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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城(85)=고흥 흥양현성(興陽縣城) 흥양현성은 지금의 위치(고흥군 고흥읍 옥하리)에 자리 잡은 후 곧바로 축성 작업에 들어가 1445년 5월 무렵 대부분의 성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는 300여m의 성곽과 두 개의 홍교가 남아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기획특집
미네리셀 기자
2012.08.1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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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오!광주-미디어아트 2012’ 내달 5일 개막5·18민주광장 일원서 3일간…국내외 작가 37명 참가 미디어 아트가 미술관을 박차고 길거리로 나온다. 옛 전남도청 벽면에 아름다운 영상예술이 펼쳐지고 시민들이 직접 작품에 참여하는 대규모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이 광주에서 열린다.광주문화재단은 오는 9월 5일부터 7일까지 광주광역시 주최, 광
기획특집
미네리셀 기자
2012.08.1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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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화유산을 찾고 기록한다는 것은 지루하고 지난(至難)한 작업임에 틀림이 없다. 광주타임스가 ‘정자(亭子)’ 시리즈(2000~2002년)에 이어 지난해 부터 2년간 ‘전라도 성(城)’을 찾는 시리즈로 지면을 과감하게 할애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남도지방에 있어서의 성(城)의 의미란 결코 무심히 흘려버릴만한 것은 아니다. 특히 이번 취재 과정에서 성(城)이란 유적은 우리의 옛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중요한 거점에 위치하고 있고, 당시의 정치·경제의 흐름을 간파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서 깊고 역사적 흔적들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묻히기 전에 찾아 기록하고 사진영상으로 남겨야 할 일은 어느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솔직히 현장을 찾는 다소의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취재기자의 열성과 문화유산을 가꾸고자하는 필자의 마음이 의기투합돼 2년간의 험준한 산행을 마쳤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알아야만이 세계 문화유산의 흐름도 알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취재에 임했던 게 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사실적인 것과 좋은 느낌의 사진을 일구어내는데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으나 많은 부분에서 양이 차지않았음을 시인한다. 그동안 관심있게 지켜봐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4.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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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城 목록 1, 광주 무진고성 2, 광주읍성 3, 광산 고내상성 4, 광양 마로산성 5, 광양 중흥산성 6, 광양 불암산성 7, 구례 석주관성 8, 나주읍성 9, 나주 회진성 10, 나주 자미산성 11, 나주 금성산성 12, 당양 금성산성 13, 화순 철옹산성 14, 화순 오성산성 15, 화순 금오산성 16, 화순 비봉산성 17, 화순 예성산성 18, 진도읍성 19, 진도 남도석성 20, 진도 금갑진성 21, 진도 관방성 22, 진도 철마산성 23, 진도 용장산성 24, 순천 낙안읍성 25, 순천 난봉산성 26, 순천 해룡산성 27, 순천 검단산성 28, 순천 왜성 29, 여수 수중성 30, 여수 석창성 31, 여수 고락산성 32, 여수 호랑산성 33, 여수 달암산성 34, 여수 방답진성 35, 함평 기산산성 36, 함평 금성산성 37, 함평 철성산성 38, 곡성 설산산성 39, 곡성 당동리성 40, 보성 부용산성 41, 보성 전동리성 42, 보성 조양현성 43, 보성 회령포성 44, 장성 입암산성 45, 장성 진원현성 46, 장성 고성산성 47, 장성 삼계현성 48, 강진 병영성 49, 강진 성매산성 50, 강진 만리성 51, 강진 마도진성 52, 해남 이진진성 53, 해남 달량진성 54, 해남 고다산성 55, 해남 금쇄동성 56, 해남 우수영성 57, 해남 옥녀봉성 58, 해남읍성 59, 장흥 수인산성 60, 장흥읍성 61, 장흥 중녕성 62, 장흥 장택고성 63, 장흥 억불산학성 64, 장흥 회주고성 65, 장흥 상잠산성 66, 장흥 회령진성 67, 장흥 고장성 68, 목포진성 69, 목포 고하도진성 70, 영광읍성 71, 영광 법성포진성 72, 영광 천장산성 73, 영광 성촌토성 74, 무안 보평산성 75, 무안 임치진성 76, 무안 다경진성 77, 완도 청산도진성 78, 완도 고금도진성 79, 완도 가리포진성 80, 완도 청해진성 81, 고흥 남양읍성 82, 고흥 발포진성 83, 고흥 목장성 84, 고흥읍성 85, 신안 흑산 상라산성 86, 영암읍성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4.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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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재단의 취재 지원으로 지난 2년 동안 연재했던 기획물 ‘전라도 성(城)’이 88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뉴 밀레니엄과 함께 3년간 연재했던 ‘호남정신의 뿌리 찾는 亭子기행’의 연장 선상에서 기획된 이 시리즈는 역사의 이끼가 돋아있는 옛 성터를 찾아 선조들의 호국의지를 되새기는 의미있는 여정이었다. ‘성(城)’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사 이래 930여 차례나 외침을 당하면서도 이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호국 의지로 뭉친 선조들의 지혜로 축성한 성곽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국에는 현재 수 많은 성곽이 남아있다. 높은 산에는 산성(山城)이 있고, 야트막한 산에는 토성(土城)이, 평지나 바닷가에는 퇴락했지만 역사의 이끼가 덮혀진 읍성(邑城)의 성벽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성곽 유적은 우리 조상들이 삼국시대 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이 강토를 지키려했던 호국 의지의 표상이다.취재 결과 광주·전남 지역에는 42개소(국가 문화재 9개소, 전남도 지방문화재 30개소, 광주시 지방문화재 3개소)의 성곽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었다. 그러나 지정이 되지않은 성곽은 이 보다 훨씬 많았다.이 지역에 산재해있는 성곽의 일부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않아 훼손정도가 심각한 실정이었다. 뿐 만 아니다. 학계의 연구인력 부재와 예산 부족 등으로 성곽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작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문화재 정책의 현주소였다.본지는 지난 2년간 광주·전남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성곽에 대한 기원과 종류, 관리 실태, 역사적인 배경 등을 집중적으로 조명, 이를 다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려 노력했다.아울러 이 시리즈를 계기로 전라도 지역의 성(城)이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는 유적으로써의 가치와 본래의 모습을 찾고,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길 기대해 본다.이번 긴 여정엔 전라도 지역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를 20여년 동안 사진영상으로 담아온 사진작가 오재만씨가 동행했다. 무거운 카메라 백을 메고 험준한 산성을 힘겹게 오르내렸던 그의 노고를 생각하면 코끝이 찡하다. 그러한 취재진의 노력은 지면으로 이어져 독자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다.특히 무성하게 우거진 숲을 헤치며 현장까지 길잡이를 해준 각 지역의 마을 어른들과 향토사학자, 각 시군 문화공보담당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내년엔 더욱 알찬 기획시리즈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뵈울 것을 약속한다.
기획특집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4.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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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城(87)=영암읍성(靈岩邑城) 영암읍성은 영암읍 서남리~교동리 일대에 있는 읍치성(邑治城)으로써 한국 전통읍성 성곽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15세기 조선 문종대(1450~1452)의 기록에 의하면 이 읍성은 1418~1450년 께 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 오재만 문화유산사진연구소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4.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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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자락에서 흘러내려 멈춰 선 ‘토종의 도시’ 영암. 이 곳엔 한국전통 읍성 성곽의 특징을 지닌 영암읍성이 자리하고 있다. 영암을 부화하듯 품고 있는 읍성(邑城)의 축성 연대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각종 문헌을 종합해 보면 1418~1450년께 시축(始築) 된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영암읍성 순례를 위해 여장을 챙겼다. # 읍성과 양달사 장군 영암읍성은 왜구 침입으로부터 성을 지켜낸 임란의병 양달사(梁達四) 장군의 충정이 서려있다. 그의 흔적은 영암읍 서남리 삼거리에 있는 ‘장독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름부터가 특이한 이 샘은 일명 ‘장군정(將軍井)’이라고 불리는데, ‘장독’은 ‘장군을 표시하는 기(旗)’에서 유래된 말이다. 을묘왜변(일명 달량진 사변=삼포왜란 이래 일본에 대한 세견선에 고난을 받아온 왜구들이 1555년 5월 배 60척을 이끌고 달량진을 점령하면서 발생한 커다란 왜변) 당시 양달사 장군이 그의 기를 꽂아 물을 솟게 했다는데서 연유됐다. 샘의 주인공 양 장군은 제주주부(濟州主簿)를 지낸 양승조와 청주 한씨 사이에서 1519년 영암군 도포면 봉호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해남현감을 지냈다가 1555년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관직을 버리고 시묘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왜구들은 1552~53년에 걸쳐 제주를 노략질하고 1555년 5월 60여 척의 병선을 이끌고 달량진(현재 해남 북평면 남창)에 들어와 위세를 떨쳤다. 이 때문에 당시 영암군수 이덕견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 않고 항복, 영암군 관아가 그들의 발길에 짓밟히게 됐다. 영암읍에서 9km 거리에 있는 봉호정(鳳湖亭)에 내려와 있던 양달사는 이 비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상중(喪中)의 몸이라 어쩔 바를 몰랐던 그는 부제학을 지내고 있는 사촌동생 양서정에게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상의했다. 양서정은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거늘, 어찌 이 난리를 보고만 있으려 합니까”하는 편지를 보내오자, 즉시 형 달수(達洙)와 동생 달해(達海)·달초(達礎)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영암읍으로 향했다. 이미 읍내로 들어온 왜구와 3일간의 피비린내나는 격전을 벌였다. 당시 관군은 완산부윤 이윤경(1498~1562)이 인솔했다. 연 3일간의 격전 끝에 적에게 포위되어 군량미와 음료수가 고갈돼 큰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양 장군이 군령기를 높이 들어 호령한 뒤 땅을 내리치자 신기하게도 ‘꽝’하는 소리와 함께 군령기를 꽂았던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았다. 이에 군사들은 사기충천해 왜적을 물리치게 되었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양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왜변은 진압됐으나 자신은 상중의 몸으로 출전한 것이라 관군을 이끌었던 이윤경에게 그 공을 모두 돌렸다. 결국 이윤경은 그 공으로 전라감사에 이어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양 장군은 이 전쟁에서 왜구의 창에 등을 찔린 부상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가 3년 시묘를 마친 뒤 결국 여독으로 41세 되던 1559년 세상을 떴다. 양 장군의 충정이 뒤늦게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그가 죽은 지 100년만에 좌승지로 추증하고 충신으로 정려해 그의 정신을 기렸다. # 연혁 및 규모 영암읍성은 영암읍 서남리~교동리 일대에 있는 분지형 읍치성(邑治城)이다. 15세기 조선 문종대(1450~1452)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의 성축(城築)을 그대로 유존(遺存) 시키고, 주로 부속 시설을 보완하였다. 읍성의 규모는 둘레 4천369척, 높이 12척이며 성 안에 2개의 샘이 있다’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당시의 유적 현황을 살필 수 있다. 그후 ‘신증 동국여지승람’(1530)에는 ‘둘레 4천369척, 높이 12척, 성 안에 4개의 샘이 있다’라고 하여 약간의 수축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또 ‘동국여지지’(1656)의 기록에는 동·서·남·북문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지도서’(1760)에는 성내에 2개의 연못과 4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1830년대의 ‘영암군지’에서는 동·서·남문 등 3문 만이 기재되어 있고, 연지(蓮池·둘레 470척), 덕곡지(德谷池·둘레 210척), 적후지(赤後池·둘레 200척) 등 3개의 연못을 추가로 기록하고 있다. 영암지역 촌로들에 따르면 영암읍성의 동문은 영암시장 입구에, 서문은 옛 영암중학교 터, 남문은 영암경찰서 일대, 북문은 역리 부근이었다고 한다. 영암읍성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교동리 KT 건너편에 150여m만이 남아 당시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사진/ 오재만 문화유산사진연구소장
기획특집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4.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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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城(86)=신안 흑산도 상라산성(上羅山城) 흑산도는 정약전이 15년 동안 머무르면서 섬 일대의 물고기와 해산물을 모아 명칭, 형태, 효능, 분포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자산어보’를 집필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이 섬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상라산(上羅山·226.7m) 정상에는 해적 방어를 위해 쌓았다는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4.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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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축성, 고려 말까지 海賊방어 총각 붙들어 둔‘처녀당’전설‘애틋’ 이미자‘흑산도 아가씨’노래비‘눈길’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목포를 출발, 시원하게 바다를 가르는 흑산도행 쾌속선 선내 방송은 ‘국민가수’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가 흑백영화의 실루엣처럼 촉촉하게 승객들의 가슴을 적셨다. 섬들이 흩뿌려져 있는 신안 앞바다로 접어들면서 크고 작은 섬 안에 갇힌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섬들이 속속 빠져나가고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승선한 지 1시간 반 정도가 지났을까, 멀리 섬이 보인다. 짙푸른 바다 위에 자그마한 섬이 외롭게 떠 있다. 바다와 섬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고 하여 ‘흑산도(黑山島)’라 하였던가. 배에서 바라보는 흑산도는 이름 그대로 검푸렀다. 예리항 들어설 때 눈에 들어온 흑산도는 평범했다. 섬 전체가 온통 산으로 이루어졌고, 해안선도 독특하지 않았다. 그러나 흑산도는 여느 섬과 달리 유구한 숨결을 지닌 역사의 원형질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 섬은 정약전이 15년 동안 머무르면서 섬 일대의 물고기와 해산물을 모아 명칭, 형태, 효능, 분포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자산어보’를 집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흑산도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 상라산(上羅山·226.7m) 정상엔 해적 방어를 위해 쌓았다는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 城의 규모 상라산성(上羅山城)은 신안군 흑산면 진리 2구 읍동마을 뒷 상라산 8부 능선에 반달 모양으로 축성돼 있다. 이곳 흑산도 사람들은 성(城)이 반달 모양을 닮았다 하여 일명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부른다. 이 성은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라 알려져 있다.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 입도(入島) 당시부터 누군가에 의해 쌓아진 성터라고 전한다. 이 성은 뒷쪽이 낭떠러지로 자연 조건상 테뫼식 형태를 띠고있다. 산성이면서도 해로(海路)가 잘 조망되는 이 성은 해로 감시를 위해 쌓여진 듯 하다. 상라산성 서쪽의 정상에는 주변 해로(海路)의 감시를 겸한 봉수대를 설치하여 유사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던 제사 유적이 있으며, 읍동마을 뒷편 계곡입구에는 사신들이 머물던 관사와 무심사가 들어서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들 유적들은 모두 상라산성을 중심으로 반경 500m 범위 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로 보아 산성은 군인들이 상주하면서 군사적인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상라산성의 축성과 사용 연대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어 아쉬움을 준다. 그러나 주변 유적지에서 수습된 유물로 보아 이 성은 통일신라 후기에 축조되어 고려말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함께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나주 영산포로 치소를 옮기게 되면서 폐성(廢城)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 城 주변 유적 산성을 끼고 있는 예리항 선착장 근처 마을 당산에는 ‘처녀당’이라 불리는 성황당이 있다. 처녀당에 얽힌 전설을 살펴보면 이렇다. 흑산도에 옹기를 팔러 온 청년에게 연정을 품은 처녀귀신이 배가 출항하려 할 때마다 풍랑을 일으켜 결국 총각을 섬에 붙들어 뒀다. 남겨진 총각은 당산나무에 올라 고향을 그리며 피리를 불다가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한다. 또 성황당 아래 50m 지점에는 천연기념물 제361호로 지정된 초령목(招靈木)이 있다. 수령이 320년쯤 되어 보이는 이 초령목의 가지를 꺾어 불전(佛殿)에 놓으면 귀신을 부른다 해서 속칭 ‘귀신나무’로도 불린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진 상라봉 고갯마루에 오르면 절벽 아래 짙푸른 바닷물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산성을 향해 오르다 피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해적들을 생각하면 섬뜩해진다. 상라산성을 중심으로 관광지로 발돋움한 흑산도. 21세기 신해양시대를 맞아 흑산도가 제2의 번영기를 맞게될 때 상라산성과 읍동마을의 유적은 한 시대를 풍미한 옛 해양시대의 역사적 상징물로써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기획특집
흑산도/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4.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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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城(85)=고흥 흥양현성(興陽縣城) 흥양현성은 지금의 위치(고흥군 고흥읍 옥하리)에 자리 잡은 후 곧바로 축성 작업에 들어가 1445년 5월 무렵 대부분의 성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는 300여m의 성곽과 두 개의 홍교가 남아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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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골’고흥이 오늘날과 같은 영역을 갖추고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초의 일이다. 백제시대 이래 몇 개의 현(縣)으로 나뉘어 존속되어 오다가 조선왕조에 들어 군현제(郡縣制)를 합리적으로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세종 23년(1441) 남양현(南陽縣) 등을 병합, 흥양현(興陽縣)이라는 독자적인 행정 단위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고흥의 뿌리가 된 흥양현성의 옛 모습을 더듬었다. # 흥양현의 역사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 일대에 걸쳐있는 흥양현성(興陽縣城). 흥양현(고흥현)은 본래 장흥부 묘부곡(猫部曲)이었다. 충열왕 11년(1285) 몽고어에 능통했던 이 곳 출신 류비(柳庇)의 공으로 부곡에서 현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감무(監務)가 설치되고 고흥현으로 고쳐 불러졌다. 그러다가 조선 태조 4년(1395) 왜구로 인하여 보성군의 속현인 조양(兆陽)으로 치소(治所)를 옮겼다. 이어 태조 6년(1397) 조양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로서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세종 21년 12월 의정부에서 전라도 고흥현성을 보성의 임내(任內)인 남양현 저천리(苧川里)로 옮기고 조양진을 고흥현에 합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결정이 내려져 조양진에서 남양현으로 천읍(遷邑)을 보았다. 이어 세종 22년(1440) 7월에 도순찰사(都巡察使) 정연(鄭淵)을 현지에 파견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세종 23년(1441) 2월 치소를 두원현에 속했던 봉황암의 서쪽 즉 지금의 흥양현성 자리로 옮기고 명칭도 흥양현(興陽縣)으로 개칭되었다. 흥양현성은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은 후 곧바로 축성작업에 들어가 1445년 5월 무렵 대부분의 성 시설을 갖추었다. 한편 미완된 성곽 시설의 일부는 1451년까지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흥양현성의 둘레는 3천500여척, 높이는 평지가 12척 높고 험한 곳은 9척이었으며, 여장은 높이 3척에 모두 574개소, 적대(敵臺) 11개, 문은 2개소였다. 옹성이 없으며 성 안에 5개의 우물이 있었다. 해자(垓子)는 파지 못했다고 보고되었다. 이 때까지도 옹성과 해자가 미완성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 縣의 행정 흥양현에는 현감 밑에 호장(戶長)을 비롯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방(工房)이라는 속료가 현감의 행정을 도왔다. 그리고 이들의 보조기능을 수행하는 도화원(都畵員), 의생, 군기색, 호적색, 각종창색, 진상색, 금위색, 전궐색, 봉수색, 지소색(紙所色), 고마색(雇馬色), 진휼색, 객사색(客舍色), 수군색, 금송색(禁松色), 영수색(營需色) 등이 있었다. 이러한 향리직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세분되어 갔는데 이는 지방행정업무의 분화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후기에는 향리의 과다로 새로운 직과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후기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여지도서’에 의하면 흥양현에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20명, 아전 41명, 지인(知印) 12명, 훈도(訓導) 6명, 관노(官奴) 15명, 관비(官婢) 20명, 사령(使令) 22명의 기록이 보인다. 현의 하부조직에 면리제(面里制)가 있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의하면 경외(京外)는 5호를 1통(統), 5통을 1리(里)로 하고 몇 개의 리를 합하여 면(面)을 만들고 통에는 통주(統主), 리에는 리정(里正),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각각 둔다 하였다. # 縣의 군사조직 조선 초 왕권의 확립과 더불어 군제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태조 4년(1395) 고흥현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한 때 보성군 조양현(兆陽縣=조성)에 피난하여 살았으나 얼마 후 안정됨에 따라 태조 6년(1397), 고흥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하여금 현감을 겸직케 하다가 세종 5년(1423) 다시 첨절제사로 고쳤다. 당시 흥양은 중익수령의 위치에서 병마첨절제사를 두었으며 이러한 3익 체제가 진관체제(鎭管體制)의 선구적인 조처가 되었다. 세조 원년(1455)의 군익체제(軍翼體制)에서 전라도는 전주도, 남원도, 순천진, 나주도, 흥양진, 옥구진, 부안진, 무장진, 제주도, 함평독진(咸平獨鎭)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흥양진은 당시 중익에 속해 있었다. 이때 흥양현은 사도첨사진영의 관하 3개 만호(萬戶=발포, 여도, 녹도)를 합한 수군은 모두 1천607명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흥양현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 현재 300여m 성곽과 2개의 홍교가 남아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기획특집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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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금산 목장성. 이 성은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일명 ‘절이도 목장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의 이름은 조선시대 ‘거금도’의 옛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진/ 한 석(사진작가·고흥군청 문화관광과)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4.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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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극의 땅’소록도를 앞에 둔 고흥 녹동항에서 금산(錦山·거금도)으로 가는 철선(鐵船)에 올랐다. 뱃머리에 부서지는 초겨울의 파돗소리가 귓바퀴를 파고 들었다. 마치 현악기의 선율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한 착각을 일게 했다. 경쾌했다. 간간히 살갛을 핥퀴고 돌아가는 바닷바람이 정겹기까지 했다. 조선 초 군마(軍馬) 사육장으로써 역사의 현장을 간직하고 있는 금산 목장성(牧場城·전라남도 기념물 제206호)을 찾아가는 답사자의 마음은 솜털처럼 가벼웠다. 철선은 20여분 만에 금산항에 닿았다. 초행 답사자를 위해 ‘절이도 토박이’신광주씨(57·고흥군의회 의장)와 신상신 금산면장이 길잡이로 나서 목장성을 안내했다. 성(城)을 찾아가는 길은 전형적인 시골길이었다. 돌덩이에 걸려 뒤우뚱거리는 취재차량이 몇 번 멈춰서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 城 연혁 및 위치 목장성은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의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속칭 ‘절이도 목장성’이라고도 불리는 성명(城名)은 조선시대 ‘거금도’의 옛 지명에서 연유된 것이다. 목장성은 거금도의 등뼈 역할을 하고 있는 적대봉(해발 592.2m)과 용두봉(해발 418.6m)의 중간 계곡을 형성하는 부분과 두 봉우리가 연결되는 능선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고, 섬을 중간으로 나눈 남북방향으로 축성됐다. 체성은 완만한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 부분의 서쪽 사면 끝자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해안선까지 이어진다. 이 목장성은 ‘조선왕조실록’ 세조 12년(1466) 2월 기축(17일) 조에 “전라도의 점마별감 박식이 아뢰기를, ‘흥양 절이도는 주위가 270리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말 8백여 필을 방목할 수 있다. 청컨데 회령포, 금갑도, 돌산, 남도포, 어란포 등 여러 포구의 선군으로서 목장을 수축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성종 1년(1470) 1월 계미(4일) 조에는 “사복시 제조가 각지에서 기르는 마소(牛馬)의 원래 숫자와 현재 잃어버린 숫자를 알외다…. 흥양의 도양곶이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666두였는데 고실이 136두, 유실이 5두이며, 절이도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364두였다”라고 적고있다. 이와함께 ‘시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 흥양현 산천조엔 “절이도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으니, 둘레가 1백리요, 목장이 있다”고 나타나 있으며, ‘호남읍지’(1895년)의 흥양목장지사례에는 “절이도는 동서 30리이고 남북 10리이며 둘레는 100리이다. 관문으로부터 거리는 녹도진까지 10리이고 수로(水路)로 30리이다. 민호는 180호이며 방목을 한다”는 기록을 통해서 목장성의 연혁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 세조 12년(1466)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의 주청에 의하여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해 약 800여 필의 말을 기를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실제로 1470년에는 364필의 말을 방목하는 등 절이도 목장은 조선 전기에 중요한 목장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 城 규모 및 현상 이 성은 중간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축조된 차단성 즉, 장성(長城)이며 내외 협측의 석축성이다. 체성의 길이는 섬 북쪽의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제외 하고도 4천652m에 이른다.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이다. 체성의 축조 방법은 내벽의 경우 먼저 바닥에 잡석을 깔고 그 위로 너비 30~80cm, 두께 20~60cm 크기의 부정형 할석으로 80cm까지는 성돌의 열이 맞지 않게 막쌓기를 하였다. 그 위로 너비 30~50cm, 두께 15~30cm의 판석형 석재를 사용하여 열을 맞추었다. 그리고 비교적 성돌의 정연한 면을 바깥쪽으로 하여 성벽의 전체 면이 고르게 축조하였다. 이에 비해 외벽은 3단의 계단식으로 축성되었다. 1단은 수직으로 80cm 올라가서 내측으로 80cm 들어간다. 2단은 80cm 올라가서 내측으로 40cm 들어가고, 3단은 다시 120cm 올라간다. 조선시대 수 백마리의 군마(軍馬)들이 뛰어 놀았을 금산 목장성. 지금은 발길 조차 뜸해 잡초에 묻혀있다. 전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목장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흔치 않은 성으로써 그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기획특집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4.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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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城(83)=고흥 발포 만호진성(鉢浦 萬戶鎭城)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성촌 마을에 있는 발포 만호진성(鉢浦 萬戶鎭城)은 성종 21년(1490) 축성되어 고종 31년(1894) 폐진된 조선 초기의 수군진성이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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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에 발포만호 부임…1년반 800수군‘호령’ 1490년 축성 400년 풍상 겪으며 구국얼 간직 매년 4월28일 충무공 탄신 기념 다례제 거행 고흥 수덕산(修德山) 남쪽 사면 끝자락, 도화면 발포리 성촌 마을에는 404년 동안 수군(水軍)이 주둔하면서 조국이 풍전등화에 처해 있을 때 마다 위기에서 구해냈던 유서깊은 곳이 있다. 바로 발포 만호진성(鉢浦 萬戶鎭城)이다. 특히 이 곳은 500여년 전의 성곽을 완벽하게 복원시켜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 청소년들에게 조국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성(城)은 수덕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두 줄기의 산 능선이가 동·서쪽을 감싸고 있다. 또 남쪽으로는 작은 만(灣)이 형성되어 있으며, 북동쪽에서 들어오는 유일한 해상 교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좌수영 수군기지 가운데 발포 만호진성을 천혜의 조건을 갖춘 군사적 요충지로 꼽고있다. 발포 만호진은 전라좌수영 산하의 5관 5포(5관=순천 낙안 보성 광양 고흥, 5포=사도 여도 녹도 발포 방답) 중 수군만호가 다스린 수군진성(水軍鎭城)으로써 성종 21년(1490) 축성되어 고종 31년(1894) 폐진(廢鎭) 된 조선 초기의 성이다. 특히 이 성은 선조 13년(1580) 이순신 장군이 36세 때 발포만호로 부임해 18개월 동안 재임했던 인연을 맺고있다. # 鎭의 역사 및 문헌 발포진성은 성종 21년(1490) 윤 9월에 축조된 만호진성(萬戶鎭城)이다. 발포진(도화면 발포리)은 세종 21년(1439) 4월에 만호영(萬戶營)이 되었다. 본래 고흥현의 남쪽 고흥포에 축두만호영(丑頭萬戶營=현 풍양면 고옥리 축두)이었는데 세종 17년(1435) 7월에 소흘나량(所訖羅梁)으로 옮기고 그 후 발포로 옮겨 발포만호라 칭하였다. 발포진성에 대한 축성이 논의된 것은 성종 16년(1485) 3월이었고, 이 기록에 따르면 ‘성은 남향이고 둘레 1천360척, 동서 길이 400척, 남북 너비 180척, 보내(堡內)에 샘이 1개소가 있으며, 동북으로부터 흥양현까지는 육로로 32리, 북쪽으로 사량(도)까지는 수로로 1식 15리이다’고 적고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발포 만호진성은 성종 21년(1490) 윤 9월에 둘레 1천360척, 높이 13척으로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포 만호진에 대한 기록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을 비롯 여지도서(輿地圖書·1759), 대동지지(大東地志·1864),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성종실록’(권 245) 21년 경술 9월조에 ‘축…전라도 발포성 주 일천삼백육십척 병 고 십삼척(築…全羅道 鉢浦城 周 一千三百六十尺 竝 高 十三尺)’이라 하였으며 성종 21년(1490) 적양성, 지세포성, 안골포성 등과 함께 축조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규모 및 현상 성벽은 옹형에 가까운 사다리꼴 형태로 전체 둘레는 560m이고 높이는 약 4m이다. 또 서벽이 동벽보다 깊고 현재 동서남북 네 벽이 거의 원상태로 남아 있으나 동벽과 남벽은 민가의 담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안의 건물지로써는 동헌과 객사, 배수로, 무기고, 동문, 서문, 남문, 망루 터 등이 남아 있는데 이는 1977년 전남대 박물관 발굴 조사팀에 의해 확인된 것이다. 이 성은 여천 선소 유적과 함께 임진왜란 때 좌수영 산하의 수군기지로 매우 귀중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곳이다. 또한 발포마을 앞에는 굴강이 남아 있으며 충무공의 애국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 이충무공 유적보존위원회를 결성, 유적지 복원사업을 벌여 충무사를 건립하고 매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 기념일을에 탄신기념 다례제를 모시고 있다.
기획특집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4.11.2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