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성(호남역사바로세우기국민연대 상임고문, 원광대 강사, 전 KBS전주총국 보도국장)

 

김명성 호남역사바로세우기국민연대 상임고문
김명성 호남역사바로세우기국민연대 상임고문

전라도천년사 서술을 놓고 시민단체와 기성 학계가 갈등을 빚고 있다. 이는 해방 이후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아온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현주소로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특히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이순신 장군의 若無湖南 是無國家를 긍지로 삼아온 호남민들이 ‘일왕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若無日王 是無國家로 쓴 전라도천년사를 봤을 때, 의분(righteous anger)과 저항은 정당하다. 강봉룡 목포대 교수도 앞선 남도일보 기고를 통해 ‘일본열도에 진출했다는 주장을 따져 봐야 한다’고 언급했던 것처럼 학계에서도 뒤늦게나마 지적(知的) 게으름은 없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소중한 기회다.

#해방 이후 단재 신채호 vs 두계 이병도의 대결

성균관 박사 출신으로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언론 활동까지 망라한 단재 신채호 선생. 조선상고사에서 선생은 역사 서술의 원칙으로 ①맥락을 찾을 것 ②상호 관련성을 규명할 것 ③국수주의를 버릴 것 ④사회상을 보존할 것을 강조했다. 이를 토대로 ①옛 비석의 수집과 선택(금석문) ②역사서 간 비교와 대조 ③명사의 해석(한자, 이두) ④위서의 판별(진위 문제) ⑤몽골·만주·터키족의 언어와 풍속의 연구 등을 역사 연구의 자세로 제시했다.

이러한 바탕에서 기억을 토대로 옥중에서 탄생시킨 것이 ‘조선상고사’다. 특히 사고전서(四庫全書)까지 북경대 도서관에서 살핀 기억을 토대로 살아있는 역사를 기술했다. 사고전서란 무엇인가? 중국 역사서 전체를 망라한 원전(原典)이다. 따라서 단재는 우리 역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누락시킨 역사도 보강했다.

두계 이병도는 누구인가? 우리나라 역사학의 태두(泰斗·가장 권위 있는 자)로 통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조선사편수회는 무엇인가?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부 부설 기관으로 우리 역사인 ‘조선사’를 총독부 독점적으로 기술했다.

신채호와 이병도의 역사 서술은 극명하게 다르다. 대표적인 사례로 낙랑군은 지금의 북경근처로 비정한 것과 대동강 일대로 비정한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전혀 다른 주장은 신채호가 원전과 현장답사를 중시했다면 이병도는 선행연구로서 일본인들의 논문을 중시했다. 딱 그 차이다. 그러나 기성학계는 단재의 학문적 업적을 나라 찾는 열정으로 만들어진 부풀린 역사쯤으로 취급한다.

#기성 역사학계는 국민으로부터 왜 불신 받고 있나

해방 이후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이병도의 학풍을 전적으로 이어받았다. 이유는 이병도가 사료 비판을 기본으로 역사연구 방법을 확립한 랑케( Leopold von Ranke 1795~1886)를 이어받았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증주의(實證主義) 역사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병도의 실증주의는 제자, 제자의 제자들에게 박수를 받았을지언정 국민은 외면했다.

①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현이 된 이유를 보자. 이병도는 ‘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고 밝혔다(낙랑군고). 근거는 스승인 이나바 이와기치의 견해를 무조건 따른 것이다. 이병도의 한마디가 중국의 만리장성이 황해도 수안까지 밀고 들어온 근거가 됐다. 그런데 실증이라면, 하북성 창려현의 옛 이름이 수성현이며 부근에 갈석산이 있다는 기록을 눈여겨봐야 했다. ‘실증’이라는 말이 참 옹색해진다.

②백제의 건국 시기를 보자. ‘나의 연구한 바로는 엄밀한 의미의 백제의 건국은 온조로부터 제8대 되는 고이왕 때에 되었다고 믿는 바이다. 고이왕 이전은 부락 정치시대에 불과하였을 것이다’(조선사대관). 이 한마디로 백제의 역사는 1~7대 왕의 치세는 설 땅이 없게 됐다. 근거는 무엇일까? 일본인 스승들이 제기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이병도는 실증적 검증보다는 일본인 논문 추종만을 우선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두 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와 이병도의 역사연구에 박수칠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게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현주소다.

#총독부 역사관에 분노한 호남인의 전라도천년사

호남지방 가야사 연구는 호남인들에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났다. 하나, 명백한 가야 유적과 유물이니 경사일 수밖에 없다. 특히 제철 유적지와 철기류, 도자기류 등은 호남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관광자원이 될 게 분명했다. 둘, 그런데 그 유적이 임나의 유적이라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학계가 말하는 임나(=가야)는 일본열도의 일왕-야마토 왜(倭)와 연결되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즉 임나일본부설과 직결된다. 한쪽은 기성학계, 다른 한쪽은 호남인들의 관점으로 상반된다.

이는 일본의 현행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일본은 가야의 영역을 ‘임나’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들이나 우리 학계나 ‘임나=가야’이고 ‘가야=임나’로 통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공황후라는 일본인들만 우러러보는 신화적 존재가 ‘바람타고 날라와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고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록에서 이들 지명을 우리 땅에 모두 박아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일왕의 통치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은 교과서에 임나로 표기하고 있지만 우리 역사학계는 임나가 가야라는 전제 아래 (국민들의 정서를 의식해) 가야로 표기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열도에 있어야 할 7국이 호남 곳곳에 박아 둔 게 증거다. 마치 일왕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若無日王 是無國家’로 기술된 호남 역사에 분노하지 않을 자는 누가 있을까? 역사 교수들 빼곤 아무도 없다!

#임나는 일본 땅인가, 우리 땅인가 논증은 옛 얘기

가야는 가장 일찍부터 일본열도에 진출했다. 그 뒤로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진출이 잇따른다. 이들도 본국의 대결 구도에 따라 서로 쟁투가 벌어진다. 일본열도로 건너간 이들이(渡來人) 소국을 여기저기 세울 수 있었던 까닭은 일본열도에 이렇다 할 세력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야마토 왜가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며 일본국을 형성해간다. 가야(562), 백제(663), 고구려(668)의 멸망은 야마토 왜가 드디어 일본이라는 국호를 칭하며 일왕 통치의 영향력이 발휘하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게 임나이며 그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해 동해를 건너온 도래인 소국 세력들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조정력을 발휘하게 된다.

임나는 일본열도에 있던 당당한 소국의 하나이며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는 게 선학들의 견해다. 일본서기를 외울 정도였다는 최재석 고려대 교수(사회학)의 100 편이 넘는 가야·임나 관련 논문들이 그렇다. 임나일본부설을 뿌리째 흔든 김석형, 그 제자 조희승, 그리고 윤내현(단국대), 이덕일(순천향대), 남창희(인하대), 문정창, 이유립, 김성호, 이종항, 윤영식 등의 연구는 모두 일본열도에서 벌어진 역사로 논증을 끝냈고 견해도 적극 피력했다.

#일본열도 논증한 김석형·조희승 학설의 ‘불편한 진실’

북한은 임나의 역사는 일본열도에서 벌어진 실제 역사로 1960년대에 이미 논증을 끝냈다. 김석형의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분국설(日本列島分國說)은 일본 학계에 그야말로 지진을 일으켰다. 그 제자인 조희승은 임나의 정확한 위치를 결론냈다. 그는 일본에서 자란 재일동포 출신이었으므로 일본열도의 지형에 훤했다.

“任那者, 去筑紫國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임나는 축자국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다.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의 위치다. 축자국을 대마도나 후쿠오카로 비정하니 당연히 일본열도이고 대마도에서 규슈 후쿠오카·이토시마로, 혼슈 오카야마로 점차 동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김석형의 제자 조희승은 오카야마로 단정한다. 근거는 문헌 기록, 조선식 산성, 조선식 고분, 철제 무기류, 가야토기, 그리고 무수히 널려있는 가야 지명과 설화 등이다(민속학). 이렇게 북한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이나 임나의 위치나 가야의 형성과 멸망 과정은 이미 정리가 끝난 사안이다.

전라도천년사 역사기술이 일본열도가 아닌 우리 땅의 역사로 기술된 이유는 북한학자들의 연구성과이니 무시하고 백년 전 일본인 논문을 선택한 결과다. 어느 권위자는 북한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주체사상의 발현’쯤으로 폄하한다. 학자로서 할 말은 결코 아니다. 분단이 낳은 비극이고 역사연구 밑바닥에 끈끈히 배어있는 매카시즘(McCarthyism)이다.

#일본학계-남한학계, “임나는 우리 땅에서 펼쳐진 역사”

①반 노부토모(伴信友 1773~1846) ②일본 육군참모본부(임나명고) ③칸 마사토모(管政友. 칠지도 발견자) ④나카 미치요(那珂通世 1851~1908) ⑤구로이다 가쓰미(1874~1946) ⑥쓰다 소우기지(津田左右吉 1873∼1961) ⑦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 932) ⑧아유까이 후사노신(鮎貝房之 1864~1946) ⑨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 保和 1904~1992) ⑩미지나 아키히데(三品彰英) ⑪이케우찌 히로시(池內宏 1879~1952) ⑫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임나를 남한 땅으로 못을 박고 조선 침략을 꿈꾸었던 일본 극우파와 군부, 어용학자, 조선총독부 소속 연구자 명단이다. 이들은 겉으론 실증주의 사학(랑케)을 내세우며 속으론 실용적인 사학(조선 침략 논리)으로 가야를 임나로 바꿔치기하고 그 임나를 일왕 지배로 묶었다. 그러니 조선 식민지 침략은 과거 일왕이 다스린 고대 식민지의 복원이 된다.

지금의 전라도천년사 역사기술은 이들의 연구를 고스란히 잇고 있다. 즉 대전제인 ‘임나=가야=우리 땅’이 생생히 살아 있다. 호남인들 중 누가 이들의 역사연구에 박수를 칠 수 있을까? 역사교수들 외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기성학계의 지적(知的) 빈곤, 남북교류시 ‘무너질 모래성’

역사학계는 해방된 지 78년 지나고 있음에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불만이 많다. 심지어 공개적인 학술발표회에서 박수는커녕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들은 식민사학은 벌써 극복됐다고 말한다. 그런데 연구자가 아닌 역사를 살아가는 국민과 지역민의 입장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첫째, 기성학계의 모든 역사학은 일본인들의 ‘짓’일 거라는 강한 불신이다. 전북 산악권에 드러난 가야유적이 ‘기문·반파’라는 소국이라는 주장을 보자. 아유까이 후사노신이 주장한 영남권에 대해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한 호남권으로 확장이라는 백년 전 케케묵은 주장을 꺼내 든 것이다. 죽은 일본인들의 (날조) 주장이 뭐가 새롭고 뭐가 그리 중요한가!

둘째, 모든 역사의 길은 조선총독부로 통한다.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전쟁을 보면, 원정군은 몇 달 걸릴 곳에서 출발한다. 대동강 건너려고 함대를 동원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거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역사해석의 기준(frame)이 있다. 그 틀 안에서 역사서를 해석하다 보니 너무 불합리하다.

셋째, 새로운 주장이 나오는데 기성학계는 누르기에만 급급하다. 중국 유학파 출신의 교수들이 문헌과 고고학을 토대로 평양이 대동강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대륙의 평양을 인정해야 역사기록이 이해된다. 그러나 기성학계는 ‘사이비’’로 몬다. 기성학계가 스스로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다.

넷째, 역사연구가 대중화되고 인터넷으로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다. 높은 지성의 똑똑한 공중(public)의 출현이다. 특히 북한에서는 1960년대 낙랑군 위치 논란이나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끝났다는 사실도 명백히 알게 됐다. 많은 이들은 남한의 역사학계만 여전히 조선총독부 틀에 갇혀 있다는 인식에 크게 실망한다. 그러한 누적된 모순이 비판의식이 높은 호남에서 기성학계에 반기를 들게 했다. 따라서 전라도천년사 저항은 엉터리 역사에 봉기한 ‘역사혁명’(historical revolution)이다.

다섯째, 역사학의 남북교류가 이뤄지면 가장 먼저 무너질 곳은 남한 역사연구 분야가 될 게 빤하다. 남한학계는 조선총독부를 변호해야 한다. 딱 조롱거리다.

#전라도천년사 해법… 폐기 또는 ‘동일분량의 도민집필’

우리나라에서 학자가 아니면서 가장 많이 출판되는 학문 서적은 역사서다. 여기에는 기존의 역사연구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짙게 깔려있다. 어떤 이는 역사학의 지적(知的) 게으름과 지적 빈곤을 말한다. 전라도천년사 역사논쟁은 어차피 학계든 도민이든 둘 중 어느 곳도 정확할 확률은 50%다. 또는 완전 거짓일 확률도 각각 100%다. 이는 낙랑군 위치가 대동강이냐 발해연안의 대륙이냐 문제와 똑같다.

문제는 호남인들은 기성학계의 주장에 박수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재야의 고수들’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실제 그 고수들은 원전에 훤하고 일본서기도 줄줄 외운다. 중국 역사서도 꿰고 있다. 방대한 사고전서에도 통달해 있다.

전라도천년사의 해법은 완전 폐기다. 돌파구가 있다면, 어차피 진짜 역사일 확률이 50%인 진실게임이니 호남인이 참여하는 ‘동일분량의 도민집필’이 병기(倂記)되어야 한다.
 

임나를 남한 땅으로 수록한 일본교과서. 일본교과서는 임나일본부를 통해 남한 땅을 369~562년 다스렸다고 수록.
임나를 남한 땅으로 수록한 일본교과서. 일본교과서는 임나일본부를 통해 남한 땅을 369~562년 다스렸다고 수록.
상반된 관점을 보이는 고대 임나의 위치. 조선총독부와 전라도천년사는 임나를 남한 땅으로 규정한 반면 많은 연구자와 북한학계는 임나는 일본 땅의 소국으로 규정. 출처/미디어 시시비비
상반된 관점을 보이는 고대 임나의 위치. 조선총독부와 전라도천년사는 임나를 남한 땅으로 규정한 반면 많은 연구자와 북한학계는 임나는 일본 땅의 소국으로 규정. 출처/미디어 시시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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