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여 명 관군·일본군 담양 곳곳 뒤져 농민군 색출 후 처형

<92. 담양의 동학농민혁명>
1천여 명 관군·일본군 담양 곳곳 뒤져 농민군 색출 후 처형
접주 이장태·한충상 등 수십 명 농민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수성군 약탈과 보복으로 농민군 가족 수백여 명 집 떠나 유랑

■ 담양농민군의 피해 현황
 

담양 토굴집
1910년대 형편이 어려웠던 사람들이 땅을 파고 토굴에서 생활했다./담양군청 제공

1894년 음력 12월 동학농민군은 사실상 와해됐다. 전봉준, 최경선, 손화중 등 지도자는 12월 3일을 전후로 해서 대부분 체포됐다. 전남 서부와 동부 지역 농민군들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 공격으로 무너졌다. 전남 서부지역의 농민군들은 장흥으로 모여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대세는 기운 상태였다.

동부권 농민군들 역시 김개남이 체포되면서 구심점을 잃고 세력이 약화됐다. 12월 초 담양 내에 숨어있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과 관군 150여명이 쳐들어왔다. 전투에 패하면서 담양에서 활동 중인 농민군들은 대부분 종적을 감추고 농민군 세력은 사라졌다. 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숨죽여 지내온 토착 양반과 향리들은 이런 상황을 반겼다.

음력 12월 4일 담양 수성군이 읍성을 되찾고 있을 때 순창과 옥과의 수성군 수백 명이 도왔다. 대관 신창희의 관군은 담양에 주둔하고 접주 2명을 체포했다. 담양지역 농민군 22명은 이들에게 붙잡혀 담양도호부 감옥에 구금됐다. 이문수, 채대로미, 장대진, 임송도는 처형됐고 국문보와 김희완은 서울로 압송됐다.

접주 이장태는 일본군 주둔지에서 일본군에게 총살됐다. 나머지 15명은 담양의 감옥에 갇혔다가 경중에 따라 처벌됐다. 음력 12월 6일 창평 관내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들도 체포됐다. ‘거괴’로 불리던 한충상과 그의 동료인 백처사, 조공서, 장영옥, 하재원, 김태철, 백준수, 한성옥, 원만석, 이석용, 강판석, 정영운 등이 체포됐다.

접주 한충상은 관군에게 체포된 후 처형됐다. 나머지 인원은 창평 감옥에 갇혔다가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받았다. 음력 12월 7일에는 순창의 피노리(避老里)에서 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이 체포됐다. 순창에서 붙잡힌 전봉준은 담양의 옥사에 이틀 동안 갇혀 있다가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돼 이듬해 4월 하순 효수됐다.

의병장 구상순과 수성군통령 박동진(守城軍統領 朴東眞), 국치열, 국의열 등은 담양의 수성군을 주도하며 농민군을 체포했다. 이들은 관군과 순창·옥과의 수성군과 연합해 농민군을 체포했다. 담양의 수성군들은 대체로 향리이거나 토착 양반들로 최소 300여명이 넘었다. 담양에서는 구상순과 국인묵(鞠仁默), 김인소(金仁邵), 엄하영(嚴河永)이 창평에서는 이기우(李淇宇)가 농민군을 체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1920년대 담양읍 모습
1920년대 복숭아, 살구꽃이 만발한 담양모습.

담양 수북면 용구동과 대곡(大谷)에는 담양과 순창의 수성군들이 군수미로 사용하기 위해 탈취한 군량이 80석이나 보관됐다. 음력 12월 11일에는 용구동의 농민군 지도자 김형순과 김문화 등이 수성군의 진압을 피해 용구동 마을 뒷산인 용구산에 은신했다. 용구산은 계곡이 깊고 삼림이 우거져 있어 은신하기 좋은 장소였다. 이곳에 숨어 지내던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담양 수성군이 갖은 방법을 동원했으나 일부 농민군은 장성 백양산으로 도주했고 일부만 붙잡혔다.

이밖에 담양부의 호장이었던 엄하영, 부이방(副吏房) 김인소는 농민군 진압에 비협조적이라는 의혹을 받고 나주로 압송됐다. 용두산과 장성 백양산을 거쳐 정읍으로 도망간 집강 김형순은 정읍에서 붙잡혔다. 김형순이 담양으로 이송돼오자 동학농민혁명 당시 죽임을 당한 국홍묵의 아들 국재봉과 국재준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칼로 김형순을 찔렀다. 김형순은 중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광주로 이송돼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혔으나 벽을 헐고 탈옥했다. 김문화 역시 정읍으로 몸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용구동 농민들은 마을 뒤에 있던 용구산으로 숨었으나 모두 체포됐다. 마을 사람들은 동학군 소굴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관군에게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농민군을 체포한다는 목적으로 1천여 명이 넘는 일본군과 관군 등이 담양에 주둔했다. 순창과 옥과의 수성군까지 합하면 훨씬 많은 수가 담양에 머물렀다. 농민군과 그 가족에 대한 탄압과 주민에 대한 횡포는 심각했다. 특히 용구동은 용구동접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대부분이 동학교인이거나 농민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더욱 잔인하게 고문 받거나 처형당했다.

관군들이 농민군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농가를 수색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 죄인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약탈과 잔인한 보복이 자행돼 수백 채의 집들이 텅 비게 됐다. 그런데도 수성군 측의 별군관과 의병장들은 농민군 진압작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포상을 받았다.

남응삼은 운봉전투에서 패한 후 겨우 살아남았다. 그는 숨어 지내다가 1905년 무렵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1900년대 중반 일진회에 들어가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응삼의 서기였던 국기춘은 1895년 김홍집, 박영효와 관계가 있어 법부주사(法部主事)가 됐으나 그들이 실각할 때 그 역시 구금돼 금갑도(金甲島)에서 10년 동안 유배됐다가 풀려났다.

담양의 김중화는 백산봉기에 가담한 장령급의 한 사람으로 동학농민혁명 기간 동안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 역시 체포돼 죽을 날을 기다리다 탈옥하여 목숨을 건졌다. 담양 지역은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했던 만큼 수성군의 대응도 만만치 않아 오랜 기간 양측의 갈등과 대립이 지속됐다.
 

대바구니 파는 소년들
1900년대 죽세공품이 유명한 담양에서는 소년들이 대바구니와 비를 팔고 다녔다.
창평주재소 앞
창평주재소 앞에서 창평면사무소, 경찰주재소, 헌병파견대, 청년훈련소 등 각 기관장 및 대원 면내유지들이 내선일체를
다짐하며 기념촬영을 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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