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리샴과 그의 소설 ‘Racketeer(사기꾼)’
조원경

존 그리샴(1955. 2~ )은 미국의 소설가다. 미시시피 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사우스헤븐 법률사무소에서 10여년간 변호사로 일했다. 1983년에는 미시시피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89년 ‘타임 투 킬’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했고, 두 번째 소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가 1991년 전미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등 인기를 얻어 ‘야망의 함정’으로 영화화됐다. ‘펠리칸 브리프’, ‘의뢰인’, ‘레인메이커’ 같은 그의 작품이 영화로 제작될 만큼 법정 소설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사기꾼’은 5년째 수감생활 중인 전직 변호사 맬컴 배니스터가 연방 판사의 살해사건 수사에 뛰어들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의 전작 대부분이 실화를 토대로 정확성에 기초한 이야기였으나 이 작품은 현실에 바탕을 둔 부분이 거의 없는 완벽한 허구로 차별화했다.

설렘으로 가득 찬 기술이 혁신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강력해졌다. 인터넷 혁명, 메타버스, 챗 GPT, 전기자동차 같은 새로운 것들이 등장할 때마다 세상은 설렘으로 가득 찬다. 주식시장에 관련 기업들이 주도주로 등장하며 버블을 일으키기도 한다.

“계속 성장하는 산업이니 투자하세요. 투자를 했다면 길게 가야 하지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대중은 화끈하게 말하는 전문가란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 돈 벌어준다는 이유로 그렇게 믿으니 할 말은 없다. 세상은 프레임 전쟁이다. 날조된 진실을 독점하려 든다. 진실이 프레임과 맞지 않으면 프레임은 남고 진실은 튕겨 나간다고 했던가. ‘증세=성장 둔화’, ‘민영화=가격 인상’ 같은 프레임은 대중을 잘 현혹한다.

그리샴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말을 하면 광적으로 집착하는 세상을 보며 새 작품을 구상한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미국 사회 역시 극단을 걸은 지 오래다. 정치가들은 인기에 영합하고 대중의 무지를 활용하기에 바쁘다. 약자 코스프레와 백인 중산층을 위한다는 표심잡기는 소설에서도 잘 먹히는 단골 주제다.

얼마 전 그는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소설 속 희대 사기꾼이 부패한 FBI와 연방정부를 물 먹이며 통쾌한 승리를 거둔다는 이야기로 화제에 올랐다. 연방정부에 삶 전체를 도둑맞고 5년째 수감 중인 전직 변호사가 사기꾼으로 변장해 연방판사 살해사건 수사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소설이었다. 선과 악, 인종차별, 권선징악은 그의 단골메뉴다. 주인 없는 검은 돈이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는 구조는 재미와 매력을 선사했다. 그리샴은 소설에서 우리가 처한 법의 나약한 현실을 이렇게 묘사했다.

“재판은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실로 우스꽝스러운 한바탕 쇼에 불과하다. 나는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어쩌면 재판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제기하고 진실을 찾아내어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던 시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재판은 어느 쪽이 이기고 어느 쪽이 질 것인가를 가려내기 위한 경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방이 규정을 악용하거나 기만행위를 시도할 게 뻔하다고 생각하기에 어느 쪽도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진실은 혼돈 속에 묻혀버렸다.”

그는 현실이 점점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사기의 세계로 옮아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현실의 사기꾼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포착하고 경제 전문가란 계층의 사기를 파헤치는 새로운 법정 스릴러를 쓰기로 했다. 대중을 호도하는 사기꾼이 승승장구하던 시대는 인류 역사 속에 차고 넘쳤다.

파시스트들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게 아니다. 열광적인 대중의 힘을 바탕으로 합법적으로 집권했다. 시대는 달라졌으나 2023년에서도 그런 상황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경제 법정 드라마라 캐릭터 찾기에 몰입하며 참조 자료를 찾기 위해 유튜브를 틀어 본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 한 사내가 미국 서부 명문대학교인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는 능숙한 달변으로 청중을 이끌어갔다. 강연의 제목은 ‘의사 교육을 위한 수학적 게임 이론의 응용’이었다. 강의를 맡은 이는 마이런 폭스 박사라는 전문가였다. 그는 유머가 넘쳤고 생동감 있는 예시를 들어 수업의 몰입을 높였다. 무엇보다 그의 교육을 받은 숙련된 의사들조차 의학 교육에 게임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며 후한 평가를 했다.

폭스 박사는 어떤 학위를 지닌 전문가였을까? 그의 진짜 정체는 고용된 배우였다. 그는 전문가 분장을 하고 대본을 철저히 암기했다. 서던캘리포니아 의과 대학 교수 존 웨어, 도널드 내프털린, 프랭크 도널리가 일종의 속임수를 기획했다. 이들은 교육자에 대한 평가는 교육 내용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보여주려 했다. 강의 내용 자체는 학습자가 무언가를 배웠다는 느낌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청중은 진지하게 폭스의 수업을 들었고 누구도 그가 가짜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그는 게임이론의 ‘게’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았을까. 그저 적정한 옷차림과 근엄하고 확신에 찬 발성으로 ‘의학 박사’라는 권위를 표현했을 뿐인데 전문가 집단이 완전히 속았으니 말이다. 그는 적절한 위트와 지어낸 용어를 양념처럼 버무려 강의했고, 전문가 집단조차 속았다. 이 연구는 어떤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것일까. 학생들이 수업을 들은 뒤 내용 평가할 때 교육적인 내용의 전달보다는 교사의 인기도나 카리스마에 더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후 이러한 현상은 ‘폭스 효과’라고 불렀다.

그리샴은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와 연상의 여자 운동선수와의 사기이야기를 버무리는 구도를 생각했다. 대중이 재벌에 대한 환타지와 전문가 컨설팅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실감나게 이야기하고자 생각하며 수첩에 떠오르는 여러 소재를 스케치했다.

유튜브에는 주식 방송이 넘쳐난다. 소위 좋은 주식을 찍어준다는 리딩방에서는 본인들이 주식을 먼저 사놓고 가격을 띄우기도 한다.

그리샴은 판사나 검사도 진실과 거리가 먼 결정을 하는 현실이 다른 세계에서도 넘쳐난다는 이야기를 이번 소설에서 들려주고 싶었다. 요즘 들어 경제 전문가라 칭하는 이들을 돈에 굶주린 대중이 너무 신봉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신도 내일 주가가 오를지 내릴지 모른다고 하는데 그들에게 너무 많은 권위를 주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의사들은 어떨까? 그들은 우리 몸에 대해 전부 알고 있으며, 건강을 지키는 화신일까? 기사를 쓰는 기자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글을 썼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리샴은 대중이 전문가의 권위에 취약하다는 점과 가짜 뉴스를 믿고 가산 탕진하는 투자가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인종차별 이야기를 넣기 위해 요즘 들어 자주 먹는 한국 갈비를 떠올리며 뉴욕의 한인 타운으로 간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한 사내가 그를 맞이하며 둘은 담소를 나눈다. 사내의 말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2009년 인터넷을 통해 허위사실 유포죄로 체포한 미네르바 이야기였다. 미네르바가 활동했던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을 중심으로 누군가가 등장한다. 해박한 경제지식과 고급 정보로 무장한 인물이었다. 미네르바의 실체는 30대 전문대졸 무직자로 알려진 ‘박대성’과 동일 인물임이 밝혀지자 오랜 기간 한국 사회에서 논쟁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내가 말했다.

“대중은 생각보다 권위에 영향을 많이 받고 가짜 뉴스에도 쉽게 빠져들지요. 유튜브에는 엉터리 권위자가 돈을 매개로 대중을 세뇌시키고 있어요. 선동은 나치즘과 파시즘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그들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여 프레임을 짜죠. 경제 전문가라는 자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내는 한국의 주식시장을 설명했다. 외국인의 자동판매기가 된 지 오래된 주식시장에서 주가 하락을 일삼는 외국인의 공매도와 그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쟁점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샴은 그에게서 약탈적 외국자본, 진실을 호도하는 경제전문가, 제대로 된 증거를 제시 못 하는 관료들, 선악 대결에 몰두하는 키보드워리어, 표심을 누리는 트럼프와 바이든 같은 정치인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서로 속고 속이는 이야기가 다소 멍청하게 느껴졌다. 사내가 말한다.

“도박에 가까운 위험한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잖아요. 주식 하락에 베팅하며 공매도를 일삼는 이들을 혼내주는 이야기를 써주세요. 왜 게임스탑 숏스퀴즈도 미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면서요. 개인들이 공매세력에 맞서 주가를 엄청나게 올리고 공매도 세력이 망하는 이야기는 당신이 늘 주장하는 선악 대결과 맞지 않나요.”

공매도를 저주하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도 게임스탑 공매도 혼내기 행진에 가세하며 개미투자자의 편이 되었었다. 그의 투자 여부나 투자액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공매도 헤지펀드에 맞서 개미의 반란을 주도한 온라인 주식 대화방 이야기와 ‘권위의 모습으로 가장한 주식계의 사기꾼들’ 이야기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소재로 한 영화 ‘빅 쇼트’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빅 쇼트 주인공은 실제로 게임스톱 공매도를 벌였다가 큰 손실을 보고 자신의 트위터로 개인투자자들을 비난했다. 그리샴은 사내에게 진지한 말을 들려주며 식당을 나선다.

“돈에 선악이 있을까 모르겠어요. 팩트 체크를 습관화할 때 우리가 마주하는 정보의 세계는 거짓과 안녕할 수 있죠. 거짓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만의 온전함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비법을 찾아야죠. 살다 보면 내용보다 겉치레에 현혹되는 경우가 흔하죠. 내용이 훌륭한데도 어려워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죠. 말 잘하는 전문가를 사칭하는 가짜가 자신 있는 어조로 말하면 대중에게 잘 통하지요. 사기꾼의 심장은 그만큼 천천히 뛰고 그사이 대중의 뇌는 빨리 좀먹게 되는 현실이 슬프네요.”

※본 기고는 헤럴드경제와 제휴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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