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동학유적지’ 시리즈 29개월간 대장정 마무리현장 중심 유적지 발굴과 남도동학 연구·정리에 큰 기여갑오동학과 미주 해외독립운동 상관관계 밝혀 학계관심구한말 희귀사진, 심남일 의병장 인영사진 발굴 등 성과 커 지난 2015년 1월부터 남도일보에게 연재되기 시작한 ‘최혁 주필의 남도의 동학유적지’ 기획물이 108회를 마지막으로 끝이 납니다. 남도의 동학유
(完)1년에 걸친 동학농민혁명 수십만명 희생자 남기며 끝나전봉준·손화중·김인배 등 농민군 지도자 체포·처형최초의 반봉건·반외세 운동…항일의병, 3·1운동 계승 광양·경상지역 농민군에게 전세는 점차 불리해졌다. 음력 11월 6일 농민군 지도자 임석준(林石俊)이 토포사 지석영에게 체포돼 곤양군 성북 시장에서 효수됐다.
순천 농민군, 혈전 끝에 하동 장악 후 진주공격1만여 김인배 농민군 하동농민군과 합세해 하동부 공격하동 민포군 대포 쏘며 저항했으나 농민군에 밀려 후퇴농민군 가족 살해 보복하고 민포군 집 500여 채 불 질러 김김개남의 영향 하에 있던 순천의 영호도회소는 1894년 음력 8월 말부터 새로운 활동에 들어갔다. 동학의 포교, 치안
광양·하동·진주 농민군 경상지역 장악하려 분전광양 근거지 삼아 섬진강 일대에서 공방 벌이며 치열한 전투하동부사 이채연, 농민군 광양으로 내쫓고 가족들 몰살시켜 광양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 하동과 인접해있는 지역이어서 경상도로 진출하려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로 사용됐다. 농민군은 하동이나 진주로 진출하거나 후퇴할 때에 항상 광양을 근거지로 삼았다. 광양의 농민군들은 하동, 진주 등의 농민군과 연계해 영호도회소의 주력부대로 활약했다.1894년 6~7월경 광양농민군과 하동의 부사와 토호들이 조직한 민병
화양 곡화목장 노비들 상당수가 동학농민군에 가담목장에 남아있던 노비들은 농민군 토벌군으로 동원되기도기회 엿보던 이주회 일본군 앞잡이 돼 40여명 농민군 참살순천대 홍영기교수·여수지역사회연구소 동학사 정리에 공헌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금의 여수시 화양면 일대 목장(牧場:말을 키우던 곳)에서 일하던 관군과 노비들이 농민군을 진압하는 군사로 동원됐다는 사실은 지난 회에 밝힌 바 있다. 화양면 화동리(華東里) 고인돌에는 조선조 곡화목장 감목관들의 치적을 기리는 글들이 새겨져 있다. 화양고등학교 정문앞에 놓여 있
좌수영 전투 패배 이후 여수농민군 급격히 쇠퇴순천에서 광양으로 도피한 김인배 등 200여명 화형 당하기도피우실·피냇고랑 등 농민군 처참한 죽음과 관련된 지명 생겨화양 수문마을에 ‘농민군 돌무덤’ 있었으나 도로 건설로 없어져 1894년 음력 11월 28일 여수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일본 쓰쿠바 군함의 지휘관들은 전라좌수영에 전투 부대를 파견해 전라좌수사 김철규를 도왔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을 추격해 덕양리에서 농민군을 격퇴했다. 동학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순천으로 철수했다. 영호도회소 농민군은 1
수세몰린 전라좌수영군 일본군 도움 받아 농민군 격퇴농민군과 전라좌수영군, 덕양역과 종고산 일대에서 공방 벌여좌수영 함락위해 농민군 火攻작전…민가 500여 채 불타기도전라좌수사 김철규 요청에 일본군 200명과 일본어부 전투가세 1894년 음력 11월 16일 전열을 정비한 김인배는 낙안 출신 이수희(李守喜)를 중군장으로 삼아 다시 전라좌수영 공격에 나섰다. 쌍봉면 출신 박군하(朴君河), 윤경삼(尹京三)과 돌산읍 출신 황종래(黃鐘來) 등이 전라좌수영 공격을 이끌었다. 하지만 전라좌수영은 농민군에
동학농민군 전라좌수영 수차례 공격했으나 실패김철규 전라좌수사 군대·백성 결속시켜 농민군 강경 탄압김인배 주력부대 경상지역 전투 지원하느라 전력 약해져종고산 점령하고 좌수영 공격하려 했으나 맹추위에 후퇴 여수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순천의 영호도회소와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여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은 갑오혁명 초기에는 동학도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봉호(李鳳鎬)는 동학교인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의 부하 중에서도 상당수가 동학에 입문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봉호는 면직
영호도회소 농민군 군수물자 확보 위해 낙안읍성 공격낙안읍성·보성농민군 징발 피하려 김인배 농민군에 대항양측 농민군 전투로 낙안읍성 민가 150여 채 불에 타기도관군들 동학란 진압 후 순천성에서만 400여 농민군 처형 ■ 낙안읍성 공격과 군수물자 확보김인배가 이끄는 영호도회소와 주력부대가 1895년 음력 9월 1일 경남지역으로
순천 영호도회소 전라좌도 행정·치안 담당하며 통치순천부사 부임 지체로 행정공백…김인배 등 동학지도부 관아 장악광양 등 주변지역 영향력 확대하며 경상도 농민군과 진주성 공격 ■ 영호도회소의 조직순천에 설치된 영호도회소의 조직은 매우 체계적이었다. 영호도회소는 대접주(大接主) 김인배가 통솔했고 그 아래에 수접주(首接主
김개남과 김인배, 순천을 갑오항쟁 남도지휘부로 삼다김인배 영호도회소 설치하고 전라 동부와 경상 서부 총괄낙안군·광양현·좌수영 관할하며 하동·진주까지 진출해 전투김개남 측근 김인배 지역 장악하면서 전봉준 영향력은 쇠퇴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순천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백산봉기 이후 전라병사 이문영(李文榮)은 순
보성 농민군 벽사·장녕·병영·석대들 싸움에 대거 참가보성농민군 1·2차 봉기 적극 참여 남평·능주·장흥농민군과 연합석대들 전투 패배 뒤 100여 명 넘는 보성농민군 참혹히 죽임 당해 보성지역에는 1891년께 장흥의 이방언(李芳彦), 이인환(李仁煥) 등을 통해 동학이 전파됐다. 보성출신 염현두(廉鉉斗)도
이두황 장위영軍, 농민군 잔인하게 처형하고 재물 약탈관리·양반·유생·향리 등 토호세력…민포 조직해 농민군 진압체포 피한 농민군들 살아남기 위해 이름 바꾸고 고향 떠나허탁·임양순·우공정 간신히 살아남아 천도교 교역자로 활동 1894년 음력 11월 중순경 농민군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구례농민군도 민보군과 관군의 토벌에
남원농민군 운봉전투 패배로 구례농민군도 와해남원농민군 북쪽, 구례농민군은 남쪽에서 박봉양 수성군 협공 계획북쪽 농민군 패배로 연파리에 집결해 운봉 향하던 구례농민군 해산운봉전투 후 전라좌도 농민군 기세 꺾이고 수성군 잔인한 토벌 시작 순천대 홍영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농민군은 각 군현을 단위로 진행되는 폐정개혁과 포교 및 군사
세 컸던 구례농민군 김개남 농민군 적극 지원말·총·화약 등 남원성·교룡산성 농민군에게 물자 조달전북농민군 식량으로 쌀 300섬 화엄사에 쌓아두기도구례농민군 백산대회 참가 ‘12조 군율’ 따라 기강 유지 구례현은 지금의 전남 구례읍, 간전면, 광의면, 마산면, 문척면, 용방면 남쪽과 토지면을 포함하는 일대였다. 읍치는 구례읍 봉동
일군(日軍) 진입으로 전세 뒤집어지자 수성군, 농민군 참살(慘殺)12월 초 장위영·日軍 곡성 들어오자 농민군 모두 도주김명국 등 수성군 마을 곳곳 뒤져 농민군 색출해 처형김개남 조카·농민군 70여명 화약폭발 사고로 숨지기도 일찍부터 곡성은 남원에 본영을 둔 김개남의 지시와 영향을 받았다. 김개남은 1894년 음력 6월 25일 남
곡성 백성, 농민군 식량·물자 징발로 고통 극심동학 세 약한 탓에 지역 지킬 수 있는 농민군 절대부족남원·장성지역 농민군 몰려와 쌀·창 등 군수물자 가져가곡성 유생·향리들 수성군 조직한 뒤 타 지역 농민군 방어 담양의 동쪽에 위치한 곡성은 1894년 곡성현과 옥과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1861년 최제우가 머물렀던 남원은 1889
1천여 명 관군·일본군 담양 곳곳 뒤져 농민군 색출 후 처형접주 이장태·한충상 등 수십 명 농민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수성군 약탈과 보복으로 농민군 가족 수백여 명 집 떠나 유랑■ 담양농민군의 피해 현황 1894년 음력 12월 동학농민군은 사실상 와해됐다. 전봉준, 최경선, 손화중 등 지도자는 12월 3일을 전후로 해서 대부분
남응삼 휘하 800여명 담양농민군 남원·운봉전투에서 대활약남응삼 典糧官 직책 맡아 남원성 점령 후 농민군 군수물자 조달운봉전투에서 수성군 박봉양의 매복에 걸려 담양농민군 큰 피해■ 담양농민군의 활동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주화약 이후 담양농민군들 역시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집강소 활동을 했다. 담양 농민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동학농민군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맡은 담양1861년 동학 전파된 남원과 인접해 있어 1881년 동학 전해진 듯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 도와 전라도 농민군 식량과 물자 조달남응삼 등 담양동학지도자 고비마다 주력부대 지원하며 불씨 살려■ 담양 동학농민혁명군의 동향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담양지역은 담양도호부와 창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