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수영 전투 패배 이후 여수농민군 급격히 쇠퇴

<104. 여수의 동학농민혁명>
좌수영 전투 패배 이후 여수농민군 급격히 쇠퇴
순천에서 광양으로 도피한 김인배 등 200여명 화형 당하기도
피우실·피냇고랑 등 농민군 처참한 죽음과 관련된 지명 생겨
화양 수문마을에 ‘농민군 돌무덤’ 있었으나 도로 건설로 없어져
 

전남 여수시 웅천초등학교. 조선시대 웅천객사로 사용됐다./여수시청 제공

1894년 음력 11월 28일 여수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일본 쓰쿠바 군함의 지휘관들은 전라좌수영에 전투 부대를 파견해 전라좌수사 김철규를 도왔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을 추격해 덕양리에서 농민군을 격퇴했다. 동학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순천으로 철수했다. 영호도회소 농민군은 1895년 음력 1월까지 여러 차례 전라좌수영군과 소규모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상태였다.

순천으로 물러난 농민군은 수성군에게 기습당하고 광양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수성군의 공격을 받아 김인배 등 2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결국 영호도회소의 주력 부대가 모두 붕괴됐다. 이후 순천·광양 등지에서 농민군과 관군, 일본군과의 교전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이는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김철규는 여수·광양·순천·낙안·보성 등에 전라좌수영 관군을 파견해 철저하게 농민군을 색출해 처형했다.

1895년 음력 1월 4일 오전 순천도호부 사항리(砂項里) 산 위에 주둔하던 동학농민군은 좌수영 영관(領官) 이주회(李周會)가 인솔한 500명의 좌수영군에게 발각돼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 41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 당시 여수지역에서 전개된 농민군의 활동은 좌수영 전투를 고비로 약화됐다.

그 무렵 여수시 화양면에서도 수문마을 뒤편 동성산 일대에서 관군과 농민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화양면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돌산도를 마주보고 있다. 당시 돌산도에는 말목장이 있었고 화양면도 간척되기 전에는 전 지역이 곡화목장(화양면에 소재한 당시 최대 규모의 말 목장으로 말 1천 마리가 키워지고 있었다)이었다. 화양면 농민군을 진압하러 온 것은 돌산도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화양면 농민군의 지휘관은 화동 마을에 살던 김지홍이었다. 부대장은 서촌마을에 살던 김지홍의 사촌동생 김처홍으로 알려져 있다. 농민군은 동성산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갔다. 김지홍은 최부자집 사랑채 부엌으로 숨었으나 발각되고 말았다.

최부자집은 후덕한 인심으로 많은 농민군을 숨겨 주었다. 체포된 김지홍은 당시 곡화목장의 감독관이 거주하던 감독관 터(현재 화양초등학교와 농협자리)에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을 당했다. 부대장이었던 김처홍은 1894년 음력 12월 27일 관군과 싸우다가 패했다. 그는 대밭에 숨었다가 체포돼 장군도 목에서 수장 당했다.

동학군의 지도자로 알려진 또 한 사람은 화동리 대청마을에 살던 심송학이다. 심씨 집안의 족보에서 이름이 삭제됐지만 그의 행적은 후손들 사이에서 ‘큰일을 했던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 따르면 가까운 민가의 부엌으로 농민군 한 사람이 숨어들었으나 이 사람은 나중에 개를 끌어안은 채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을 거치면서 서촌마을의 ‘피우실’이나 이목마을의 ‘피냇고랑’과 같은 지명이 새로 생겨났다. 이 새로운 지명은 모두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처절했던 전투와 살상과 관련돼 있다.

수문마을 앞쪽 바닷가에는 동성산 전투에서 사망한 농민군이 집단으로 매장된 돌무덤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 해안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 화양고등학교 입구에는 ‘감목관 선정비’가 남아있다.(전남도 홈페이지의 전남역사이야기 7회 ‘말(馬)로 외화를 벌었던 조선, 그 말을 키워낸 전남’ 참조)

화양고등학교가 있는 화동리 마을 입구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고개에는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우거지고 사이사이로 20여기가 넘는 고인돌이 평상처럼 놓여있다.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 속에서 낮잠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던 마을의 쉼터였다. 이 바위돌이 고인돌이라고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다. 1789년에 쓰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화동이라는 마을이름은 없고 돌고개(乭古介)란 이름으로 나와 있다.

화동리는 곡화목장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곡화의 ‘화(華)’와 동쪽의 ‘동(東)’을 합해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전해오는 마을의 옛 이름은 동편, 댕핀, 코캐 등이다. ‘댕핀’은 동편의 방언이고 ‘코캐’는 곡화(曲華)가 변한 말이다. 곡화는 조선조 초기부터 지금의 화양면 지역에 자리했던 곡화목장의 감목관이 거주했던 중심 마을로 목장의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 불렸다.

화동마을 일대는 농공단지 조성으로 파괴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백 기의 고인돌이 산재한 고인돌의 천국이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매장 풍습으로 오래전부터 이 지방에 사람이 산 흔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적 유산이다. 현재 살고 있는 화동마을 장년층에게는 어린 시절 고인돌 주변에서 돌화살촉이나 돌칼을 주워서 놀았다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여수시 구 덕양역. 덕양역은 여수와 순천의 중간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1894년 음력 11월 영호도회소가 좌수영을 공격할 때 주요 주둔지로 이용했다. 20일 농민군은 덕양역에서 벌어진 좌수영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화양고 앞 고인돌 무리. 화양고등학교가 있는 화동리 마을 입구에는 20여기가 넘는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에 새겨진 감목관 선정글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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