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산세 이용 능선 따라 쌓은 타원형 山城남북 900m·동서 1천400m· 둘레 4천400m 규모장백산맥 여맥 성자산, 산봉우리 30여개로 구성 산성안 철기유물 발굴…산성밖 馬道·토성 유적도 서풍현(西豊縣, 철령시 관할) 양천진(凉泉鎭) 남쪽으로 7.5㎞ 되는 지점에 장백산 여맥(余脈) 횡천산계(橫川山系)에 속하는 성자산(城子山)이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애물단지 늪지대서 관광지로 탈바꿈‘반금쌍대자하구’ 세계에서 가장 큰 갈대소택습지 웅장하고 독특한 절경에 관광객·문인 발길 이어져 북방·요녕성 상품곡물생산기지·입쌀수출기지로 유명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있다.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 크게 변하였다는 뜻이다. 요택도 이런 변화를 하게 되었다.전국(戰國)시기 연(燕)나라가 동
“고구려軍, 수·당 10차례 침공에도 요택서 섬멸”612년 고·수(高·隋)전쟁때 요하서 첫 대결…수양제 대패 658년 연개소문, 당나라 북방군 요택으로 유인 격퇴 “당군 5만명 양대하 장군의 복병에 걸려 무참히 참패”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 이 두 나라는 선후로 10차례나 고구려를 정벌했다. 그 진공 노선이 모두 같지는 않지만 대부분 요택지대(
고구려 정벌 나선 당태종 “요택 늪서 내 명 다하나…”악몽과 같은 10여일 여정…군사 절반 이상 잃고 탄식만 “가을과 여름 모기떼 극성으로 소와 말도 지나갈 수 없어” “인가 드물고 사방 둘러보면 오로지 갈대소리뿐”기록도 요택지역의 교통은 몹시 어려웠다. 당시 이 지역은 여름과 가을, 즉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을 제외하고는 통행이 가
수·당나라 침략으로부터 고구려 서북부 지켜낸 천험(天險)‘아득히 넓은 늪’이란 뜻…수 많은 하천망으로 형성된 요새 계절 따라 크기 변화…당 태종 침공 당시 동서 200리 달해 “땅이 온통 진흙탕이어서 말과 수레 다닐 수 없었다” 기록도 요녕성 한복판을 세로 지르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요하(遼河)강은 옛날 고구려가 차지하던 요동(遼
오녀산성 지킨 고구려 첫 왕성…수도방어체계 구축‘키’ 모양 산성…2006년 성급 문화재보호단위로 승격고구려 제2대 유리왕의 셋째아들 무신왕을 위해 축조 1982년, 단동시 문화고적관리 부문에서 경내의 문화재를 조사할 때 관전(寬甸)만족자치현에 있는 고구려의 소성자산성(小城子山城)을 새로 발견하고 역사유적으로 공식 등록했다. 이 산성
북쪽·동쪽 측면 낭떠러지…남쪽 측면 가파른 산등성이내·외성으로 나뉜 태자성 둘레 1,425m· 면적 13만2천㎡ 생활·방어용 시설 두루 갖춰…기와 등 각종 유물 사라져 태자성은 신빈현 하협하향 쌍하촌(雙河村) 태자성마을 뒷산(북쪽)인 태자하 강기슭에 우뚝 솟아있는 해발 70~80m가 넘는 산등성마루에 자리잡고 있다.이 산성의 북쪽과
유리왕, 양맥족 정복 후 쌓은 고구려 사람들의 보금자리 현지인들 “기름진 땅에다 큰 자연재해 없는 축복의 고장”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연나라 태자 丹 슬픈 전설 전해져 장백산맥과 나란히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 나온 용강산맥(龍崗山脈) 남부지역의 무순시(撫順市)에 속하는 신빈현(新賓縣) 평정산진(平頂山鎭) 홍석립자(紅石砬子)산에
서기 613년 隋 대군이 신성 포위 공격하자 장기전으로 맞서 唐도 645년부터 5차례 쳐들어와…피비린내 나는 ‘대격전지’이적이 667년 인근 16개 성 모두 빼앗고 고구려 668년 멸망 신성은 고구려 서부지역의 교통중추이자 중요한 전략거점이다. 여기서 서쪽으로는 후성(侯城·현재의 심양)이나 금산성(석대자산성)을 지나 요하 서쪽 기슭에 있는 고구
험한 지세 이용 요충지에 자리잡은 고구려 대형 산성고이산 동·서 주봉 사이에 구축…주성·외성 등으로 구성방어구조 탁월…동문 밖 고구려 후기 벽화무덤군 발굴 성 안에선 생활·생산용구·무기·건축자재·동전 등 나오기도 신성이 있는 고이산 남쪽에는 혼하가 약 2㎞ 사이를 둔 채 하곡지대인 충적평원에 자리한 남북이 좁고 동서가 긴 무순시내
“고구려, 한나라 현토성 차지 후 고이산에 새로 쌓아”명승고적·인문경관·삼림휴양지 등 볼거리 풍성 10여개 고구려 성터· 누루하치 조상능묘 ‘영릉’무순지역 불교유적 8각9층 전탑·관음각도 유명 심양 원예(園藝)엑스포 남문에서 심양~신빈(新賓) 간 국도를 따라 고만(高灣)지역을 지나 13㎞ 더 나아가면 수십m 높이의 가파르고 긴 산등성이가 왼편으로 기다란 병
‘붉은 동방’ 단동…고구려 200년간 다스린 아름다운 도시 압록강 풍경명승구 등 유명 자연풍경구만 10여 곳 지하자원 풍부·자동차 산업 발달…농수산업도 번창 압록강다리옆 부두서 유람선으로 북한 신의주 구경 백두산에서 서남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압록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고장에 주옥같이 아름다운 도시가 하나 있다. 그곳
천하를 호령했던 연개소문 영웅담 곳곳에 서려중국 설화 “푸른 얼굴에 청동대도 비껴든 10척 장신” “이세민 휘하 장수 수십명도 한꺼번에 물리쳤다”묘사설인귀도 수백합 겨루다 결국 부상…전설적인 인물로 오골성은 고구려에서 중요한 지리 위치와 그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수나라와 당나라에서도 다른 지역보다 중요시했다. 이에 따라 여기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
난공불락의 거대 요새…고구려軍 10만여명 주둔수 천m 자연 절벽·성벽 둘러싸여…유일한 통로 남문 2천355m 성벽 상태 양호· 봉화대 오르면 산성 한눈에 봉성시에서 심양~단동 국도를 따라 남서쪽으로 약 3㎞ 가면 동쪽에 고성문구(古城門口)란 마을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서 비포장 길을 따라 북쪽으로 좀 더 가면 오골성 남문에
봉황산에 위치…수·당 침략막은 고구려 전략 거점웅장한 산봉우리·험준한 산세·기암괴석 등 명승지 고구려와 수·당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기록한 역사자료에 오골성(烏骨城)이란 산성이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옛날 수나라와 당나라 군대가 요하강을 건너 요동평원을 지나 천산산맥을 넘을 때 압록강과 평양성으로 향하는 전
당나라 백만대군도 두려워했던 전신(戰神) 같은 인물中소설 ‘수당양조지전’ 설인귀 등과 전투 사실적 묘사 적대적 인물 과장하거나 미화했을 가능성 낮아 ‘주목’ 중국에 여·당(麗唐·고구려와 당나라) 전쟁과 관련한 책이 더러 있다. 그중에 당나라군이 요동성을 함락한 뒤 백암성을 공격할 때 벌어진 싸움을 써놓은 것도 있다. 중국소설
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성벽 둘레 2,500m서벽 서남쪽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태자하 흘러 석대 안쪽에 계단 쌓아 성벽 지탱·전투력 극대화 당나라 이후 백암성 이름은 바뀌는데, 요나라 때는 암주(岩州), 금나라 때는 석성현(石城縣)으로 불렀다. 원나라와 명나라는 이 성을 보수(補修)해 수비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언제, 무슨 연유로 이 성을 연
백애성(白崖城)이라고도 부르는 요양(遼陽)지역의 연주성(燕州城)은 고구려의 백암성(白岩城)을 말한다. 백암성은 현재 요양 등탑시(燈塔市) 서대요향(西大窯鄕) 성문구촌(城門口村, 연주성촌이라고도 함) 동산(東山)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산성은 동진(東晉) 원흥(元興) 2년(서기 403년),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차지한 후에 축조된 것이다. 백암성은
BC 3세기부터 AD 17세기까지 정권 흥망성쇠의 현장1940년대 전쟁속 훼손…현재 시내 중심으로 변해 흔적 없어 국가급 문화보호재 요양백탑 등 문화재 눈길·각종 자원 풍부고구려의 요동성 위치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오늘의 요양은 23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요동성을 함락한 후 여기에다 요주(遼州)를 설치했다가 이듬
2·3차 高-隋 전쟁 당시 守城 전술로 수나라 100만 대군 막아 645년 1차 高-唐 전쟁때 당태종 주력군 공격으로 결국 함락옛날 교통과 전략 요충지이자 큰 도시인 요동성은 그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전쟁때마다 큰 공격을 당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그러했다. 그 때 여기서는 세 번이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첫 번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