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공장서 일하고 밤에는 들불야학 교사
재취업 첫 출근날 박기순 비보접해
들불형제와 일하던 ‘노동자의 벗’
스무두살 나이에 연탄가스로 운명

김상윤·이양현과 교류 지속하며
운동가로서 자세 가다듬어 나가
이태복 광주 방문시 교류 장 마련
정세 공유하며 전민련 동지 확보

 

윤상원은 귀향후 한남플라스틱에서 공장생활하다가 양동신협에 재취업한다. 한남플라스틱과 양동신협 근무하면서 들불야학과 인연을 맺어 강학(교사)으로 활동하면서 ‘운동가’로서 삶의 자세를 갖춰 나간다. 사진은 윤상원과 함께 들불야학에서 함께 강학을 한 이른바 들불형제들 모습./(사)윤상원기념사업회 제공
윤상원은 귀향후 한남플라스틱에서 공장생활하다가 양동신협에 재취업한다. 한남플라스틱과 양동신협 근무하면서 들불야학과 인연을 맺어 강학(교사)으로 활동하면서 ‘운동가’로서 삶의 자세를 갖춰 나간다. 사진은 윤상원과 함께 들불야학에서 함께 강학을 한 이른바 들불형제들 모습./(사)윤상원기념사업회 제공

◇이태복과의 본격적인 만남

윤상원이 한남플라스틱에서 일하고 있던 중 이태복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일요일이었기에 시내 다방으로 나갔더니 함께 무등산에 가자는 거였다.이태복은 무등산 중머리재에 오르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특히 당시 맹렬하게 세력을 확장하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 1976년 10월 결성된 단체) 조직에 대한 입장이 어떤지를 물었다. 왜냐하면 윤상원이 현장에 들어갔다가 생활 때문에 양동신협으로 이직했는데, 그곳에 식민지해방론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인사가 있어서 걱정이 된 것이다. 더욱이 양동신협 이사장의 배려로 직원이 될 수 있었는데, 이사장이 김세원으로 과거 혁신계 활동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광주 분위기가 다른 지역과 달라서 반합법적 농민운동과의 결합도 중요한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분명한 태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남민전의 지도부인 신향식 선생과의 토론내용도 소개해줬다.

윤상원은 ‘운동가로서 훌륭한 삶의 태도를 갖는 것과 과학적인 운동을 하는 것은 다른 것 같다’며, ‘그 분들이 갖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이 식민지 반봉건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은행원 체험이나 한국사회의 현실과 거리가 멀고, 또 지식인들끼리 조직해서 조급하게 움직이면 사건만 일으키고 대중을 움직일 수 없는 것 같다’면서 이태복의 정세인식에 전적인 공감을 표시했다. ‘자신도 광주에서 구 혁신세력의 선배도 알고 존경하지만, 운동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복은 윤상원에게 ‘나와 개인적 만남을 비롯해 일체의 정보를 노출시켜서는 안 되며, 녹두서점의 김상윤 선배도 훌륭한 분이지만, 조직을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니 보안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또 ‘현장학습조직과 야학교사모임은 서로 연관된 것이니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서 결합해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윤상원도 한남플리스틱에 일하면서 노동운동의 방식에 대해 아직도 많은 학습과 경험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 들불야학에 전념하면서 보안에 신경 쓰겠다고 하였다.

윤상원이 강학으로 활동한 들불야학은 1970년대 광천공단 등 광주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배움의 터전으로 명성이 높았다. 1979년 1월 23일 열린 들불야학 3기 입학식에는 40여 명의 학생과 14명의 강학, 학부모와 시민아파트 주민들까지 15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은 들불야학 야유회 모습./(사)윤상원 기념사업회 제공
윤상원이 강학으로 활동한 들불야학은 1970년대 광천공단 등 광주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배움의 터전으로 명성이 높았다. 1979년 1월 23일 열린 들불야학 3기 입학식에는 40여 명의 학생과 14명의 강학, 학부모와 시민아파트 주민들까지 15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은 들불야학 야유회 모습./(사)윤상원 기념사업회 제공

◇노동자의 벗, 박기순

1978년 12월 26일, 윤상원은 양동신협에 첫 출근을 했다. 얼굴을 처음 대하는 직원들과 미처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윤상원은 참담한 비보에 접하게 된다. 들불야학 1기 강학인 박기순이 저 어둡고 먼 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박기순은 1976년 전남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학내에서는 루사에서 활동하다 1977년 7월 공용의, 조명옥, 한동철 등과 함께 산수동 경로당에서 ‘꼬두메’ 야학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1978년 6월 전남대 ‘우리의 교육지표사건’ 때 가두시위를 주도하여 무기정학 처분을 받게 된다.

1978년 7월 23일, 박기순은 들불야학 1기 강학으로 ‘들불야학’을 창립하고 수학 강학을 맡고 있었다. 들불이라는 이름도 박기순이 직접 지었다. 동시에 1978년 10월부터는 하루 일당 800원으로 광천공단 내 ‘동신강건’ 회사에 견습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12월 24일, 광천동성당 크리스마스 행사에 들불야학 팀이 단체로 참여했다. 이들은 전남대 연극반 출신 박효선이 만든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공연했다. 내용은 광천공단에서 일하는 어느 노동자의 서사를 통해 당대의 노동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러한 인연을 계기로 박효선은 들불야학 3기 강학으로 합류하여 문화를 다루게 된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들불야학 강학 및 형제들은 윤상원의 자취방에서 뒷풀이를 했다.

12월 25일 성탄절날 야학당에 지필 난로의 땔나무를 구하러 박기순과 학생들은 함께 화정동 광주소년원 뒷산에 올라 장작을 모았다. 그날 밤 박기순은 밤늦게 귀가했었는데 피곤하여 오빠 집에서 자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영면한 것이다. 박기순, 스물 둘, 들불야학을 창립하고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당시 가두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들불 형제들과 함께 공장에서 일을 했던 노동자의 벗이었다.

이틀 밤낮의 장례 일정 동안 윤상원은 박기순의 곁을 말없이 침묵으로 지켰다. 소설가 황석영이 조사를 하고, 문병란 시인이 조시를 읊었으며, 마침 광주에 온 김민기가<저 들에 푸르른 솔잎이 되어>라는 영결가를 바친 영결식장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들불야학 1기 강학으로 활동 중 연탄가스에 중독으로 운명을 달리한 박기순의 생전 모습. 박기순은 훗날 같은 들불야학 강학이었던 윤상원과 영혼결혼을 한다./(사)윤상원 기념사업회 제공
들불야학 1기 강학으로 활동 중 연탄가스에 중독으로 운명을 달리한 박기순의 생전 모습. 박기순은 훗날 같은 들불야학 강학이었던 윤상원과 영혼결혼을 한다./(사)윤상원 기념사업회 제공

◇윤상원의 필살기 ‘소리내력’

윤상원은 주택은행에 입사하기 전인 1977년 광주YMCA의 민속극교실에 참가하여 북과 장구, 꽹과리의 기본가락을 익히고 탈춤의 춤사위를 배웠다. 민족극교실을 마련한 황석영 작가조차 윤상원의 빠른 익힘과 뛰어난 기량에 놀랄 정도였다.

원래 1976년 윤상원이 의식화 학습을 할 때 처음 선보인 노래는 <무지개 사랑>이었다. 학습이 끝난 뒤나 결혼, 또는 회갑 등 잔치가 있을 때면 운동권 식구들이 모두 모이게 되는데 이때면 으레껏 돌아가며 노래 한 소절씩 부르는 게 보통이었다. <무지개 사랑>은 함께 학습하던 이현우가 불렀던 노래인데 윤상원은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여 좌석마다 즐겨 불렀었다.

그러던 중 1977년 5월 어느 날 김상윤과 함께 전남대 강당에서 박동진의 판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윤상원은 아까 들었던 박동진의 판소리를 입에 침을 바르며 감탄을 연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연 중에 잠깐 귀담았을 뿐인 판소리 한 소절을 흉내 내는데 당시 김상윤도 감탄할 정도로 꼬불치고 휘감는 맛이 영락없더라는 것이었다.

윤상원은 주택은행에 근무하던 중 임진택의 <소리내력> 녹음테이프를 구해 틈틈이 연습하여 마침내 완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판 판소리 <소리내력>은 전통극 전문가인 임진택이 김지하의 담시들을 현대판 판소리로 부른 것 중의 하나였다.

1978년 12월 31일, 광주YWCA 소심당에서 민족민주세력의 송년잔치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소리내력>의 본 작가 임진택과 대금연주가 김영동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윤상원은 이 무대에 깜짝 출연을 하게 되었다. 김상윤의 결혼식에서 이미 선을 보여 모두를 놀라게 했기 때문에 윤상원 <소리내력> 실력을 알고 있는 동료들이 임진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기회로 윤상원을 무대로 등 떠민 것이다.

윤상원이 빈틈없는 완창을 하자 장내엔 환호성이 일었다. 막상 소리를 듣고난 임진택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후일 임진택은 <소리내력>을 부를 때마다 이 노래를 광주 5·18 윤상원 열사에게 바친다며 윤상원의 노래라고 말한다.

현대판 판소리<소리내력>은 윤상원의 십팔번이자, 좌중을 압도하는 윤상원의 필살기였다. 임진택이 말하기를, 원래 연극반 출신으로 소리 연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렁우렁한 성량에다 맑고 깨끗한 음색으로 자신이 따라가지 못할 소리꾼이라는 것이었다.

전남대 연극반 출신인 박효선은 1978년 12월 24일 광천동성당 크리스마스 행사에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올려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연극은 광천공단에서 일하는 어느 노동자의 서사를 통해 당대의 노동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박효선은 들불야학 3기 강학으로 참여한다.
전남대 연극반 출신인 박효선은 1978년 12월 24일 광천동성당 크리스마스 행사에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올려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연극은 광천공단에서 일하는 어느 노동자의 서사를 통해 당대의 노동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박효선은 들불야학 3기 강학으로 참여한다.

◇들불야학 2기 강학이 되다

양동신협으로 직장을 옮긴 윤상원은 다시 은행원과 같은 직장이기는 하지만 신협이 가진 협동조합의 이념과 양동상인들의 가게를 돌면서 나누는 대화가 정겹고 좋았다. 그리고 점심시간이면 자전거를 타고 녹두서점으로 가서 김상윤과 점심을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틈틈이 신간서적을 탐독하며 밤늦도록 김상윤, 이양현과 토론하며 운동가의 자세를 다듬어갔다. 때로는 어쩌다 밤늦은 시간까지 얘기에 열중하다 통금이라도 넘기는 날이면 막 신혼살림을 시작한 김상윤의 아내 정현애와 김상윤의 사이에 끼어 자기도 부지기수였다. 물론 들불야학의 어려운 재정은 김상윤이 적극 지원해 주었다.

1979년 1월 23일, 드디어 들불야학 3기 입학식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들불야학은 광천공단과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무려 40여 명에 이르는 형제들과 14명의 강학, 그리고 학부모와 아파트 주민들까지 거의 150여 명이 입학식에 참석했다.

윤상원을 비롯하여 배환중, 고희숙, 전용호, 김연중, 배충진, 최영희, 박용안, 김호중, 현수정 등이 모두 강학으로 동참할 수 있었다. 또한 시민아파트 김영철과 박용준이 특별강학이 되었다. 1기 강학인 임낙평과 나상진이 남아14명의 강학진이 짜여진 것이다.이때부터 윤상원은 이태복이 광주에 올 때마다 들불 강학들과 밤새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그리고 윤상원과 이태복은 한 사람 한 사람 조심스럽게 정세를 공유하며 전민노련 동지들을 물색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광천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반’이 독자적으로 활기차게 자신들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장석웅, 이세천 등 전남대 학생운동의 핵심성원들이 중심이 되고, 학내 각 의식 동아리에서 고루 파견되어 나온 실태조사팀은 새해 들어 철야합숙에 돌입했다. 매일 저녁시간 이들과 만나는 윤상원은 이들을 적극 뒷받침해 주었다. 윤상원은 이 실태조사원 가운데에서 박관현을 눈여겨보게 된다.

1979년 2월 말경 ‘광천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반’은 ‘광천공단 노동자 실태조사 보고서’의 초안을 완성하고 해체되었다. /김상집 (사)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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