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오니 역사·문화도 오다…높아지는 광주의 품격
광산구에 국내 첫 홍범도 흉상 건립
독립운동정신 계승 및 새 희망 담겨
고려인 항일 역사·삶 등 기록 자산
광주가 국내 유일하게 간직해 가능

합창단·오케스트라 등 문화예술 다양
전쟁이후 귀환 고려인 어린이도 합류
민간차원 활동 국가간 우호협력 가교도
“다양성 시대 공존·공생 선도적 사례”

광주 광산구 월곡동 다모아어린공원에 세워진 홍범도 장군 흉상./광산구 제공

광복절 제77주년 기념일인 지난 15일 오후 5시 광주 광산구 월곡동 다모아어린이공원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항일독립운동가인 홍범도 장군 흉상 제막식이다. 홍 장군 유해 봉환 1주년을 맞아 진행된 제막식에는 강기정 광주시장과 이용빈·민형배 국회의원, 박병규 광산구청장, 신조야 (사)고려인마을 대표를 비롯해 시민과 고려인 후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홍 장군 흉상이 국내(실외)에 세워진 건 광주가 처음이다.

그는 광주와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 광주와 홍 장군은 흉상 제작이 추진되기전만해도 특별한 접점이 없었다. 시민들에게 홍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장으로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고려인 항일운동 광주로
평양 출생인 홍 장군은 1895년 을미의병, 1907년 정미의병에 참여한 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1911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해 무장독립투쟁을 펼쳤다. 대한북로군 소속으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카자흐스탄으로 옮겨가 1943년 숨졌다. 정부는 지난해 홍 장군 유해를 봉환해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대전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가 광주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월곡동 고려인마을에 자리한 ‘월곡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이 지난해 8월 ‘홍범도 장군 특별전’을 연 게 계기가 됐다. 홍 장군 유해 봉환을 기념해 열린 특별전에는 김병학 관장이 카자흐스탄 체류시절 수집한 홍 장군과 관련된 사진 원본과 자료 15점, 사진 사본 10여점이 전시됐다. 사진 중에는 홍 장군이 1929년 러시아 연해주 한까호수 인근에서 가족과 촬영한 기념사진도 포함됐다.

또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홍 장군 묘지를 참배하는 고려신문 ‘레닌기치’ 직원들, 1942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홍범도 장군’의 출연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 오른 희극 ‘홍범도’를 쓴 극작가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의 회고문과 홍범도 장군의 이야기를 담은 육필 원고도 함께 전시됐다.

특히 “할아버지 유해를 오직 대한민국으로만 봉환해 주십시오. 대한민국 외에는 다른 어느 나라로 봉환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라고 쓴 홍 장군의 손녀 홍예까테리나(1925~?)가 1994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중앙묘역 부장과 홍범도재단에 보낸 청원서도 선보였다.

고려인의 역사와 삶, 이야기 등이 기록된 유물 2만여점을 소장·전시하고 있는 ‘월곡고려인문화관 결’ 외부 모습. 국내 첫 고려인 전시관으로 고려인들의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투쟁, 강제이주 시련 극복하고 정착하는 과정, 한글과 민족문화를 잊지 않고 지켜내려 한 고려인들의 의지와 노력이 담긴 유물은 광주만이 갖고 있는 문화자산이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고려인 품은 광주 역사 넓어져
특별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광주를 비롯 국내 주요인사와 단체 관람객 방문이 이어졌다. 국내외 언론도 큰 관심을 가졌다. 이에 월곡동 선주민들과 고려인마을 주민들은 홍범도공원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홍 장군 흉상 건립에 나섰다. 고려인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국내외에 널리 선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다. 이 소식을 접한 광주시와 광산구에서 예산지원과 행정지원을 하면서 1년만에 흉상이 세워졌다.

따라서 홍 장군 흉상 건립은 고려인의 역사가 광주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것으로 볼 만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후 광주에 둥지를 튼 고려인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집약하는 상징으로 여기고 있어서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홍범도 장군 흉상에는 조상들의 항일독립운동 정신 계승과 이를 토대로 새로운 꿈과 희망을 키워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고려인의 역사가 광주에서 새롭게 시작됐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려인들의 역사와 삶은 ‘월곡고려인문화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광산구가 지난해 5월 20일 개관해 운영중인 문화관은 국내 첫 고려인 전시관이다. 고려인의 삶과 역사, 이야기를 간직한 유물 자료 2만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투쟁, 강제이주 시련을 극복하고 정착하는 과정, 한글과 민족문화를 잊지 않고 지켜내려 한 고려인들의 의지와 노력이 담긴 유물들로 광주만이 갖고 있는 문화자산이다.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 주목
대부분의 자료는 카자흐스탄에서 1992년부터 25년 동안 한글학교 교사 등으로 활동했던 김병학 관장이 수집했다. 전남대를 졸업한 김병학 관장은 알마티대학교 한국어과 강사, 고려일보 기자, 카자흐스탄한국문화센터 소장 등을 역임하면서 각종 고려인 관련 기록물과 자료를 수집했다. 홍 장군 특별전에 선보인 전시물도 김병학 관장이 발굴, 수집한 것이다.

문화관 개관은 지역사회에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고려인 역사를 세상으로 불러냈다. 광주가 고려인의 역사를 품으면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광주공동체 폭과 깊이를 확장시키게 됐다. 이런 맥락에서 우크라이나 전쟁난민들이 대거 광주에 귀환한 건 의미를 갖는다.

고려인 중앙아시아 이주 스토리텔링극 ‘나는 고려인이다’ 한 장면. (사)고려인마을과 호남대학교 등이 공동제작한 연극으로 2018년 초연 이후 광주와 경남 김해 등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올해 한국-카자흐스탄, 한국-키르기즈스탄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오는 10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에서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고려인마을 제공

“고려인들이 광주에 온 것은 연해주 항일무장 독립투쟁의 역사와 한 맺힌 디아스포라 역사가 온 것이다. 그들의 삶이 함께 왔다. 특히 고려인 아이들의 미래도 함께 왔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인이 오면서 광주의 역사는 깊고 넓어졌다. 광주의 품격도 높아졌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전쟁난민이 된 고려인 동포들이 광주에 대거 둥지를 튼 건 큰 의미를 갖는다. 광주의 미래를 한층 밝게 하고, 광주가 세계인을 품는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인은 우리의 과거이며 현재와 미래다.” 박용수 고려인동행위원장(광주시 민주인권평화국장)의 고려인 정착 및 난민 귀환 의미에 대한 설명이다.

고려인 역사만 광주에 온 게 아니다. 그들의 문화와 예술도 함께 오고 있다.

고려인마을은 어린이합창단과 청소년 오케스트라단을 운영중이다. 고려인 자녀들의 정착과 진로 모색,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 결성된 어린이합창단과 청소년오케스트라단은 고려인 역사와 삶을 예술로 승화시켜 광주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다.

◇민간외교 역할 ‘톡톡’
어린이합창단은 2017년 창단이후 체계적인 성악레슨과 수많은 오디션을 통해 그 실력을 인정받아 광주·전남지역은 물론 전국을 무대로 활동중이다. 현재 단원은 25명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후 광주에 온 고려인 초등학생 6명도 합류했다. 특히 지난 3월 외교부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글과 K-뷰티, 태권도, 한국의 경제 등 9가지 테마 중 세 번째로 고려인마을과 어린이합창단을 선정한 후 동영상으로 제작해 해외에 소개하고 있다.

2018년 국내 최초로 창단한 고려인오케스트라 ‘아리랑’은 광주고려인마을 초·중·고에 재학 중인 고려인 4-5세 자녀 2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아리랑’은 1975년 ‘예술로 사회를 구한다’는 모토로 시작된 베네수엘라 ‘엘시스테마’처럼, 사회적 복지가 필요한 곳에서 문화예술을 통해 문화다양성의 가치를 확산하고 있다.

고려인어린이합창단. 2017년 창단이후 체계적인 성악레슨과 수많은 오디션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아 광주·전남지역은 물론 전국을 무대로 활동중이다. 현재 단원은 25명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후 광주에 온 고려인 초등학생 6명도 합류했다./고려인마을 제공

‘마을극단1937’은 고려인과 월곡동 주민들로 구성된 극단이다. 2017년 고려인광주이주 80주년을 기념해 창단됐다. 단원은 우즈벡 출신 고려인 3세 리조야씨를 비롯한 단원 21명과 최영화(연출가·호남대 교수) 단장을 비롯한 제작진 29명 등 5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극단은 고려인마을과 호남대 공동으로 제작한 고려인 중앙아시아 이주 스토리텔링극 ‘나는 고려인이다’를 2018년부터 무대에 올리고 있다. 2020년과 2021년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아시아주간에 연속 초청된 바 있다. 경남 김해 공연, 광주지역 크고 작은 행사에 초청돼 감동을 선사했다.

고려인 문화예술 활동은 국가간 교류에도 큰 역할로 이어지고 있다. 고려인마을은 아시아문화전당, 호남대 등과 협력해 ‘나는 고려인이다’를 오는 10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서 공연을 할 계획이다. 대한민국과 두 국가간 수교 30주년을 기념한 공연이다. 고려인마을의 민간차원 문화예술 활동 및 협력 사업들이 국가간 우호협력 가교 역할로 발전한 것이다.

‘나는 고려인이다’ 연출가인 최영화 호남대 교수는 “현대는 다양성의 시대다. 서로 다른 사람과 문화, 역사가 국경을 넘어 함께 공존해야 한다. 광주고려인마을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평화 공존을 해야 하는 가를 잘 보여주는 선도적인 사례다. 공존·공생의 5·18정신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난민들이 광주에 오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난민들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품어주는 광주에서 조상의 역사를 기억하며 미래를 꿈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고 노래했다. 정 시인의 표현처럼 고려인이 오면서 그들의 역사와 삶, 꿈과 미래도 함께 오고 있는 광주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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