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줄리아드음악학교. /줄리아드음악학교 페이스북 캡처
임형주
임형주

“투모로우바이투게더, 美 ‘빌보드200’ 첫 1위.”(2023년 2월 6일)

매주 화요일 오전이면 국내에선 K-팝 그룹들의 빌보드 차트 성적 기사가 쏟아진다. 정식 차트 발표는 한국 기준 매주 수요일이지만 미국 빌보드에선 하루나 이틀 전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과 메인 싱글 차트인 ‘핫 100’ 순위를 공개한다. 최근엔 K-팝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가 데뷔 3년11개월 만에 빌보드 200 정상에 올랐다.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 판타지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시시각각 찾아온다.

요즘처럼 ‘상전벽해’라는 말을 절감하는 때가 없다. 2003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세계무대 독창회를 할 당시만 해도 한국은 문화 변두리에 불과했다. 가슴속에 태극 마크를 간직하고 크로스오버·팝페라계의 국가대표라는 마음으로 지난 20년 동안 세계무대에 섰다. 그 시간 동안 대한민국 문화예술계는 놀라운 속도로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다. 올해로 세계무대 데뷔 20주년을 맞는 필자에게 그 속도는 5G처럼 다가온다.
 

영국 왕립음악원. /영국 왕립음악원 페이스북 캡처

K-팝은 어느새 세계 주류시장을 이끄는 흐름이 됐다.

2012년 ‘강남스타일’로 싸이가 쏘아 올린 ‘빌보드의 기적’은 2020년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 정복’으로 이어졌다. 세계 최고 권위의 음악시상식이자 비영어권과 유색 인종 아티스트에겐 ‘철옹성’과도 같았던 미국 그래미어워즈에 방탄소년단의 이름이 3년째 노미네이트됐다. 이들의 음반과 음원차트 성적, 해외 유력 언론과 평론가들의 호평, 국제적 권위의 음악상 수상 경력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방탄소년단이라는 브랜드엔 이미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방탄소년단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블랙핑크’ ‘세븐틴’ ‘스트레이키즈’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뉴진스’ 등과 같은 3~4세대 K-팝 그룹이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성취를 써내고 있다. 더는 빌보드는 기적이 아닌 너무도 ‘당연한 현실’이 됐다.

K-팝만이 아니다. 몇 해 전부턴 ‘K-클래식’이라는 말이 순수음악계에도 회자되고 있다. 우리 클래식은 대중음악보다 앞서 국제무대에서 주목받았다. 1965년 리벤트리트국제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며 한국 최초의 콩쿠르 입상자로 이름을 올린 한동일을 시작으로 ‘음악 불모지’ 한국은 특출난 역량의 음악가들이 시기마다 등장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긴 시간 동안 클래식 스타 1세대가 대거 등장했다. ‘정트리오’로 불리는 ‘마에스트로’ 정명훈,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첼리스트 정명화 삼남매와 피아니스트 백건우·서혜경·백혜선, 국내 3대 소프라노인 조수미·신영옥·홍혜경 등이다.

그 뒤로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 첼리스트 장한나를 비롯해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 피아니스트 손열음·김선욱 등의 2세대가 등장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를 3세대의 시기로 본다. 한국인 최초의 쇼팽콩쿠르 우승자(2015년) 조성진과 미국 밴클라이번 국제콩쿠르 역사상 최연소 우승자(2022년)로 이름을 올린 임윤찬을 통해 ‘K-클래식’ 열풍이 한창인 바로 지금이다. 3~4세대 K-팝 그룹의 성취와 3세대 순수음악계 젊은 음악가 사이엔 공통점이 존재한다. 세계 진출을 위해 다른 사람을 어설프게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로 글로벌 시장을 이끈 ‘트렌드리더’로의 역할을 해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엔 K-팝과 한국 순수음악계의 지난한 노력이 켜켜이 쌓였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팝음악시장의 본토인 영미 지역까지 뻗어 나간 K-팝은 소위 ‘3대 기획사’로 불려 온 SM·JYP·YG엔터테인먼트가 구축한 독창적인 시스템 안에서 성장했다. 1990년대 이전 주먹구구식으로 음악을 제작하던 시절에서 K-팝과 함께 체계적인 비즈니스모델이 만들어졌다. 일종의 ‘인재 육성’ 시스템이다. 캐스팅, 연습생의 트레이닝, 콘텐츠 제작을 위한 프로듀싱, 홍보부터 유통까지 이어지는 마케팅 등 전 과정을 K-팝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이는 한국 클래식 음악계가 거둔 성취 과정과도 닮았다. 5~7세의 나이에 동네 피아노학원에서 음악을 배우다 눈썰미 좋은 선생님에 의해 발탁돼 10세 전후로 국가가 운영하는 예술영재교육을 받은 뒤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음악원에 입학하는 수순을 밟는다. 이곳에서 지금의 젊은 음악가들이 태어났다.

K-팝업계의 기획사 역할을 하는 곳이 순수음악계에선 ‘한국의 줄리아드’로 불리는 한예종이다. 세계무대의 음악전문가들은 지난 수년간 일궈온 한국 클래식 음악의 성과는 한예종의 영재교육에 있다고 주목한다. 세계 3대 음악콩쿠르 중 하나인 퀸엘리자베스콩쿠르를 26년째 생중계하는 티에리 로로 감독은 자신의 다큐멘터리 ‘K-클래식 제너레이션’을 통해 “K-클래식의 비결로 영재교육 시스템”을 꼽았다.
 

이탈리아 로마 산타체칠리아음악원. /산타첼리아음악원 페이스북 캡처
이탈리아 로마 산타체칠리아음악원. /산타첼리아음악원 페이스북 캡처

지난해 개교 30주년을 맞은 한예종은 미국 뉴욕의 ‘줄리아드음악학교’나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 영국 런던의 ‘왕립음악원’, 이탈리아 로마의 ‘산타체칠리아음악원’ 등과 같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예술교육기관를 모델로 설립된, 국내 최초의 ‘국립예술대학’이자 ‘국립콘서바토리’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한예종의 입학시험은 까다롭기도 정평이 나 있다. ‘소수 정예’로 예술영재를 선발해 이른바 ‘국가대표 예술가’들을 양성한다.

주목할 것은 이 학교는 사실 국립예술대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예종은 고등교육법상 ‘각종 학교’로 분류된다. ‘각종 학교’는 정규 학교와 유사한 교육기관을 지칭하는 용어다. 대학에 준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학사 학위만 수여 가능하다. 때문에 일반적인 석·박사 학위의 취득은 불가능하다. 한예종에서도 석사 과정에 상응하는 ‘예술전문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학교로 박사 과정에 진학할 때에만 석사 학위와 상응하는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석·박사 학위 수여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유로 현재 ‘한예종 설치법’이 국회에 발의된 상태다. 한예종에 정식 대학 지위를 부여해 석·박사 학위를 제대로 수여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다. ‘한예종 설치법’은 앞서 1999년, 2005년에도 두 차례 추진됐으나 다른 대학의 반대로 무산됐다. 한예종이 예술계를 독식한다는 우려와 한예종에만 특혜를 준다는 시각이 컸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려는 나온다. 한예종에선 그러나 다른 대학과의 상생을 위한 발전계획을 세우며 함께 걷는 길을 찾고 있다. 수많은 음악영재를 육성하며 K-클래식의 선구자로 자리 잡은 한예종이 법안 개정을 통해 음악계에 할 수 있는 역할도 상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해외에서도 한예종과 같은 사례는 존재한다. 지금의 한예종처럼 학사 과정만 운영해오다 석·박사까지 학위 수여를 확장한 사례는 다수 있다. 한예종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는 뉴욕 줄리아드, 빈 콘서바토리,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등 실기 중심의 예술고등기관들도 디플롬(자격증, 졸업증)만 수여했으나 현재는 학위를 주고 있다. 직업음악가로의 과정에서 학위가 가지는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했기 때문이다.

음악가에겐 두 가지 길이 있다. ‘연주자(Player)’의 길과 ‘교육자(Professor)’의 길이다. 많은 음악가는 연주자가 되기 위해 예술학교에 진학하지만 성장하면서 가치관의 변화와 환경의 요인으로 진로를 변경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가 2000년대 눈에 띄게 성장한 것도 유학파 음악인들이 속속 귀국해 후학양성에 힘썼기 때문이다.

현재 교수나 강사 임용을 위해선 석·박사 학위가 필수인 시대가 됐다. 한예종의 여건은 음악계의 우려로도 이어지고 있다. K-클래식을 이끌고 있으면서도 각종 학교로 분류돼 해외 대학과의 교류에서도 제약이 생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예종 예술전문사 학생들은 석사 학위를 인정받지 못해 취업에도 영향을 받고, 한국장학재단 지원사업에서도 배제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남학생들은 졸업 후 산업기능요원으로 입대도 제한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치열한 과정을 통해 어렵게 입학한 학교의 여건은 학생들의 성장은 물론 미래 음악계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들에게도 사회로 나와 각자의 역할을 할 기회를 줘야 한다. ‘한예종 설치법’은 특정 학교를 위한 법안이 아닌 K-클래식을 꽃 피울 ‘미래의 인재’를 위한 법안이다. K-팝과 달리 순수음악 분야는 제도와 지원이 마련되지 않으면 고른 성장을 이루기가 어렵다. 토대를 닦으면 발전의 속도가 달라지리라 본다. K-클래식과 K-컬처의 지속 가능성은 온전한 시스템의 마련과 정착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본 기고는 헤럴드경제와 제휴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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