 있다.

당장 끼니가 걱정인 서민들은 임시변통을 해주는 전당포를 들락거렸고 그런 점에서 전당포는 가난과 빈민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만 전당포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영화관을 가거나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찾는 학생도 있고 급히 경마장이나 도박판에 가려고 이용하는 자도 있었다.

우리나라 전당포만의 특징이 하나 있다면 이자가 상대적으로 매우 높았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2배 수준이었고 일본보다도 비쌌다. 고리를 감당 못한 사람들은 전당 잡힌 가옥이나 토지를 빼앗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돈에 쪼들린 자들이 남의 눈을 피해 전당포에 들고 온 물건들은 무엇일까?

1910년에서 1920년대 초반까지는 옷가지가 가장 많았다. 이 시기의 전당포에서는 토지와 집문서와 같은 부동산, 비녀와 가락지 등 패물, 의복과 솥 등 가재도구 등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물건이 담보물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인의 질옥과 달리 조선인의 전당포에는 놋그릇이 더 많았던 것이 특이하다.

1920년대 중반에는 세간, 학용품, 패물, 치마저고리, 비녀, 반지, 노리개 등이었다. 구한 말 훈장도 나왔는데 개당 3원이었고 옥편은 30전, 인력거꾼 웃옷은 1원에 맡겨졌다.

생계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이들이 사라지지 않으면서 “높은 이자와 야박한 변제 독촉으로 서민들의 고혈을 빨고 있다”는 원성에도 불구하고 전당포는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1960,1970년대에는 TV나 라디오 등 가전제품이나 재봉틀 따위가 주로 담보가 됐고 1980년대에는 밍크코트나 비디오, 컴퓨터가 주 품목이었다. 시대와 상관없이 가장 잘 통용되는 것은 감정도 쉽고 가치가 높은 보석이나 귀금속류였다. 대형 도박장이 있는 특정지역 주변에서는 각종 명품과 차량까지도 전당포 거래 대상이 된다고 한다.

최근에는 예전의 전당포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 됐다. 상당수가 물건 대신에 현금만 거래하는 대부업으로 그 기능이 바뀌어서다.

그렇다고 전당포를 거론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빼고는 얘기할 수도 없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이런저런 이유로 전당포 대신 대부업체 주변을 기웃거리는 자들이 있는 까닭이다. 그들에게 제1금융권은 고사하고 제2금융권 조차 접근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면 은행은 여전히 100년 전과 다름없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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