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룡(목포대 사학과 교수)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요즘 ‘전라도 천년사’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특히 고대사 부문은 일제 식민사학에 기초하여 서술되었다 하여 맹공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 언론사에서 관련 기사 타이틀을 ‘동네북 된 전라도 천년사’라고 뽑을 정도이니 할 말 다했다 싶다.

#‘전라도 천년사’ 편찬의 의미와 파장

‘전라도 천년사’ 편찬은 우리나라 지방행정의 근간을 이루는 도제(道制)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전라도를 처음 획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학문적으로 선양하기 위해, 전라도 정도(定道) 1000년을 맞은 2018년에 전남북도와 광주시가 공동 역사 정리사업의 일환으로 기획한 것이다. 그간 200명이 넘는 역사학자가 4년여의 각고 끝에 마침내 34권에 달하는 방대한 ‘전라도 천년사’를 완간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의미를 곱씹으며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했을 법한데, 엉뚱하게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전라도 천년사’ 비난의 최전선에는 ‘전라도오천년사바로잡기500만전라도민연대’(이하 ‘연대’)라는 시민단체가 서 있다. ‘연대’는 올 1월 10일 출범식을 갖고 ‘전라도 천년사’가 한반도 남부 전체를 고대 일본(야마토 왜)의 식민지 영토인 것처럼 서술했노라고 맹비난하면서 폐기 운동에 나설 것임을 선언하였다. 이후 관련 기사가 폭증하였고 5월에 들어서는 전남북도와 광주시의 일부 정치인들마저 ‘연대’의 주장에 동조하는 성명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격앙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전라도 천년사’ 집필진의 일원으로 참여한 필자로서는 일단 비난의 열기가 예사롭지 않게 번져가고 있음에 놀랐고, 비난의 대열에 서 있는 분들(이하 ‘그분들’이라 통칭) 중에 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전문 연구자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무엇보다 ‘그분들’의 핵심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이 있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다.

#이덕일 소장의 과거와 현재

이소장은 1990년대에 모 대학에서 일제 강점기의 흥미로운 주제로써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촉망받는 역사학자였다. 이후 근대 뿐만 아니라 고중세를 넘나드는 유의할만한 역사 평론서를 다수 출간하여 대중적 호평도 받아왔다. 필자는 이소장이 1999년에 출간한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김영사)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 필자는 1995년 목포대에 부임한 이후 영산강유역 고대사 연구에 심취해 있었던 터라, 이 소장의 그 책에 실린 <한국고대사의 최대 미스터리 : 잃어버린 왕국, 나주 반남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라는 글에 특히 관심이 갔고, 2000년에 <영산강유역 고대사회 성격론-그간의 논의를 중심으로->(지방사와지방문화 3권1호)라는 논문을 집필하면서 그 글의 논지를 비평적으로 인용 소개한 바도 있다.

이렇듯 당시 이 소장의 글에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필자에게는 지금 ‘그분들’의 선봉에 서서 ‘전라도 천년사’ 비난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참고로 1999년 이 소장 글의 개요를 여기에 간단히 소개하여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왜(倭)는 적어도 3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 왜는 400년과 404년 고구려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패하여 쇠퇴하더니 급기야 한반도 남부를 포기하고 일본 규수지방으로 건너가 동정(東征)을 감행하면서 강성해졌다. 강성해진 왜는 과거에 한반도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근거로 한반도 남부의 연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전남 나주 반남고분군은 고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던 그 왜라는 정치세력이 남긴 민족사적 유산이다.”

이렇듯 이 소장은 24년 전에 나주 반남고분군 조성의 주역이 다름 아닌 왜인 것처럼 기술하였다. 그런데 올 4월 27일자 광주일보 칼럼에서는 ‘전라도 천년사’가 일제 지배주의 관점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의 동학3대장을 배출한 전라도가 어쩌다 왜의 식민지가 되었나?”라고 자극적인 언사로 반문하면서 글을 마무리했다. 이 칼럼에서 그가 언급한 왜는 24년 전 그의 글에서 반남고분군을 유산으로 남겼다고 언명한 그 왜와 동일체임이 분명하다. 24년 전에는 왜가 반남고분군을 조성했을 것이라더니, 이번 칼럼에서는 ‘전라도 천년사’가 전라도를 왜의 식민지로 기술했음을 질타할 뿐만 아니라 ‘동학3대장’까지 소환하여 감성에 어필하고 있으니, 그 표변(豹變)의 무상함과 함께 선동적 책략마저 느껴져서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 소장은 5월 25일 광주문화방송에서 주최한 생방송 토론회에서 24년 전의 글이라고 변명하고, 또 자신의 당시 글의 논지는 한반도의 왜가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을 주장한 것이므로 ‘전라도 천년사’의 식민사학과는 정반대의 논리라는 것을 애써 강조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피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24년 전 그의 주장은 한반도를 거쳐 4세기에 일본열도로 건너간 기마민족이 야마토 정권을 수립한 다음에 다시 한반도로 진출했다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설’을 연상케 한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을 이 소장이 ‘왜’로 바꾸었을 뿐, 논지는 똑같다. 실제로 이 소장은 당시 글에서 자신의 주장이 에가미의 설에 의거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1948년에 주창된 에가미의 설은, 종전 직후에 이미 근거가 박약하여 용도 폐기처분 되어가고 있던 임나일본부설을 대신하여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일선동조(日鮮同祖)의 논리를 교묘하게 유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음흉한 논설로 알려진 바 있어,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2000년도 논문에서 이 소장 글의 문제점을 논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소장은 ‘전라도 천년사’가 임나일본부설을 맹종하여 전라도를 고대 야마토 왜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고 강변하고 있으니, 이에 앞서 자신의 왜에 대한 인식이 표변한 점을 우선 해명할 일이다. 그리고 필자는 40년 가깝게 한국고대사를 연구해 오면서 임나일본부설을 맹종하여 한반도 남부를 일본의 식민지로 간주하는 동료 연구자들의 논문을 본 적이 없고, ‘전라도 천년사’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런 주장을 개진한 글과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분들’의 주장이 시민단체와 정치권에까지 확산되어 가고 있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서기 지명 비정을 둘러싼 비난과 논변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여 ‘그분들’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미묘한 깨달음이 왔다. ‘그분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을 한반도에 비정하면 곧 임나일본부설을 신봉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실제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부 지명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임나일본부설의 전거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니, 그들의 믿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해방된 지 어언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한일사학계에서 용도폐기된 지 오래다. 더불어 우리 학계의 한국고대사 연구의 수준도 상호 학술적 실증과 논리의 경쟁을 거치면서 몰라보게 높아졌다. 특히 전국에서 진행된 고고학적 발굴 성과의 놀라운 축적은 자료의 빈곤에 허덕이던 한국고대사학계에 단비를 제공해왔다. 그 결과 자료가 없어 신라사의 일환으로 간주되던 가야사는 6세기 중반까지 그 독자적 역사 위상이 존속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백제의 일환으로만 간주되던 전라도의 경우 전남북 동부지역에서 가야문화적 실체가 드러났으며, 영산강유역에서는 백제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정치문화적 실체가 6세기 전반까지 지속되고 있었음이 확인되기에 이르렀다.

고고학 발굴 성과에 발맞추어 사료의 섭렵 범위도 크게 확대되었다. 우리 측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넘어서 중국 측 사서는 물론이고, 그간 금기시되어오던 일본 측 사서까지 ‘사료비판’이라는 역사연구의 기본원칙을 준수하며 확대되어 왔다. 더 나아가 일제 강점기 일본인의 연구물까지도, 그것을 맹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시사점을 찾기 위해서 참고하고 있다. 학술 연구에서 비판과 자유는 양보할 수 없는 필수적 덕목이고, ‘무엇은 안 된다’는 금기는 금물이다.

연구자라면 일본서기가 8세기 초 야마토 정권이 당시의 황국사관을 소급하여, 태초부터 일본은 원래 통일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통일 일본을 단일 계보의 천황이 통치해온 것처럼 현저히 조작한 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만 일본서기를 그렇게 조작 기술할 때 백제계 사서(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에서 백제사 관련 이야기들을 상당 부분 원용하였을 가능성은 인정하는 추세다. 예컨대 백제가 침미다례를 정복한 이야기나 백제와 반파가 기문을 둘러싸고 쟁패를 벌였던 이야기 등의 백제계 원자료가, 일본서기에서는 일본 천황이 백제에게 그 땅들을 마치 ‘하사’한 것처럼 조작 삽입한 것으로 보려는 것이 그 사례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연구자 그 누구도 일본 천황이 백제에게 ‘하사’했다는 일본서기의 조작된 문구를 인정하지는 않고, 다만 백제사나 가야사 복원을 위해서만 활용할 뿐이다. 이 경우에도 연구자들은 그간 축적된 고고학 자료와의 교차 확인을 필수적으로 거친다. 이는 연구자들의 관련 논문들을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금새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연구자들이 ‘하사’라는 문구를 그대로 추종하며 식민사학을 구사하는 것처럼 오도하고 있으니, 무지일까 악의일까 궁금하다.

그러니 지금 학계에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을 한반도에 비정했다고 하여 그것이 곧 일제 강점기의 임나일본부설을 신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곡해하는 것은 악의적 선동에 가깝다. 더욱이 한국고대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통째로 임나일본부설의 재판으로 재단하여 식민사학의 재현으로 몰아가고, 심지어 연구자들을 ‘친일 매국노’로까지 규탄하는 것은 너무도 유치하고 시대착오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심지어 근무하는 대학에 찾아가 식민사학자 아무개를 파면하라는 구호를 외쳐대며 난리를 피우기도 하였다 하니, 이러한 작태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일이다.

#한국고대사 연구성과와 성취

그간 한국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축적됨에 따라 3국 중심에 머물러 있던 한국고대사 인식체계는 3국 정립 이전에 존재했던 다양한 정치체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에 힘입어 문화재청은 3국의 고도(古都)에 한정했던 한국고대사 관리체계를, 정체성이 확인된 3국 이외의 정치체로까지 확대하기 위하여 2020년 ‘역사문화권 정비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가야역사문화권과 마한역사문화권이 3국에 더해져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등재도 가시적인 범위에까지 다다랐다. 이러한 성취들은 그간 한국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가 일구어온 연구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선과 악으로 나누는 우격다짐은 안 된다

어느 누구도 혹자의 학술적 견해에 대하여 선과 악으로, 정답과 오답으로 나누어 집단적으로 무시하고 규탄하고 선동해서는 안 된다. 이는 학문을 사전 검열하고 연구에 금기의 굴레를 씌우려는 반지성적 작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국고대사학계의 연구자들도 북한 역사학계의 거두 김석형 선생이 1960년대에 주창했던 분국설에 입각하여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들(임나, 기문, 반파, 안라, 침미다례 등)을 일본열도에서 찾고자 하는 일부 ‘그분들’의 성심과 진정성을 존중하고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지명 비정을 통해 백제가 일본열도와 중국대륙에 진출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그분들’의 ‘대백제론’까지도 함께 따져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다만 그거 아니면 안 된다는 우격다짐은 안 된다.

한국고대사학계의 연구성과를 통째로 식민사학으로 규정하고 성토하여 어쩌자는 것일까? 이는 반지성의 극치를 드러내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게도 모든 한국고대사학자들을 일본의 비이성적 극우파 인사들의 우군으로 몰아가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근래 진행되고 있는 ‘전라도 천년사’ 논란이 누굴 위한 다툼인지 되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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