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릴’로 다문화자녀 교육 새 방향 모색 ‘주목’

2017년부터 고려인 집거지 형성
7천명 거주…단일지역 국내 최대
지자체 주도 사회적자본 구축 ‘눈길’

‘맘카페’ 구성 등 교육문제 큰 관심
고려인지원단체 새로운 공교육 모델
‘이중언어교육’법 제안 시범운영 중
모국어·한국어 동시 사용 학습력 높여
다문화 자녀 증가세 광주도 검토 필요

인천시교육청과 대한고려인협회가 협약을 맺고 고려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시범 운영하는 이중언어 주말학교 모습. /대한고려인협회 제공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 거주 고려인들은 공동체 일원으로 제역할을 하기 위해 지난해 4월 국내 최초로 고려인 마을주민자치회를 출범시켰다./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 제공
최대 최대 규모의 고려인 집거지인 인천 연수 함박마을 모습. 함박로 양쪽 자리한 원룸과 빌라에는 고려인 7천여명이 거주한다. 인천/김명식 기자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은 광주 월곡동 고려인마을, 경기도 안산 땟골마을과 함께 국내 3대 고려인집거지로 꼽힌다. 함박마을에 고려인이 둥지를 틀기 시작한 건 2017년부터 본격화됐다. 2010년 초부터 고려인이 자리를 잡은 월곡동, 땟골마을보다는 뒤늦게 형성됐다.

현재 함박마을이 소재한 연수1동에서 파악한 고려인은 7천명 가량으로 단일지역내에서는 광주고려인마을과 땟골마을을 웃돈다. 문학산 줄기 중턱에 자리한 함박마을은 행정구역으로는 연수구 연수동에 속한다. 과거 함씨와 박씨가 많이 모여살았던 함박촌이라는 옛 지명을 반영한 마을 이름이다.

◇고급주택단지서 고려인마을 변신

함박마을은 원래 ‘연수 4단지’라는 이름으로 고급주택단지로 조성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난개발로 인해 가난한 동네로 변하게 됐다. 보증금이 필요없는 저가의 빌라와 원룸이 들어오게 되면서 외국인들이 몰린 것이다.

함박마을엔 어떻게 고려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었을까. ‘고려인 이주배경과 문화적응 경험 연구회-연구활동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재외동포법이 개정되면서 고려인동포가 ‘한국인’이면서 ‘재외동포’ 자격을 얻게 된다. 이후 2007년 방문취업비자가 시행되면서 ‘코리안드림’을 이루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고려인 동포가 늘어났다.

이때 한국으로 온 많은 고려인들이 산업단지와 가까운 곳에 터를 잡는다. 광주에는 월곡동 고려인마을, 안산에는 다문화특구에 위치한 선부2동 땟골, 인천에는 남동공단이 가까운 함박마을에 고려인 집거지가 형성됐다.

함박마을 아이 돌봄 센터인 ‘함박가치키움터’ 모습./김명식 기자

함박마을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한국의 고려인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 가면 러시아 요리, 러시아 빵 등 이국적인 식료품점과 식당, 다양한 상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러시아어와 한글이 적힌 상점 간판들이 이어져 마치 외국를 방문한 느낌이다.

◇ 원주민-선주민 ‘반반’ 비율

함박마을에 거주하는 전체 거주민은 1만4천명 정도. 이 가운데 고려인이 7천명 가량으로 원주민과 대등한 숫자를 보인다. 원주민과 고국인 한국을 찾은 고려인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다. 하지만 이질적인 문화를 갖고 공존하며 살다보니, 서로간의 갈등이 존재한다. 의사소통의 한계, 문화의 차이 등으로 서로 간의 거리감을 좁히는 게 좀처럼 쉽지 않다.

이에 자치단체인 연수구는 지역사회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마을관리협동조합’을 설치해 원주민과 이주민간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가 하면, 함박마을 내 외국인들이 유발하는 쓰레기 불법투기, 불법주정차, 소음, 치안문제 등 해결에 노력을 기울였다.

‘함박마루’는 공존을 위한 중요한 요소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마을을 이끌어갈 자치기반을 구축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함박마루는 ‘함박마을의 마루’라는 의미로 마을 주민들의 편안한 휴식처이자 원주민과 외국인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개방된 소통 공간을 의미한다.

여기에 연수구는 사회복지관, 도서관, 어린이집으로 구성된 ‘함박마을 문화복지센터’를 세워 지역 특성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운영, 원주민과 외국인 상호간의 문화 이해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처럼 자치단체 노력으로 함박마을은 월곡동과 안산과 달리 짧은 형성 기간임에도 고려인을 위한 사회적 네트워크가 빠른 기간에 구축될 수 있었다. 또 지난해 4월 국내 최초로 ‘함박마을 고려인주민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함박마을 주택가 모습.

◇자녀 교육문제에 남다른 열정

함박마을이 국내 다른 고려인집거지와 가장 큰 차별성은 교육분야다. 고려인을 포함한 이주민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이들 교육과 양육이라는 점에 착안해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다. 함박마을 최대 자치단체인 ‘고려인 엄마들 모임’이 결성돼 활동중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일종의 맘카페로 300여명의 고려인 엄마들이 참여중인 단체다.

아이 돌봄 센터인 ‘함박가치키움터’도 엄마들 모임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다. 어린 자녀를 둔 고려인들의 자녀 양육 고충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7월 13일 개소했다. 인천지역 고려인 지원 시민단체인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이 위탁운영중인 이곳에선 만 2~4세 고려인 동포 아동들이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보육교사의 돌봄을 받으며 한국어와 한국 문화 등을 배운다.

‘클릴(CIIL) 교육’은 함박마을의 고려인 자녀 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클릴교육은 언어장벽이 높은 이주민을 위한‘이중언어교육법’이다. 이주민 문제로 홍역을 치른 유럽연합이 2002년 3월 바르셀로나 유럽정상회담에서 다국어 사용을 위한 새로운 전략으로 공식 채택했다.

클릴 교육의 핵심은 4~5년간에 걸쳐 레벨을 나눠 고려인의 경우 모국어(러시아)와 표적어(한국어)를 동시에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교과 과정에서 학교 과목을 충분히 학습하는 동시에 언어 능력을 훈련하고 향상시킨다.

함박마을에는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상점과 식당 등이 함박로 양편에서 쉽게 볼 수 있다./김명식 기자

◇‘클릴 교육’ 주말학교 운영

이 교육법은 국내 거주 고려인의 어두운 교육 현실을 감안해 함박마을에서 최초로 제시됐다. 한국어는 이주민과 내국인 학생의 ‘출발선 평등’을 위한 필수 도구다. 하지만 이주민 자녀는 부모가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 생활에서 학습이 이어지지 못해 언어습득이 늦다. 이는 언어 장애로 이어져 학습 결손과 교우 관계 문제를 낳아 학교 부적응과 함께 학업 중도포기로 이어지는 요인이 된다. 진로·진학 지도도 어려움이 수반된다.

광주를 비롯 국내 대부분 학교에선 한국어를 모르는 다문화 자녀들은 내국인 자녀들과 통합수업을 한다. 방과후에는 별도로 한국어를 배운다. 통합수업과 한국어교육에 이중언어강사가 지원되지만 교사와 학생간의 의사 소통을 도와주는 역할에 그친다. 교과수업시간에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으니 학업성취가 더딜 수밖에 없다는 게 광주지역 한 다문화학생 담당 교사의 설명이다. 지금의 다문화 학생 지원체계로는 학업성취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함박마을이 클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은 지난 2월 인천시교육청(마을교육지원단),대한고려인협회, 선학중학교, 연수구청 평생교육과와 이중언어교육을 위한 주말학교 운영 협약(MOU)을 체결했다. 이 협약으로 대한고려인협회는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이중언어 주말학교를 3월부터 함박마을 교육문화공간 마을엔에서 시범 운영중이다.

인천시교육청과 대한고려인협회,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 등의 이중언어 주말학교 협약식 모습,

이 영향으로 인천광역시(미래교육위원회)는 이달 6일 ‘클릴(CLIL) 한일 세미나’를 인천시 연수구 ‘교육문화공간 마을엔’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대한고려인협회와 인천시미래교육위원회가 주관하는 세미나에는 일본을 비롯 주요 국가의 이중언어 교육 방법을 분석하고, 이주 청소년의 우리 사회 안착 방안 등을 논의해 주목받았다.

인천시가 이 세미나를 개최한 건 증가추세의 다문화 학생의 새로운 교육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인천지역 다문화 학생은 초·중·고교를 모두 합쳐 2018년 6천907명에서 2019년 7천914명, 2020년 8천852명으로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증가율 순위는 전국 17개 시도 중 1위다.

다문화 학생 증가는 국내 전체적인 상황이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다문화학생은 2021년 16만56명으로 전체 학생의 3%를 차지했다. 초등학교 11만1천371명, 중학교 3만3천905명, 고등학교 1만4천307명 순이었다. 2016년의 9만9천186명(1.7%)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었다. 국내 학생이 매년 10~20만명씩 줄어들 때 이주배경 학생은 1만명씩 늘어난 셈이다.

◇이주학생 증가 공교육 변신 필요

올해 4월 1일 기준, 광주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다문화 학생은 4천372명이다. 전체 학생(16만9천여명)의 2.6%로 전국 평균에 못미친다. 하지만 광주고려인마을 인근에 있는 하남중앙초는 전체 학생(295명)의 46%인 136명이 다문화 학생이다. 두 명 중 한 명꼴로 다문화 학생으로, 이들 대부분이 고려인 자녀다. 주변의 대반초·월곡초·영천초·하남중·월곡중·영천중도 점유율만 다를 뿐 비슷한 실정이다. 광주 교육계도 이미 다문화 사회의 한복판에 들어온 만큼 공교육 시스템 내에서 보다 효과적인 교육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손정진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 대표는 “언어의 장벽이 있는 이주민과 다문화 아이들에게는 (언어)교육이 곧 기본 인권이다.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최소 4~5년의 기간이 필요한데 공교육에 클릴을 도입해 이주 아이들의 언어 학습을 지원해야 하는 걸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함박마을을 시범운영하고자 인천시교육청과 인천시에 제안했다”면서 “저출산에 빠진 우리나라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선 이주민들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자녀들도 많아 질 것이다. 현재의 다문화 자녀 교육지원 시스템을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인천/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