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 백탑
BC 3세기부터 AD 17세기까지 정권 흥망성쇠의 현장

1940년대 전쟁속 훼손…현재 시내 중심으로 변해 흔적 없어
국가급 문화보호재 요양백탑 등 문화재 눈길·각종 자원 풍부

고구려의 요동성 위치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오늘의 요양은 23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요동성을 함락한 후 여기에다 요주(遼州)를 설치했다가 이듬해 폐지하고 그곳을 새로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속하도록 했다. 그리고 의봉원년(儀鳳元年, 기원 676년)에 안동도호부 치소(置所)를 요동성으로 옮겨왔다.

기원 918년(요신책<遼神冊>3년)에 요나라 태조가 요동성을 점령하고 여기에다 요양부(遼陽府)를 설치해 두고 이듬해에는 이 성을 보수해 동평군(東平郡)으로 고쳤다. 기원 928년(천현<天顯>3년), 동평군은 남경으로 승격되고 요회동원년(遼會同元年) 11월에는 또 남경을 요나라 제2수도인 동경(요양부)으로 개칭했다.

기원 1116년, 새로 일어난 여진족이 건립한 금나라는 요나라의 동경도 요양부를 함락하고 요나라 때처럼 요양을 동경, 제2수도로 삼았다. 그 후 이 동경도 요양부를 동경로 요양부로 고치고 로(路)와 부(府)의 치소를 다 요양성에 두었다. 원나라가 건립된 후 기원 1287년에 요양 등 몇 곳에 행상서성(行尙書省)을 설치했다.

이 행성(行省)은 7로(路) 1부(府)를 직할(直轄)하는데 성과 로의 치소를 모두 요양성에 두었다. 요동에서 주와 현을 폐지하고 군위제(軍衛制)를 실시한 명나라는 기원 1384년(홍무 17년)에 요중위(遼中衛)와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치소를 요양에다 설치했다.

요동도사(遼東都司)는 아래에 25개 위(衛), 2개 주(州)를 관리하는데 그 관할구역은 현재 요녕성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한다. 후금천명(後金天命) 6년(기원 1621년), 요양은 후금에 의해 함락됐다. 그 당시 누루하치는 요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나서 태자하 동북쪽에 신성, 즉 동경성(東京城)을 건설하게 했다. 그리고 3년 후에 도읍지를 심양으로 옮겨갔다.

요양 옛 성은 왕조의 교체와 성을 차지한 정권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따라 그 규모, 형태, 시설과 상황도 변해왔다. 역사 자료에 의하면 원나라 옛 성을 토대로 중수한 요양성은 둘레가 24리, 남성과 북성이 日자 모양으로 이어졌다 한다.
 
그중 남성은 남북 길이가1천800m, 동서 너비가 2천250m, 둘레는 8㎞다. 돌과 벽돌로 혼축한 성벽의 양쪽 벽면은 벽돌로 쌓았고, 두 벽면 사이에는 돌을 넣고 흙으로 다져 놓았는데 성벽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사다리 모양으로 밑 두께가 8.3m고 높이는 10m다.

성벽 네 모퉁이에는 모두 각루(角樓)가 있다. 동남쪽의 것은 ‘주변’(籌邊), 동북쪽의 것은 ‘진원’(鎭遠), 서북쪽의 것은 ‘평호’(平胡), 서남쪽의 것은 ‘망경루(望京樓)’라 부른다. 성문은 6개 설치했다.

남쪽의 것은 안정(安定)과 태화(泰和), 동쪽의 것은 평이(平夷)와 광순(廣順), 서쪽의 것은 숙청(肅淸), 북쪽의 것은 진원(鎭遠)이라 일컫는다. 그중 동벽 북쪽에 있는 광순문은 조선에서 온 사신들이 요양성을 거쳐 북경으로 갈 때 필히 거쳐야 하는 문이어서 현지에서는 청나라 때(보안문<普安門>이라 고쳤다)까지 고려문이라 불렀다.

그리고 성문 앞에는 옹성이 있고 성 바깥에 성지(城池)가 있으며 성 한복판에 동서로 종루(鐘樓), 고루(鼓樓)와 화표(華表)가 나란히 서 있다. 요동도사와 총병부 관공서가 모두 남성 안에 설치되어 있다. 이 성곽은 명나라 홍무 5년(기원 1372년) 명나라군이 요양을 함락한 후 7년을 거쳐 중수한 것인데 도지휘(都指揮) 마운(馬云)과 엽정(葉旺)이 공사시행을 감독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성은 명나라 만력 말기에 무너졌다. 그 후 청나라는 요양성을 여러 번 중수했는데 그 규모는 좀 작아졌다. 따라서 6개 성문도 모두 개칭됐다. 그리고 건륭(乾隆) 42년(서기 1777년)에 성벽 동남쪽 모퉁이의 각루를 손보아 높이 40m의 2층인 괴성루(魁星樓)로 만들었다. 그 당시 괴성루에 올라서 사방을 살펴보면 성안의 전경, 주변의 산과 물, 들녘과 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도광(道光) 26년(기원 1864년)과 동치(同治) 말기에 중수한 이 누각은 1900년에 러시아 군대에 의해 파손됐고 1924년에 다시 중수되었다가 1940년대 전쟁의 불길 속에서 요양성과 함께 훼손됐다. 훼손된 요양 옛 성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차 사라져버리고 성 터도 지금 시내의 번창한 중심구역으로 변해 그 흔적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17세기까지 줄곧 동북지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던 요양은 현재 요녕성 14개 대도시 중 하나이다. 총 면적은 4천741㎢, 인구는 181만여명이며, 백탑(白塔), 문성(文聖), 굉위(宏偉), 궁장령(弓長嶺), 태자하(太子河) 5개 구와 요양현(遼陽縣), 현급시인 등탑시(燈塔市)가 관할 행정구역으로 소속되어 있다.

요양은 자연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이미 파악된 지하자원이 30여 가지인데 철, 석탄, 금, 동, 석유, 석고(石膏), 점토(粘土)의 매장량은 물론 천연가스 저장량도 많다. 석고의 매장량은 동북 전 지역에서 으뜸이며, 백운모의 매장량은 요녕성에서 1위를, 철광의 매장량은 전 성에서 2위를, 석회석 매장량은 요령성에서 3위를 차지한다.

요양경내에 태자하, 혼하 등 29갈래 강이 있고 삼와(參窩)와 탕하(湯河) 등 저수지가 있어 물자원이 풍부하다. 생태환경도 좋다. 동부산간지역에는 사과, 아가위와 한약재가 많이 나고 땅이 기름지며 관개수가 충족한 서부평원에는 벼, 수수, 옥수수, 콩 등 농작물이 많이 난다.

요양현과 등탑시는 전국의 농산물생산기지이자 민물고기 양식 중점구역으로 됐다. 요양시의 공업부류는 석유화학섬유, 방직, 야금, 화학, 기계, 전자, 건축자재, 에너지, 의약과 식품가공 등 여러 가지가 두루 갖추어져 있다. 그 중 화학섬유공업은 국가 중점기지의 하나이다. 그 핵심기업은 요양석유 화학섬유공업회사로서 중국에서 수입한 장치를 위주로 하고 현대화한 기술, 장비와 관리수준을 가진 특대형 석유화학섬유연합기업인데 전국에서 유명하다.

요양의 오래된 역사와 고대문명은 이곳에 적지 않은 문화재와 인문경관을 가져다줬다. 국가급 문화보호재로 지정된 요양백탑은 전국 6대 고탑 가운데 하나로 요양시 중화대가 북측에 위치하고 있다. 탑은 높이가 71m, 팔각 13층으로 된 동북지역에서 가장 높은 전탑이다.
 
이 탑은 아래서부터 위로 탑기(塔基), 탑좌(塔座), 탑신(塔身), 탑첨(塔첨), 탑정(塔頂), 탑찰(塔刹)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탑기의 높이는 6.4m, 둘레는 80m, 직경은 35.5m로 2층으로 나누어진다. 아래층 높이는 3m, 매개 변의 길이는 22m, 위층 높이는 3.4m, 매개 변의 길이는 16.6m다. 탑좌는 높이가 8.6m고 둘레 벽에 연꽃과 두공(斗拱) 등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탑좌 위에 받쳐있는 탑신은 높이가 12.6m, 8각형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기둥의 8개 측면에 면마다 높이가 9.38m, 너비가 7.5m인 벽돌로 조각하여 만든 불단(佛龕)이 있다. 불단 안에 좌불(坐佛)상의 높이는 2.55m고 그 양옆에는 시중하고 있는 높이가 3.25m, 너비 0.97m 되는 협시(脇侍)상이 하나씩 있는데 연꽃을 밟고 바리대를 받들고 있다.

그리고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씌웠고 영락(瓔珞)을 드리웠는데 그 좌우 양켠의 위쪽 두 모서리에는 바람을 안고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비천(飛天)이 한 쌍 조각되어 있다. 탑신 위에는 밀봉(密封)된 8각 탑첨인데 13층으로 그 높이가 26.1m다.

탑첨의 처마와 처마 사이에는 벽을 쌓아놓았고 벽에는 거울을 96개 걸어놓았다. 열세 번째 탑첨(처마와 기와) 위에는 높이가 6.8m인 탑정(꼭대기)인데 찰간(刹杆)을 세운 탑찰이 그 위에 설치됐다. 그 찰간의 높이는 9.9m고 직경은 0.9m이며 끄트머리는 동으로 만든 자그마한 탑이다. 이 백탑은 요나라 때 세웠다는 학자도 있고, 금나라 때 세웠다는 학자도 있으나 800년이 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요양의 명물이 된 이 탑은 수많은 관광객을 끌고 있다.

백탑 옆 같은 공원 안에 도교사찰 광우사(廣佑寺)가 있다. 이 사찰은 동한(東漢) 때 축조된 것으로,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온 후 가장 일찍 생긴 사찰의 하나로 대청안선사(大淸安禪寺)로 이름을 지었다가 원나라 때 현재 이름으로 고쳤다.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시기에 여러 번 중수한 이 사찰은 한창 흥성할 때 부지만 9만㎡에 절간은 무려 200개나 되었는데, 지금까지 동북지역에서 제일 큰 불교 도량으로 유명하다. 광우사 정전에는 세계에서 전(殿) 내에 있는 목질 석가모니부처상 가운데 불신이 최고로 높고 체적이 최고로 크다 하는 부처상이 모셔져 있고, 높이가 6.2m 되는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상을 모셔놓은 광우사 편전 원통사원(圓通禪院)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해 두어 1년 내내 참배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백탑공원 동쪽으로 시가지를 지나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태자하 강변에 강둑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몇 해 전 친환경도시건설 중에서 공지를 아름답게 하여 시민들이 노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보통공원이어서 볼거리는 별로 없지만 이곳을 거쳐 흐르는 태자하가 중대한 역사사건 형가자진황(荊軻刺秦皇)의 주모자 연나라 태자단(太子丹)과 관계되어 인기가 있다.

기원전 227년, 연태자단(燕太子丹)은 자객 형가를 진나라 도읍 함양에 보내 진시황을 자사(刺死·암살)하도록 했다. 그런데 뜻밖에 ‘도궁비수견’(圖窮匕首見·그림을 다 펴자 비수가 나타난다는 뜻, 후에 이 말이 관용어로 됨)해 형가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자객을 만나게 된 진시황은 크게 노해 대장(大將) 왕전을 파견, 연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역수(易水)에서 크게 패한 연왕은 태자 단과 함께 요동으로 퇴각하였는데 태자 단은 연수(衍水·태자하의 옛 이름) 부근에 몸을 감추었다. 이때 조나라의 왕 가(嘉)는 연나라 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진나라가 연나라를 침은 다만 태자 단이 자객을 보낸 그 원수를 갚자는 것이므로 단의 수급을 보낸다면 진나라는 철군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나라가 위급한 상태에서 연나라왕은 어쩔 수가 없어 사람을 시켜 연수 가에 몸을 감추고 있는 태자 단의 목을 베고 그 수급을 진시황에게 바쳤다. 그렇지만 연나라는 결국 멸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태자 단이 나라를 위해 죽은 정신을 기리어 연수를 태자하로 불렀다고 한다.

이외에도 한위(漢魏) 시기의 벽화묘군, 고구려 옛 성 백암성, 문묘(文廟), 동경성(東京城), 동경릉(東京陵), 노야묘(老爺廟), 화표산(華表山), 중국 고대 4대 명작의 하나인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기념관(曺雪芹紀念館)이 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녕조선문보기자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