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주인공인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 출연 중인 아역 배우들. /신시컴퍼니 제공
아이들이 주인공인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 출연 중인 아역 배우들. /신시컴퍼니 제공

 

“우리 애가 아홉 살인데 이쪽으로 갈 수 있을까요? 우리 애 잘될까요?”

뮤지컬음악감독으로 오래 일하다 보니 재능 있는 어린아이를 많이 만나고 소개도 많이 받는다. 그들의 부모도 많이 만났다. 그럴 때마다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난 이 질문에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다. 그럼 부모들은 이렇게, 저렇게 돌려서 재차 물어본다. 그래도 절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에게 이 질문을 되물었다.

“부모님은 아홉 살 때 커서 뭐가 될지 아셨어요?”

그러면 부모들은 멋쩍게 웃으며 “그렇지 않았다”고 답했다. 자신이 아홉 살 때 앞으로 커서 뭐가 될지, 무슨 일을 할지 알았다고 대답한 부모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내가 만난 모든 부모, 아이 보호자가 그렇진 않았지만 유독 어릴 때부터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음악, 체육 분야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오랫동안 이 질문을 받았기에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아직도 그들의 사고방식이 나에겐 무척이나 신기하다.

왜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미래의 직업’을 결정해야 할까? 왜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까? 이들이 생각하는 음악교육의 목표는 무엇일까? 이들에게 교육은 무엇일까?

이 화두를 떠올리며 내가 생각해온 교육에 대해 다시 한번 찬찬히 정의를 내려봤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했고,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긴 연습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음악을 전공했고, 지금도 음악과 공연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모든 아이는 다 다르게 태어난다. 이걸 모르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부모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사고 과정을 유추해보자면 대략 이렇지 않을까 싶다.

아홉 살 아이가 무언가에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한 부모는 그때부터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아이의 재능을 노래라고 치자. ‘아, 우리 아이가 노래에 재능을 보이니 적극적으로 지원해 이 길로 가게끔 해줘야겠다. 아이는 너무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니 부모인 내가 열심히 해야 좋은 루트를 따라갈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이 기울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노래 레슨을 시키고, 많은 노래를 듣게 하며, 영상을 보게 하고, 공연장에도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미래의 뮤지컬배우를 꿈꾸는 어린이들이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됐던 뮤지컬 ‘마틸다’의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해 춤과 노래를 배우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미래의 뮤지컬배우를 꿈꾸는 어린이들이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됐던 뮤지컬 ‘마틸다’의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해 춤과 노래를 배우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반면 이런 경우도 있다. 부모가 보기에 아이는 노래에 재능이 없는 것 같은데 이 아이는 노래를 할 때마다 너무 행복해 한다. 가수가 되겠다 하고, 학원에 보내 달라고 한다. 부모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럼 전문가에게 물어보고, 재능이 있다고 하면 시키자. 이러한 사고방식엔 너무 많은 실수가 있다. 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의 무언가를 정하기에는 너무 성급한 나이다. 사는 동네를 벗어나 다른 도시에서 살아본 경험도 많지 않을 것이고, 다른 나라를 경험한 적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많은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아이는 마침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자 즐거움 가운데 하나인 ‘노래’에 노출됐을 것이다. 부모는 이를 보고 그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아는 스펙트럼 속에서만 아이를 보고, 그 안에서 자신의 눈이 포착한 아이의 재능을 보고 길을 열어주려고 했을 것이다. 아이는 사실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데 부모가 알아차리지 못해 음악교육을 했다면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부모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 아닐까.

아홉 살에 ‘인생의 길’을 결정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도박이다. 부모가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지원해주려는 그 사랑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그토록 어린 나이에 결정하려고 하는 것일까? 혹시나 부모나 보호자가 생각하는 ‘교육’이 전공, 직업이라는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며 달려가야 하고, 그 목표에서 벗어난 교육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라파엘 파야레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라파엘 파야레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음악을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이 훌륭한(유명한) 음악가로 성장한다는 건 엄청나게 낮은 확률이다. 이것이 ‘하늘의 별 따기’인 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일단 아이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야 하고, 너무 늦지 않게 부모가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 그런 뒤엔 아이의 재능을 잘 이끌어줄 옳은 스승을 단번에 만나고, 엄청난 연습기간과 연습량 속에서도 아이가 음악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계속되는 콩쿠르와 경쟁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음악 영재 사이에서도 눈에 띄어 이름을 알리고, 전 세계를 평생 유목민처럼 돌아다니며 음악만으로 돈을 벌며 먹고 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어릴 적부터 음악을 했고 전공도 했으나 이런 음악가가 되지 않은 사람이 확률상으로만 봐도 훨씬 많다. 그럼 이들은 음악에 ‘투자’했던 모든 시간과 비용은 허투루 쓴 것일까? 왜 음악교육(혹은 예체능교육)은 훌륭한 음악가나 선수가 됐을 때만 가치가 있고, 한 아이가 훌륭한 성인이 될 수 있도록 풍부한 자양분이 되는 것에는 그다지 가치를 매기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아이의 미래를 일찍 결정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과정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입시, 전공, 취직, 직업 등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만 달려가는 교육. 그 결과를 얻기 전까지는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고, 힘들어도 참고 결과를 얻어낼 때까지 참는 것.

예전에 이런 얘기까지도 들은 적이 있다. “난 반려견 안 키워. 10년밖에 못 사는데, 10년 후에 죽을 텐데 뭐 하러 키워.” 그럼 우리도 결국엔 다 죽을 텐데 왜 살아가고 있나? 물론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에선 지금도 교육에 있어서는 이러한 ‘결과주의적 시각’이 짙다. 우리는 왜 이렇게 과정의 중요성을 잊게 됐을까? ‘결과’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이 ‘과정’인데 그 과정을 지워버리면 얼마나 그 인생이 공허하겠는가.

부모는 아이를 어떻게 교육하면 좋을까?

내 경험에 비춰 생각해보자면 일단 부모는 아이에게 많은 재료를 줘야 한다. 돈을 많이 들여 아이에게 최고를 갖다 주고, 취미활동을 많이 시켜 주고, 다 만들어진 것들을 떠먹여 주고, 어디 멀리 해외여행을 자주 나가라는 얘기가 아니다. 아이가 배움의 즐거움을 알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생기도록 해야 한다.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움 없이 생각이 멀리, 깊게 뻗어 나갈 수 있게 세상의 많은 것을 보여주고 아이가 거기서부터 무언가를 시작해볼 수 있는 재료를 주라는 얘기다.

이런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부모, 보호자가 아이들에게 꼭 가르쳤으면 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정신을 키우는 예술, 그것을 담아내는 몸을 키우는 체육, 그리고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동물 키우기’다.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입시에 밀려 이것을 ‘교육’으로 인지하지 않지만 이것만큼 아이를 균형 있게 키워낼 분야도 없다.

예술 중에서도 음악, 특히 단체로 하는 ‘합창, 오케스트라 경험’을 추천한다. 이를 통해 음악 자체가 인간에게 주는 여러 감정 외에도 사회성, 사람과의 대화법, 약속을 지키는 습관을 키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식과 마음을 잘 담아낼 신체를 잘 키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체력이 뒷받침되면 다시 일어서고 해낼 수 있는 정신적 힘이 생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동물 키우기’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키우면 생명을 지키고 길러 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질 수 있고, 언어가 달라도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다. 마침내 동물과 교감을 이뤄냈다면 그 아이는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한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경험하며 지구에서 함께 살고 있는 동물과 생명에 대한 이해력을 키울 수 있다. 이타적인 인간으로의 성장을 돕는 것이 바로 동물을 키우는 일이다.

나 역시도 어려서부터 무척이나 내성적이었지만 학교 오케스트라를 하며 단체생활에서의 약속과 대화법을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다. 남의 소리를 듣는 법을 배웠고, 그 속에서 내 소리를 어떻게 내야 조화로운 하모니가 만들어지는지도 배웠다.

학교 농구부에 들어가 몇 년간 매주 연습도 나가고 시합도 나갔다. 음악은 참 쉬웠는데 농구는 너무 어려워 참 못했다. 그렇게 몇 년간 꾸준히 농구를 했다.

집에서는 거북이부터 고양이까지 동물을 키웠다. 내가 자란 미국 서부에서는 말을 쉽게 접할 수 있었기에 학창 시절엔 말을 타면서 농장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보다 더 크고 위대한 말을 다루고 교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껏 내가 일하면서 써먹은 모든 지혜는 이 시절 말을 타면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참고로 오케스트라, 말타기라고 하니 마치 엘리트주의 교육인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 서부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예술, 체육, 동물 기르기. 아이가 이 세 가지를 통해 올바른 인성을 기르고 많은 것을 경험한다면 성인이 돼 갖는 직업 역시 그 아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즐길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모든 부모와 보호자의 바람이지 않을까. 어렸을 때 배웠던 모든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든 훌륭한 자양분이 된다. 쉽게 말해, 어떤 형태로든 써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목표만을 위해 달렸던 교육은 잠시 멈추고, 이 지구의 모든 재료를 경험해보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기며, 노래하고, 춤추고, 동물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 싶다.

※본 기고는 헤럴드경제와 제휴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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