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순(전 광주교대 광주부설초 교장)

 

최영순 전 광주교대광주부설초 교장

63세 교직에서 퇴임을 하였다. 그동안 날마다 아침이면 출근 준비를 위해 그렇게 바쁘기만 했는데 갑자기 갈 곳이 없어 태평양 한 가운데 둥둥 떠 있는 배 한척의 나를 발견했다. 낯설었다. 교사로서 영원할 것만 같았는데, 퇴직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첫 날 집안 곳곳을 바쁘지 않게 바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이 곳 저 곳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할 때 보이지 않았던 책상 밑, 거실 탁자, 쇼파 위에 쌓여 있는 먼지를 보며 이 먼지들을 그동안은 누가 모두 닦았을까? 주말이면 한 번씩 청소기를 돌렸던 것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옛 생각에 잠겨 청소를 하다가 냉장고 문이 닿아 열리면서 빽빽하게 쌓인 냉동실의 음식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게 뭐야! 이럴 수가! 20년 된 냉장고가 나의 퇴직을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문이 열리면서 막 쏟아져 내렸다. 그 전에도 냉장고 문이 열려 냉동 음식이 녹아 몇 번 부품을 교체하고 다시 사용하고 있었는데, 41년 외출하고 돌아온 주인의 퇴직을 제일 먼저 알아보는 것 같았다.

인근 전자상가에 가서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를 샀다. 41년을 밖에서 허우적대다가 집으로 돌아 온 첫 날에 20년 된 냉장고가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세월을 실감나게 해 주었다.

사흘째 되는 날은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갔다. 이른 시간에 아직 문 열지 않는 미용실도 올 수 있고, 잘 정돈되어 붐비지 않는 미용실은 여유롭고 고풍스럽기까지 했다. 항상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고 머리 자르다 염색 못하고 마무리하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시간이 충분하다고 했더니 미용실 언니도 더 정성스럽게 컷을 해 주었다. 쫓기듯 살면서 하찮게 넘겼던 자잘한 일들이 이렇게 새롭게 다가온다. 분주함 대신 쉼을 주는 공간과 시간이 나의 삶에서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뒤돌아 보면 20살까지는 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그냥 날마다 시간표대로 살았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가진 않았다.

교직에 발령받아 교사로 41년을 살면서 결혼, 육아, 학교일로 쉼 없이 달리기만 했다. 달려도 달려도 항상 바쁘고 부족해 밤새는 날이 많았다. 특히 2년제 교대를 나와서 통신대를 다니다 교대에 3년제 계절제 학사과정이 개설돼 3년을 봄 여름방학 내내 학사 학위 학점을 따느라 힘들었다. 다행히 남편이 같은 교직에 있어 어린 두 아이를 케어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사 학위 졸업 후 계속해서 계절제 대학원에서 석사를 하고, 이후 일반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교사 생활 내내 공부했다. 지금은 교육감이 되신 이정선 교수님을 만난 덕분이었다. 현장은 연구주제의 바다이고, 교사들이 공부하고 연구해야만 학교 현장이 발전할 수 있다며 항상 우리 제자들을 격려하시며 이끌어 주셨다.

혼자서는 어렵다.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고 워크숍, 세미나 등 연구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료 선생님들이 있고, 모임을 단단하게 묶어 줄 지도자가 있어야 지속될 수 있었다.

나는 행운아였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교사 생활 내내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깜깜한 밤바다를 환하게 비쳐주는 등대가 있었고, 용기 있게 함께 바라보며 도전한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공부하는 선생님, 연구하는 교사의 삶 말이다.

그렇게 41년을 교직에서 생활하며 결혼하고,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고, 학교에서는 부장교사, 풍물 사물놀이 특기 적성 활동도 주말도 없이 혼신의 힘으로 지도해 봤다. 초등교사로서 질적 논문 10여 편을 써서 학술지에 발표도 해보고, 공저지만 3권의 책도 출간했다.

대학에서 겸임교수로서 강의도 해보며 교직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하며 하루하루 열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특히 국립학교이고 교생실습학교인 광주부설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8년을 재직하면서 날마다 긴장 속에서 얻는 성취감은 내 생애 통틀어 가장 신나고 보람되었다. 그 여러 일들을 겪는 사이 두 자녀가 모두 결혼해서 손녀딸이 생겼고 이제 다시 가정, 일상으로 돌아와 부부만이 남은 가정이 되었다. 퇴직은 갑자기 낭떠러지에서 뚝 떨어진 존재로 덩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과거를 자꾸 되돌아보면 그립고 아쉽기는 하지만 너무나 치열하게 살았기에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쉽게 들지 않는다.

온갖 풍랑과 폭풍우 등 한세상을 살고 돌아온 63세의 일상을 이제 다시 어떻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직장이라는 큰 틀에서 주어진 일정대로, 요구하는 대로만 사느라 급급했는데, 이제는 모든 목표, 시간, 공간, 일정, 성과, 만나는 사람들을 내가 주도적으로 계획해야 한다는 게 다르다.

이제부터가 또 다른 삶이다. 마지막에 와 인생의 또 다른 삶의 새 출발이 낯설지만, 바다가 파도를 포기하지 않듯 퇴직이어도 아직 삶은 계속되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휘청이지 않고, 단단하게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누군가 속삭인다. 그래 이제는 흐르는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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