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하동·진주 농민군 경상지역 장악하려 분전

<106. 광양의 동학농민혁명>
광양·하동·진주 농민군 경상지역 장악하려 분전
광양 근거지 삼아 섬진강 일대에서 공방 벌이며 치열한 전투
하동부사 이채연, 농민군 광양으로 내쫓고 가족들 몰살시켜
 

광양현지도(光陽縣地圖, 1872년 지방지도)
광양현은 지금의 전남 광양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광양읍 읍내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섬진강이 감싸도는 풍광이 수려한 고을로 땅은 남해에서 끝나고 산은 지리산에 닿아있다./서울대학교 규장각

광양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 하동과 인접해있는 지역이어서 경상도로 진출하려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로 사용됐다. 농민군은 하동이나 진주로 진출하거나 후퇴할 때에 항상 광양을 근거지로 삼았다. 광양의 농민군들은 하동, 진주 등의 농민군과 연계해 영호도회소의 주력부대로 활약했다.

1894년 6~7월경 광양농민군과 하동의 부사와 토호들이 조직한 민병 사이에 섬진강 일대에서 수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조정에 대한 불만이 크게 쌓여있던 광양농민군들은 음력 7월 26일경 수탈을 자행하던 섬진진(蟾津鎭) 병사 몇 명을 붙잡아 곤장을 치고 섬진나루를 건너 하동을 공격했다. 하동을 점령한 광양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했다.

당시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 수접주 유하덕과 함께 광양·순천의 수접주로서 김학식(金鶴植)이 활동했다. 김학식이 광양과 순천 지역을 동시에 관할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영호도회소의 직접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광양에는 1890년 이전부터 동학교인이 존재했다. 광양 봉강출신인 조두환(趙斗煥)은 광양 출신 류수덕(劉壽德)에게 동학을 전수받았다. 이들은 동학교인의 광화문 복합상소와 보은취회에도 적극 가담했다.

광양출신 농민군에는 봉강출신 박홍서, 인덕출신 성석하, 박소재, 박치서, 사곡출신 한군협, 한진유, 옥룡출신 서윤약 형제와 이중례, 하종범, 서통보, 월포출신 김명숙, 섬거역출신 전갑이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접주로서 광양 농민군의 지도급 인물이었다.

이들은 하동 상인들과 힘을 합쳐 하동읍내를 장악한 뒤 농민군 본부인 도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하동 민병의 반격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도주환은 갑오년에 접사(接司)로 활동하다가 그해 말 백운산으로 피신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후 동학교인으로서 활약했다.

한편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는 동학 주문(呪文)은 광양 사람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동학주문을 광양의 동학도가 만들었다는 것은 광양의 동학도들이 그만큼 많았으며 광양의 동학세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강소시기에 광양의 농민군과 하동, 진주의 농민군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영호도회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는 광양 출신이 많았다. 광양 지역 농민군은 섬거역과 인덕, 옥룡면 출신이 많았다. 특히 섬거역은 도접주 전갑이(全甲伊)와 도집강 정홍섭(丁洪燮) 등을 비롯해 29명이나 됐다. 그밖에 봉강면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17명이 포함됐다.

1894년 여름, 영호도회소의 농민군들은 하동의 동학조직과 접촉하고 있었다. 영호도회소는 전라도 관할지역에서 동학의 포교와 치안을 맡아 폐정개혁을 수행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경상도 서부 지역에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하고 집강소의 활동을 경상도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일본세력의 내륙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남부지역을 모두 장악하려 한 것이다.

광양에 집결한 영호도회소 농민군은 하동의 장사꾼과 협력해 섬진강을 건너 하동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하동읍내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곧바로 집강소의 폐정개혁 활동에 들어갔다. 하동부사 이채연(李采淵)은 광양과 하동의 농민군이 연합해 본격적인 집강소 활동을 시작했던 1894년 음력 6월 29일에 부임했다. 당시 하동의 동학교인은 광양의 농민군과 긴밀한 유대와 지원을 받으며 공개적으로 활동 중이었다.

이채연은 화개의 민포군에게 농민군을 유인토록 한 뒤 광양으로 내쫓는데 성공했다. 하동의 장사꾼 중에 광양의 농민군을 추종한 사람들은 모두 광양으로 도망쳐 영호도회소의 농민군과 합류했다. 하동부사 이채연은 장사꾼들의 집과 처자식을 모두 불태웠다. 광양으로 쫓겨난 하동의 장사꾼들은 이 소식을 듣고서도 죽음이 두려워 하동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며 이를 갈 뿐이었다.

그러던 중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의 눈치를 보며 농민군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했다. 일본에 우호적인 개화파가 득세함으로써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대책이 신속하게 수립됐다. 농민군 역시 일본과 개화정부에 맞서는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드디어 1894년 음력 8월 25일 남원에서 농민군대회가 열렸다. 약 5만 명이 참가한 남원의 농민군대회에서 향후 노선이 결정됐다. 농민군의 수뇌부는 개화정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척왜(斥倭)를 외치며 개화정부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지금까지 수개월간 유지돼 온 정부와의 화해국면이 무너졌다.
 

섬거역 전투지에 세워진 동학정. 섬거역에서 농민군과 일본군·관군 사이에 수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수많은 농민군이 이곳에서 죽거나 처형됐다./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수월정. 수월정 아래 섬진나루에서 수차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섬진나루는 광양과 하동을 연결하는 길목으로 경상도로 진출하기 위한 중요한 곳이었다./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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