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로 본 생명의 복원 현장

장마는 어디로 갔을까. 매년 이맘때면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소리 대신, 밤새 달궈진 아스팔트가 내뿜는 열기만이 새벽을 맞는다.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기상 이변 소식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습지를 찾았다.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를 읽기 위해서다.
 

 

운곡습지는 고창군 아산면 운곡리 낮은 구릉지의 골짜기 밑바닥인 오베이골 일대에 형성된 습지다. 오베이골은 오방골의 전라도 사투리로, 오방은 다섯 방위를 뜻한다. 사실재, 행정재(송암), 직업재(매산), 굴치재(용계), 백운재(운곡) 등 다섯 갈래 길로 나뉘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운곡습지의 새벽은 유난히 고요하다. 짙은 물안개 사이로 들려오던 새들의 울음은, 마치 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어떤 풍경을 다시 불러내는 듯하다. 이곳엔 사람들이 잊어버린 계절과 땅의 호흡이 그대로 살아 있다.

 

#사라진 사람들, 되돌아온 생명들

운곡습지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골짜기에 자리한 이곳은 과거 계단식 농경지로 쓰였지만, 1981년 영광원자력발전소의 냉각수 공급을 위한 저수지 건설로 주민들이 이주한 후 30년 넘게 폐경지로 남아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사라진 뒤 자연은 다시 천천히 자신을 회복했다. 사라졌던 생명이 돌아오고 있다는 건, 이 땅이 우리에게 아직 희망을 말하고 있다는 신호다. 2011년 습지보호지역과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고, 2013년에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것도 이런 자연의 회복력을 인정받은 결과이다.

파인더 속 운곡습지에는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3종(수달, 삵, 말똥가리)과 국가유산청 천연기념물 2종(붉은배새매, 황조롱이), 산림청 지정 보호식물 1종(낙지다리) 등 6종의 보호 동·식물이 살고 있다. 이들을 포함해 식물 451종, 육상곤충 268종, 조류 56종, 포유류 13종, 양서‥파충류 12종 등 800종의 야생 동식물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다.

물웅덩이 그림자 아래, 숨겨진 생명이 피어나는 곳이야말로 진짜 숲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공간이다.

 

#기후변화 시대의 소중한 보물

운곡습지의 가치는 기후변화의 시대에 더욱 빛난다. 습지는 자연적인 정수기 역할을 하며 오염물질을 걸러내고, 토양과 식생이 탄소를 저장해 기후변화 대응 기능도 수행한다. 수량이 풍부하고 오염원이 없어 주변 환경과 물이 깨끗한 이곳은, 그 자체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운곡습지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주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기반으로 사회적기업을 중심으로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 시민, 전문가들이 탐방을 통해 생태적 감수성을 키우는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들이 촬영한 사진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게 하는 것’이 된다면, 운곡습지는 단순한 촬영지가 아니라 하나의 서사적 공간이 된다.

#셔터 너머의 메시지

‘사라지는 것들’과 ‘되돌아오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묻는 시선이다. 장마 없는 여름, 계속되는 열대야 속에서도 운곡습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 복원의 시간은 한 장의 사진으로는 담기 어려운, 수천 번의 셔터와 기다림이 필요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긴 기다림 끝에, 우리는 자연이 들려주는 가장 소중한 메시지를 듣게 될 것이다.

"마을 주변이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덮고 있어서 운곡이라 하였다"는 옛 이야기처럼, 오늘도 운곡습지는 안개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운곡습지 찾아가기

고창 고인돌공원에서 출발하여 고창 고인돌 유적지를 지나 매산재를 넘어 운곡습지를 갈 수 있다. 습지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설치한 탐방로, 숲속으로 난 좁은 길을 걸으며 숲속을 자세히 살피면 아직 남아 있는 시멘트 벽돌담이 보인다. 오베이골 생태연못에는 어리연꽃, 수련, 노랑꽃창포 등 갖가지 식물들이 자란다.

김덕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