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인(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병인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2023년 새해 아침이 밝았다. 시간의 변곡점에 맞춰 새로운 무언가를 다짐하고 기약하는 일은 오래된 관습이다. 생애 첫 번째 생일 돌잔치 때 여러 물건 가운데 하나를 잡게 하여 미래의 직업을 결정짓는 것은 가혹할 정도로 운명적이지만, 걸음마를 이제 막 시작한 어린아이에게 주는 새로움의 선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 언저리 성인이 될 무렵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치는 일은 동서고금을 관철하는 중요한 생애 의례 가운데 하나이다. 60갑자를 마치고 새로운 주기를 맞이할 때 환갑잔치를 하거나, 70세나 80세에 칠순·팔순잔치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어른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매년 제사를 지내거나, 몇 백 주년을 따져 기리는 현창사업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두 지난하고 속절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움의 미덕을 찾고자 한 인류의 보편적 노력임에 틀림없다.

365일을 보내고 새로운 1년을 맞이하면서 비록 ‘작심삼일’의 악순환이지만 매번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주기적 재롱일지 모르겠다. 단순한 셈법만으로는, 3일에 한 번씩 마음먹는다면 이도 밑질 것 없는 다짐이지 않겠는가? 이리하여 2023년 새해, 두 가지 소망을 제안해본다. 하나는 각자의 ‘꼴값’을 제대로 따지면서 살아보자는 것이다. 이 단어는 현재는 ‘격에 맞지 않는 아니꼬운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본래 중립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꼴값’의 ‘꼴’은 ‘골’로 ‘사물의 모양새나 됨됨이’를 의미하며 ‘값’은 ‘가격’보다는 ‘값어치’를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꼴값’은 ‘모양새나 됨됨이에 해당하는 값어치’이다. 정연철의 ‘꼴값’은 “내 꼴에 맞는 값어치를 반드시 하겠다”고 작심한 중학생의 일상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의 모티프를 중학생의 ‘꼴값’ , 즉 봄바람 같은 10대의 발랄함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소설가의 눈에도 ‘꼴값’이 ‘본디 그대로의 참된 모습’이라는 ‘진면목(眞面目)’으로 이해되었던 것 같다.

사람은 각자 ‘꼴’을 갖추고 있고, 거기에는 어떤 편견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존재하는 그 자체가 권한이며, ‘다름’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는 모두 ‘다름’으로서의 나의 ‘꼴값’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를 지킴으로써 자존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꼴값’이 얼굴의 생김새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터이니,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목소리와 걸음걸이마저도 내 몫이 있는 셈이다. 이것을 소중하게 아끼느냐 마느냐, 만족하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나 스스로 ‘꼴값’을 높일 때 타자의 시선도 이에 상응할 것은 당연하다.

두 번째 소망은 ‘쓸데없는 일’을 찾아서 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한결같이 “쓸데없는 일 하지 마라”는 야단을 맞고 살아왔다. 그분들이 말했던 ‘쓸데있는 일’이라는 것이 고작 학교공부 말고는 없었으니, 이 세상사 모든 일이 ‘쓸데없는 일’이었던 셈이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뒤돌아보면 학교공부가 꼭 ‘쓸데있는 일’이었다는 증거도 없을 뿐더러, 학교공부 잘하는 것만으로 세상살이 잘할 수 있다는 그 어떤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20여 년의 소중한 시간 동안, 자신의 판단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강권으로 인해 그 어떤 주저함도 없이 마땅히 행했어야 할 다양한 경험을 ‘쓸데없는 일’로 낙인찍어 스스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그저 유년시절 슬픈 자화상으로 생각하기에는 억울함이 남는다.

세상을 돌아보면 전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어린 시절 ‘쓸데없는 일’에 힘썼던 이들이 많다. 애석하게도 ‘쓸모’ 여부를 어른의 경험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교육환경을 탓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지금이라도 스스로 나서서 ‘쓸데없는 일’을 찾아 열중해보는 것이 지혜롭지 않겠는가? 만화도 읽고 게임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악기도 연주하고 마술도 배우고, 요리도 하고 캠핑도 해보자. 비오는 날 화엄사 보제루에 걸터앉아 대웅전 앞 동서 쌍탑의 천년 세월도 마주해보자. 눈오는 날 운주사 벌판에 서서 장길산 부대의 비운도 느껴보자. 고즈넉한 주말 오후 보림사 대적광전 석등에 새겨진 불립문자의 지혜도 깨우쳐보자. 그냥 이것저것 다 해보자. ‘쓸모’ 여부를 세상의 판단에 맡기지 말고 내 의지대로 살아보자. ‘쓸데없는 일’로 인해 내가 행복해지고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쓸데있는 일’ 아니겠는가?

2023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자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쌓였겠지만, 내 ‘꼴값’에 충실하여 ‘진면목’을 드러내 보이려는 노력과 ‘쓸데없는 일’에 대한 열정이 더해진다면, 2023년 12월 31일 또 한 해가 지나가는 길목에 서서 세월의 흐름만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