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19일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함에 따라 이미 '링'에 오른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함께 대권경쟁이 3각 구도로 형성됐다.

아직 문 후보와 안 원장의 단일화 여부가 변수로 남아 있지만 현재까지의 상황만 놓고 볼때 집권당과 제1야당의 정치적 대결에 무당파 세력이 가세한 형국이 만들어졌다.

박 후보와 문 후보의 대결은 '박정희 대 노무현'이란 전직 대통령간의 대리전으로도 상징화할 수 있다. 여기에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전혀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안 원장이 떠올라 '대선 삼국지'를 써내려가게 된 것이다.

盧의 처음과 끝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문 후보에 대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평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만큼 문 후보는 노 전 대통령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평생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로 남았다. 문 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 법무법인 부산에서 함께 하면서부터다.

이후 문 후보는 30년간 '노무현의 그림자'로 불릴 만큼 최측근으로 활동해 왔다.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부터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내며 '대통령 노무현'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부산시장 출마 권유도 물리쳤던 그이지만 현 정권의 실정을 비판하며 "후퇴한 역사를 제 자리로 갖다놓겠다"고 정치참여를 선언한다.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된 그는 "참여정부는 공과가 있지만 많은 업적이 있었다"며 스스로 '친노'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 후보는 이번 민주당 경선에서도 참여정부의 계승자라는 이미지로 친노 세력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13연승의 압도적 우세를 이어왔다. 이미 민주당 지지층에게는 '문재인=노무현'이란 공식이 성립된 듯 하다.

문 후보의 가장 큰 장점을 꼽자면 정치인 답지 않은 모습이다. 그는 원칙과 소신을 분명히 하면서도 상대방과의 소통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려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그에게는 반듯한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는 또 지난 2003년 이후 형성된 15% 내외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치를 지향하는 세력의 지지를 안고 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모로 끝까지 옆을 지킨 의리와 국정운영의 경험도 그의 강점으로 꼽힌다.

퍼스트레이디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딸로서 당연한 얘기겠지만 박 후보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정치입문 후 '선거의 여왕'이란 지금의 별명을 얻기까지 아버지의 후광이 작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뿌리는 퍼스트레이디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74년 육영수 여사의 피살 이후 박 후보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을 살며 부친 곁에서 국정 운영의 묘를 터득했다.

청와대 직원들의 보고를 기록하면서 생긴 메모 습관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수첩공주'라는 별명을 얻는 단초가 된 것이다. 이후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는 '독재자의 딸'로 몰려 사실상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이 당시에 권력의 최정상에 있을 때 가깝다고 믿었던 측근들이 한 순간에 등을 돌리는 경험을 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약속'과 '신뢰'를 강조하는 이유다.

박 후보는 한나라당이 세종시 수정안을 통과시키려 할 때 "국가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세종시 원안이다. 대한민국 전체 균형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며 원칙론을 앞세워 세종시 원안 지지발언을 한 것은 이같은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다.

박 후보는 정부와 청와대의 전면적 압박 속에서도 원안을 끝까지 고수했고 이 때부터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박 후보는 지난해 12월 선관위 디도스 공격,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등 각종 악재로 시달리던 당을 구하기 위해 다시금 정치 전면에 등장해 당명까지 바꾸는 파격을 통해 지난 4·11총선을 사실상 승리로 이끌어 다시한번 선거의 여왕임을 입증했다.

강연정치로 불어닥친 '安風'

안 원장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권과 접점을 갖고 있던 후보들과 달리 철저히 정치권 밖의 인물이었다. 의사출신으로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10여년간 안철수연구소에서 사업가로 활동하다가 카이스트와 서울대에서 대학교수를 지냈다.

안 원장이 정당정치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측근인 '시골의사' 박경철씨와 함께 연단에서 입을 맞춘 경험을 바탕으로 토크 콘서트 형식의 '강연정치'를 이어간 2011년부터다.

당시 '서울시장 출마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안 원장은 돌연 박원순 후보와의 단일화에 합의했다. 안 원장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박근혜 대세론'을 뒤엎고 박 시장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안풍'이 일시적인 바람이 아님을 증명했다.

안 원장은 박 후보에게 보낸 지지 편지에서 1960년대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시발점이 된 로자 파크스를 거론, 변화를 향한 의지를 밝히며 기성 정치권의 각성과 변화를 불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세인트 찰스'라는 별명으로 요약되는 그의 도덕적 이미지는 국민들의 신뢰를 모으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세인트 찰스는 '성(聖) 안철수'라는 의미로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이나 각종 예능프로그램에서 성인군자 같은 언행을 보였다고 해서 붙여졌다.

또 자신의 안철수연구소 소유지분 절반을 기부하고 공익재단인 안철수재단을 설립해 많은 이들로부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는 등 사회적 기여라는 이슈를 선점한 것도 그의 강점이다.

다만 최근 최태원 회장 구명운동부터 룸살롱 출입 의혹에 이르기까지 각종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부담이다. 여야 모두 본격적인 검증에 돌입할 태세여서 안 후보가 이같은 공세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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