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옹관묘 조사 존재 드러내
28차례 조사…2만여점 유물 발굴
옷칠 등 한반도 최초 기록들 쏟아져
삼국시대 독무덤 계보 선사까지 확장

 

마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선사 유적지가 발굴조사 중단과 관리 부실로 방치 상태에 놓여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광주광역시 신창동 유적은 1992년 9월 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5호로 지정됐다.

1963년 옹관묘 조사(53기 발견)로 최초 알려진 뒤 방치 돼 있다가 지난 1992년 국도 1호선 개량공사가 진행되면서 국립광주박물관 긴급 조사가 실시됐다.

이 조사로 당시 생활상을 알수 있는 저수지를 비롯해 토기가마, 도랑 등이 발견됐다. 이후 2020년까지 28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작업이 진행되면 약 2만여점의 유물이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신창동 유적의 특징은 영산강 변에 낮게 솟은 삼각산(해발 98.1m)에서 영산강의 서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끝자락(현재 호남고속도로 통과)에 위치해 있다보니 다양한 작물 재배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벼와 조, 밀, 들깨, 삼 등 다양한 종류의 곡물이 재배 됐는데 벼의 경우 밭과 논에서 기른 흔적이 나왔다. 국내에선 벼를 밭에서 재배한 사례는 최초라는 것이 정설이다. 고대 농경생활이 집대성 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기록은 더 있는데 신창동 유적 일부에선 칠이 묻은 천이나 용기 등이 발굴됐다. 당시 고도의 칠기 제작 기술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에 불을 피우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발화막대 및 발화막대집 등이 출토되면서 학계 관심을 끌었다.

최근엔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마한’ 문화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신창동 유적지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초기철기시대의 생산 및 생활, 무덤이 결합된 대단위로 드러나면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지역 독무덤은 영산강 유역 삼국시대 독무덤 계보가 선사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가치가 크다. 약 2000여년 전 당시 조상들의 생활상은 물론 한반도 역사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어서다.

다만 일부 구역에서의 발굴조사가 여러 이유 등으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제자리걸음 중이란 점은 아쉽다.

나주 등 타 지역의 경우 마한을 소재로 한 다양한 행사추진 및 유적 발굴에 나서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안타까운 실정이다.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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