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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효·예 바탕으로▲ =구국의 정신 되살려내▲ =1691년 읍취정 정신 이어 이계익 선생 건립▲ =도심 속 정자 눈길…노사 기정진 학통 이어흔히 정자(亭子)라 하면, 풍광이 수려한 강가 절벽이나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깊은 산 속에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 쯤으로 여기기 십상이다.그러나 정자 문화에서 발원된 정신은 한결같이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니, 설사 정자가 산 속에 있으면 어떻고, 도심 복판에 있으면 또 어떠하랴.오산정(梧山亭), 이 정자는 한말 때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켜 관군
기획특집
김선기 기자
2012.08.1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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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내면세게 표출위해 최선 ▲서양화가 박주하씨 실로, 긴 여정이었다. 3년 시리즈 가운데 2년간을 동행 취재에 참여했다. 미술대학 시절부터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져온 나로서는, 정자라는 소재는 참으로 친근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때 장승을 소재로 작업했던 터라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은 나의 컨셉과 일치 됐기에 더욱 신명난 동행이었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그동안 스치고 지나쳤던 정자와 그 내면에 흐르는 정신세계를 다소나마 읽을 수 있어 큰 수확이었다. 특히 남도 산하 곳곳을 누비며 온몸으로 체험했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화폭에 옮겨담을 때의 희열은 지금도 생생하다. 예로부터 우리 남도는 정의와 예술이 살아숨쉬고 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에 밀려 우리의 정신문화가 뿌리째 뽑혀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호남의 뿌리’를 찾는 작업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 =기획취지 화폭에 옮기려 노력 ▲한국화가 장복수씨 지난 세기를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엔진을 비롯 차체 개발에 주력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21세기는 지난 세기에 개발해 놓은 자동차를 운전 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광주타임스 ‘정자기행’시리즈는 참으로 의미가 있다. 후반기 동행 작가로 참여해 1년을 함께 했다. 때론 시간에 쫓겨 점심도 굶어가면서, 때론 궂은 일기에도 불구하고 취재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호남의 정신’을 찾는다는 시리즈의 취지를 살려내기 위해 많는 노력을 했으나, 아쉬움만 남는다. 그러나 그림 한 폭 한폭에 최선을 다했다. 이번 시리즈에 동참하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전라도의 반골기질과 선비들의 우국충절, 그리고 남도사람들의 따뜻한 인간애가 그 것이다. 독자들께 보다 더 좋은 작품을 보여주지 못해 못내 아쉽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2.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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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기행 목록 ◇광산=만취정 칠송정 호가정 낙암정 용진정사 학림정사 불환정 ◇광주 서구=만귀정 ◇광주 남구=남과동정 부용정 ◇광주 북구=환벽당 풍암정 오산정 균산정 ◇담양=식영정 송강정 면앙정 취가정 죽림재 명옥헌 수남학구당 소쇄원 독수정 ◇화순=몽한각 망미정 죽수서원 녹수정 물염정 ◇장성=관수정 필암서원 ◇순천=상호정 영락정 만락정 ◇여수=거문도 귤은당 거문도 충열사 충민사 망해루 ◇나주=영모정 쌍계정 만호정 장춘정 벽류정 ◇곡성=함허정 영수정 대환정 완계정사 ◇구례=방호정 운흥정 용호정 오봉정사 ◇광양=암연정 수월정 감호정 학사대 ◇함평=백화정 이인정 영파정 육모정 ◇보성=죽곡정사 천인정 죽천정 열화정 ◇무안=무안감리서 ◇목포=목포시사 고하도 이순신 삼문 ◇해남=녹우당 해촌사 ◇완도=세연정 동천석실 ◇진도=벽파정 압구정 ◇장흥=용호정 부춘정 사인정 경호정 ◇영암=영보정 회사정 영팔정 이우당 ◇영광=선양정 탁염정 침류정 덕림정사 ◇강진=백련당 백화정 강회정 다산초당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2.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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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동안 107개 정자 순례 역사적 사실 재조명 ▲ =중견화가 참여 지방지 사상 최장기 기획물 평가 대망의 새천년과 함께 시작했던 대하시리즈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을 108회로 막을 내린다. 돌이켜 보건데, 3년이란 세월은 기나긴 여정이었다. 남도자락에 보석처럼 숨겨진 정자를 찾아 그 곳에 서린 사림들의 발자취와 역사적 사실들을 찾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 만은 아니었다. 자료적 한계와 부실한 보존은 매회 마다 취재진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어느 시인의 절규처럼, 광주는 뜨거운 도시요, 피 끓는 청춘의 도시였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예향’,‘의향’이란 포장지에 둘둘 말아져 ‘광주의 정신’은 본래 색깔을 잃어가고 있다. 광주타임스는 광주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의로운 정신’이 서려있는 전라도의 정자를 찾아 3년동안 남도 산하를 헤집고 다녔다. 광주를 ‘의향의 도시’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화가·문인 몇 명 있다고 해서, 민주화운동 당시 시너를 끼얹고 산화한 민주열사 몇 명 있다고 해서 광주를 예향·의향의 도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어떤 뿌리에서 연유하고 있다고 본다. 50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냈던 일, 21세기 첫 대통령을 배출하는데 큰 원동력이 됐던 ‘전라도의 정신’이 바로 그 것들이다. 이번 시리즈 취재과정에서 이러한 정신은 ‘정자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남도의 정자는 정치적 변혁과 불의에 반항하여 정의와 충절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요람이었다. 전라도가 반골기질이 강한 지역 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광주·전남에는 무려 1127개의 정자가 건립됐으며, 현재 435개소 만이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음을 이번 취재과정에서 확인했다. 전남대 이상식 교수(사학과)는 “각처에 산재돼 있는 정자는 호남 정신문화의 원류로써 재조명이 절실하다”고 지적, “광주타임스 대하 시리즈 ‘정자기행’은 지방지로서 취급하기 힘든 분야를 3년 동안이나 끌어오면서 남도의 정체성을 찾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막상, 3년간의 손때 묻은 취재수첩을 접는 기자의 마음은 홀가분함에 앞서 아쉬움이 크다. 바쁜 일정에서도 취재에 협조해 준 일선 시·군·구 문화재 전문위원들과 향토사학자, 그리고 각 문중의 여러 어른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끝으로 본 시리즈를 위해 동행취재에 기꺼이 응해준 서양화가 박주하·한국화가 장복수 님께도 감사드린다. 계미년 새해 또 다른 기획물로 독자 여러분을 만날 것을 약속한다.
기획특집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2.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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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광주 북구 청풍동 사촌마을 초입에 서 있는‘균산정’은 한말 때 학자 문인환 선생이 1921년에 건립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노사 기정진의 제자로 당시 문명을 떨쳤던 균산 문용현 선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진(2)=조선말 명필 석촌 윤용구 선생이 쓴 ‘균산정’의 현판. 빛바랜 현판에서 세월의 덧없음이 느껴진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2.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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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갗 애는 눈보라 속 대나무 기개 간직 ▲ =기정진 제자 문용현의 학통 초막지어 계승 모진 폭풍한설에도 그 절개를 꺾지 않는다는 대나무, 그래서 예로부터 지조있는 선비를 일컬어 ‘대나무’로 불리웠던 것일까. 광주 인근에도 이러한 대나무의 절개를 빗대어 지어진 정자가 있다. 바로 광주시 북구 청풍동 신촌마을 초입에 서 있는 균산정(筠山亭)이다. 이 정자를 찾아 떠난 날은 때마침 눈발이 소금처럼 흩뿌려졌다. 듬성 듬성 쌓아놓은 짚다발과 해충 방제를 위해 불을 놓은 자국이 선연하게 남아 겨울 들판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감상하는 듯한 아늑함까지 안겨준다. 경렬사를 지나 얼마나 달렸을까. 제4수원지 방향을 향해 가다보면 ‘신촌마을’이란 석비(石碑)’를 만날 수 있다. 이 표지석을 끼고 돌면, 마을 저편으로 아스라이 눈에 들어오는 균산정을 발견할 수 있다. 정자 밑으로 돌바기 아이의 눈망울 만큼이나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그 위에 균산정이 아름다운 자태로 길손을 맞고있다. 사실, 이 정자의 건립 연대는 그리 오래 되지않았다. 그러니까, 한말 때 이 마을 출신의 선비 해사 문인환(海史 文仁煥·1863~1930) 선생이 1921년에 건립했으니, 80여년 이쪽저쪽에 이른다. 그러나 균산정의 건립 정신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였던 노사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을 떨쳤던 균산 문용현(筠山 文龍鉉)의 유지를 받아 그의 아들인 해사 문인환이 건립했다. 균산은 노사(蘆沙) 선생의 제자로 죽파재(竹坡齋)라는 문각에서 많은 후학을 배출한 당시의 처사(處士)였다. 특히 정자의 옛터는 균산의 5대조(五代祖) 성제공 필상(惺齋公 弼尙·1671~1735)이 수헌(水軒)이라는 별당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인지라 더욱 그 역사성이 깊다. 훗날 해사는 초막을 지어 아버지의 학문을 이으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균산이 작고한 지 36년 만에 비로소 이 터에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정자의 이름을 그의 선친 균산의 호를 따라 ‘균산정’이라 명하였다. ‘균산(筠山)’이란 대나무의 살갗처럼 추운 겨울의 눈보라에도 그의 절개가 변치 않음을 뜻한다. 균(筠)은 대나무의 일종이기도 하지만, 그것의 살을 보호하는 겉 살갗을 이르기도 한다. 균산정의 구조는 도리 석초, 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정면 3간, 측면 3간의 아담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자 입구에 단간 와가(單間 瓦家)의 정문이 있고 정면 또는 좌측 전면에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의 ‘균산정’이라는 대서 판각이 걸려 있다. 또 정내에는 정자 주인 문인환의 정기(亭記)와 정운(亭韻)을 비롯한 22개의 판각이 걸려 있고 전면 좌우의 기둥에 10개의 주연이 부착되어 있다. 정자의 한 중앙에는 다른 정자와 달리 네 개의 기둥이 별도(別途)로 건립하여 판자 마루로 되어 있는 정사각형의 거실이 꾸며져 있고, 그 위에 이층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 좌측에는 석축 토담이 둘러 있고 그 옆에 노암괴석이 있으며 담밖 열 걸음정도의 거리에 죽파재가 있다. 또 죽파재 위에 괴양정이, 그 위에 서석단이라는 단소가 있다. 이러한 여러 시설들은 현재 남평문씨(南平文氏) 신제공파(愼齊公派) 후손들이 관리해 오고있다. 그림/ 한국화가 장복수 글
기획특집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2.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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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한말 때 의병장 최익현의 뜻을 받들어 구국운동을 펼쳤던 이계익 선생이 건립한 오산정. 빛바랜 현판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2=오산정의 뿌리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순절한 이방필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691년 중창된 읍취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2.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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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효·예 바탕으로 ▲ =구국의 정신 되살려내 ▲ =1691년 읍취정 정신 이어 이계익 선생 건립 ▲ =도심 속 정자 눈길…노사 기정진 학통 이어 흔히 정자(亭子)라 하면, 풍광이 수려한 강가 절벽이나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깊은 산 속에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 쯤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정자 문화에서 발원된 정신은 한결같이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니, 설사 정자가 산 속에 있으면 어떻고, 도심 복판에 있으면 또 어떠하랴. 오산정(梧山亭), 이 정자는 한말 때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다 붙잡혀 대마도에 유배, 스스로 음식을 거절해 굶어죽은 문신 최익현(崔益鉉·1833~1906) 선생의 뜻을 받들었던 송천 이계익(松泉 李啓翼·1878~1946) 선생이 건립했다. 오산정은 현재 행인들의 왕래가 잦은 광주시 북구 오치동 오치우체국 옆 주택단지 안에 자리하고 있다. 밀려드는 현대문명 속에서 도심 한 켠을 지키고 있는 오산정은 심산유곡에 건립된 정자와는 달리 세상 사람들과 함께 호흡을 같이해 오고 있다. 오산정의 역사는 인근(현 오치농협 자리)에 있었던 읍취정(현재는 흔적 조차 찾을 수 없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읍취정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읍취 이방필 선생의 후손들이 읍취의‘의로운 정신’을 기리기 위해 1691년 건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읍취정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하서 김인후 선생이 명명했다 하니, 이방필 선생의 인품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읍취정의 정신은 훗날 오산 이용헌(梧山 李勇憲) 선생으로 이어졌다. 특히 오산 선생은 ‘조선 성리학의 6현’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1798~1876)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제자로서, 후학들에게 지대한 양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이계익 선생은 바로 오산 선생의 아들로서, 이계익은 아버지가 타계하자 부친의 학문을 잇기위해 ‘오산정’을 건립해 강학소로 활용했다. 옛말에 ‘효자 가정에서 효자 낳고, 충신 가정에서 충신을 낳는다’고 했던가. 300여년 전 흡취정에서 발원, 오산정으로 도도하게 흘러내린 역사의 시간은 변함없이 또 그렇게 후대로 흘러갈 것이다. 이 정자에 보관된 ‘오산정 원운(梧山亭 原韻)’에서 이계익 선생의 당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지난 옛날 부모 생각 때가 없이 간절하여/ 동량(棟樑)나무 다스려서 이 정자를 세웠도다./ 아름다운 서석(瑞石)영기 구름 속에 묻혀있고/ 바라보인 망봉(望峰) 달빛 더딤없이 솟았도다./ 푸른 정자 그 유적이 한이 없이 아름답고/ 전해오는 바른 이모(貽謨) 이내 사정(私情) 깊었도다./ 척강(陟降)하는 그 영혼이 보일듯이 나타나니/ 신비하는 이 이치를 터득하기 어렵도다. 몇 번의 이건(移建)을 거쳐 현 위치에 놓여진 우산정은 도리 석초·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정측면 2간의 아담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중앙의 거실 한 간을 제외한 좌우측면이 모두 툇마루로 연결돼 있고 사방의 주위가 콘크리트벽으로 둘러있어 삭막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그 안에서 내뿜는 올곧은 정신의 뜨거운 열기는 이 곳을 찾는 길손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있다.그림/한국화가 장복수 글
기획특집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2.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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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1670년께 건립된 만귀정. 이 정자는 만귀 장창우 선생이 광주 서구 세하동에 둥지를 틀고 지역 인재 양성과 도학사상을 펴기 위해 지은 초막이다. ▲사진(2)=만귀정은 다른 정자와는 달리 연못 안에 있다. 특히 이 정자는 묵암정사· 습향각과 함께 정자군을 이루고 있어 눈길을 끈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2.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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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강물로 330여년을 흘러온 ‘푸른 정신’ ▲ =1670년 장창우 건립…인재 양성·도학사상 요람 옷깃을 파고 드는 초겨울 바람 탓에 수요일 오후가 잔뜩 움츠려 있다. 오늘 같은 날은 훌훌 잠념을 털고 빈 들판으로 나가자. 광~송간 공항로를 시원하게 달리다 보면 세하동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나온다. 아직 갈색 빛이 채 가시지 않은 들녘엔 겨울이 먼저 와 있다. 하루하루의 햇빛과 바람이 허실없이 이 들판을 익게했을 지난 가을의 풍성한 시간들을 되뇌이며 ‘만귀정(晩歸亭)’을 찾는다. ‘만귀(晩歸)’,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일까. 정자의 이름대로 만귀정엔 넉넉함이 고여있다. 주변엔 아름드리한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그러하고, 삼나무, 단풍나무, 해송, 벽오동, 왕벚나무, 해송 등이 운치를 덧씌워 주고있다. 이 정자는 지금으로부터 330여년 전인 1670년께 남원 출신 만귀 장창우 선생(晩歸 張昌羽)이 광주 서구 세하동에 둥지를 틀고, 지역 인재 양성과 도학사상을 펴기위해 지은 초막이다. 만귀정은 커다란 연못에 안에 ‘습향각(襲香閣)’과 ‘묵암정사(墨菴精舍)’가 나란히 늘어서 있어 그 어느 정자에서 느낄 수 없었던 정감을 안겨주고 있다. 이 정자는 1934년 중건(重建)을 거쳐 광복이 되던 1945년 현재의 정면·측면 2칸에 팔작 지붕건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만귀 선생이 그의 늙은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보내겠다는 영귀(詠歸)의 뜻으로 여겨진다. 광주시 문화재 자료 5호로 지정된 만귀정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당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문을 논하고, 나아가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던 곳으로써 지역 유림들의 사랑방이 됐다. 만귀정 계단을 내려와 연못의 다리를 건너면 ‘습향각’이 있다. 이 곳은 1960년에 만귀 선생의 7세손 묵암 장안섭(墨菴 張安燮)이 지은 것으로, 사방 1간짜리 작은 정자다. 그 단촐함이 사람을 끈다. 정자의 미덕은 개방성이다. 사방으로 열려 너른 들과 낮은 산과 키 큰 나무와 하늘과 바람을 모두 안고 있다. 누구라도 발 들여놓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정자이다. 오순도순 모여앉은 사람들 사이엔 얘기꽃이 벙글어지고 때론 노래가락이 흥겹다. 그렇듯 다수운 자리인 정자가 바로 옆에 하나 더 있다. 큰 나뭇가지 하나가 저편으로 건너려는 듯 기울어있는 다리를 또 하나 건너면 ‘묵암정사’가 있다. 그 정자에 올라 난간에 기대앉아 본다. 오래 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이제 조금 지친 그런 사람의 마음이 된다. 옛사람이 있어 여기 앉아 저 산을 보았을까. 저 물속의 산그림자를 보며 해지는 풍경에 마음이 스산했을까. 고요하다. 이따끔 연못 속의 물고기들이 입 내밀어 뻐끔거리는 소리로 이 연못은 더욱 고요하다. 만귀정에 걸려 있는 40여편의 시 현판 가운데 정자의 주인 만귀 선생의 시 8경이 눈에 들어온다. -瑞石明月(무등산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龍江漁火(용강에는어부들의 불 빛이 있네)/ 馬山淸風(마산에는 맑은 바람 산들거리며)/ 樂浦農船(낙포에는 농사를 위한 배가 오간다) / 漁燈暮雲(어부들의 등불에 저녁 구름 피어나고)/ 松汀夜雪(송정에는 흰눈이 밤을 밝히며)/ 錦城落照(금성에는 아름다운 저녁노을)/ 野外長江(들밖에 길고 긴 강물이 흐르네). 만귀정, 습향각, 묵암정사 등에는 중건상량문, 중건기, 중수기 등과 만귀정 원운, 팔경 등의 많은 시문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경내에는 만귀정시사 창립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이 곳이 문인들의 활동 무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晩歸, 깊어가는 겨울 초저녁 하나 둘씩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제집을 향해 발걸음이 바쁘다. 지난 여름의 범람과 가뭄, 그렇게 함부로 출렁였던 마음의 물결을 가라앉히고 제 자리를 찾아 흐른다는 겨울 강물처럼 그렇게 오늘은 깊어지고 있다. 그림/ 한국화가 장복수 글
기획특집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2.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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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대 중반 무렵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양과동정. 당시 이 정자에서는 1418년 태동한 ‘광주향약좌목’의 영향을 받아 ‘양과동계’가 조직돼 민주주의의 불씨를 다독이는 질화로 역할을 했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2.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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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향약좌목’영향… 양과동계 태동 ▲ =이선제·이 발 등 걸출한 큰 선비 배출 ▲ =송시열·고경명 시문 걸려 옛세월 체감 지금으로 부터 400여년 전, 광주 지역의 큰 선비들이 둘러앉아 어지럽게 돌아가는 나랏일을 걱정하고, 향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향약을 시행했던 양과동정(良苽洞亭). 광주시 남구 양과동 마을 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정자는 ‘양과동정’이란 명칭 이외에도 간원대(諫院臺) 또는 고경명(高景命)의 별서(別墅)로도 불리우고 있다. ‘간원대’란 이름은 이 곳에 드나들었던 선비들이 간관(諫官)으로 많이 배출, 여기에서 국사(國事)를 의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정자의 건립 연대는 뚜렷한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자의 제액(題額)을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1607∼1689)이 쓴 것으로 보아 1600년대 중반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정자 내에는 동정입의서(洞亭立議序)와 중수기(重修記), 고경명의 제양과모정(題良苽茅亭), 박광옥(朴光玉)의 차유곡모정운(次柳谷茅亭韻), 제간원대(題諫院臺), 향약 등과 관계된 현판이 걸려 있어 당시의 옛 영화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특히 이 정자는 고려말 조선초 대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광주출신 김문발 선생(金文發·1359~1418)이 1418년(태종 18)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태동시킨 광주향약좌목(光州鄕約座目)의 영향을 받아 홍치년간(弘治年間 1488∼1505년)에 이루어진 동약 ‘양과동계(良苽洞契)’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김문발 선생과 함께 광주향약좌목을 발의한 이선제(李先齊·1389∼1454)가 이 마을 출신이며,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돼 화를 당했던 이 발(李潑 1544∼1589, 이선제의 5대손) 역시 이 정자와 많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1604년에 작성된 중수조목(重修條目)에 따르면,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원용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 동약들과 대개 비슷하나 벌칙과 세부 지행규칙인 별규(別規)에서는 독특한 개성을 살필 수 있다. 양과동 동약은 모두 4권의 좌목이 있다. 이것은 동계원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현재 마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좌목은 옛날 것을 일괄 정리해 동계에 가입한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어 각 시기의 동계원 구성자료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의 성씨 구성원이 현재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마을에 보관된 문과안(文科案)과 사마안(司馬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동계의 조목 중 이의 실시를 30리로 한정한 내용이 있다. 이는 동계의 범위를 한정한 것으로 여러 마을을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786년 동각(洞閣)을 중수하면서 작성한 물자수합록(物資收合錄)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동답기(洞沓記)와 완의(完議)는 동약의 물적기반인 사회경제적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동장(洞長)과 공사원(工事員), 유사(有司) 등의 동약 조직과 소속 전답을 적고 있다. 동약이 별도의 부세와 관련된 경제력까지 간여하고 있어 상부상조의 기능을 넘어 보다 큰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자는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바람 막는 판이 설치돼 있다. 기단은 바른층 막돌쌓기를 하고 덤벙주초를 놓고서 원형기둥을 세웠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장은 연목(椽木)의 연골이 그대로 들어난 연등천장으로 하였으며 홑처마다. 기와의 문양은 숫막새는 날개를 펴고 있는 백조 문양이고, 암막새는 거북선 모양이며 현재 광주시 문화재 자료 제12호로 지정돼 있다.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버텨온 양과동정 주변에는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만이 간간히 찾는 길손들의 옷깃을 곧추세우게 한다. 400여년전 전라도 지역에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의 불씨를 지폈던 양과동정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계단 위로 계절을 재촉하는 낙엽 몇 잎이 뒹글고 있다. 그림/한국화가 장복수 글
기획특집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2.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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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여말선초 때의 선비 부용 김문발(芙蓉 金文發·1359~1418) 선생이 1416년에 건립한 부용정. 정내에는 ‘부용정’의 현판을 비롯 고제봉, 양송천, 이동악, 김 향 선생 등의 시문이 걸려있다. ▲사진(2)=‘부용정’이란 명칭으로 보아 주변에 연방죽(蓮池)이 있을 법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 조차 찾아볼 길 없고 정자 마루에서 바라본 주변은 넓다란 평야 만이 눈에 들어온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2.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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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0년전 民主 불씨 지핀 광주 향약 발원지 ▲ =여말선초 때 김문발, 1416년 건립‘향약좌목’첫 시행 ▲ =고경명·이안눌·박제형 등 名儒 누정제영 편액 즐비 아침에 실낱같이 가는 비 내리더니/ 저녁되니 맑은 빛이 푸른 못에 넘실거리네/ 아름다운 모임 어찌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까/ 사군(使君)의 행색 저절로 응당 더리리. 광주시 남구 칠석동 2리 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부용정(芙蓉亭)’, 정자의 명칭으로 보아 당연히 있어야 할 연방죽(蓮池)은 찾아 볼 수 없고, 황량한 초겨울의 바람만이 세월의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부용정은 여말선초(麗末鮮初) 때 필명을 날렸던 광주 출신의 선비 부용 김문발(芙蓉 金文發·1359~1418) 선생이 지역 인재들의 강학과 선비들의 시회장(詩會場), 향촌 규율과 민주적인 여론 수렴을 위한 향약의 집회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1416년에 건립했다. 특히 이 곳은 제봉 고경명을 비롯 양송천, 이동악, 박제형, 김향 등 당대 선비들의 출입이 잦았으며, 광주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향약을 시행했던 정자이기도 해 유서가 남다르다. 광주 평장동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도학사상에 심취했던 부용 선생. 그는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해 오던중 임금에게까지 그 사실이 알려져 천거돼 형조참판과 전라감사, 황해도 관찰사 등 관직을 역임했으나 어지럽게 돌아가는 나라꼴에 환멸을 느껴 낙향해 평생을 초야에 묻혀 살았다. 정자의 이름을 ‘부용(芙蓉)’이라 불리운 것은 김문발 선생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 깊은 내면에는 연(蓮)을 꽃 중의 군자(君子)라고 칭송했던 북송(北宋)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設)에서 취했다. 김문발 선생은 1418년(태종 18)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래, 여씨(呂氏)의 남전향약(南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모방하여 풍속 교화에 전념했다. 이것은 곧 그 유명한 광주 향약좌목(鄕約座目)의 유래가 됐던 것이다. 또 부용 선생은 이곳에서 이시원(李始元), 노자정(盧自亭) 등과 학문을 논하며 광주의 정신문화 발전에 불씨를 붙이는 역할을 했다. 정자의 건물은 정·측면 다같이 3간으로 기둥머리에 공포가 없는 민도리집으로, 우물마루를 깐 맞배지붕, 민흘림기둥을 세웠고 홑처마로 건립됐다. 기단은 네모 막돌 바른층 쌓기를 하였고, 좌우 가운데를 제외하고는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았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을 하였고 연골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 현재 정내에는 현판과 함께 당시의 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양응정(梁應鼎)의 시문을 비롯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권필과 쌍벽을 이뤘던 대학자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후대 명유(名儒)들의 누정제영(樓亭題詠)을 새긴 편액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이와함께 정자 주변에는 칠석마을 고싸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전수관과 부용 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기념물 제10호)가 서 있고, 부용정의 내력이 쓰인 부용정석비(芙蓉亭石碑)가 간간히 이 곳을 찾는 길손을 맞고 있다. 그림/한국화가 장복수
기획특집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2.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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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 문무(文武)를 겸비했던 나주출신 장춘 유충정 선생이 1561년에 건립한 장춘정. 정내(亭內)에는 고봉 선생을 비롯 석천, 사암, 연파 선생 등 당대 학문이 뛰어났던 학자들의 시문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사진(2)=장춘정의 역사와 함께해 온 은행나무. 이 노거수는 하나의 뿌리에 수 많은 곁가지를 키워내고 있어 이 곳을 찾는 길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2.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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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가 지경인데 공명부귀 웬말인가” ▲ =유충정 선생, 政爭에 환멸… 낙향해 기대승 등과 교류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 피 뛰기는 정쟁(政爭)에 환멸을 느껴 공명부귀(功名富貴)를 버리고 낙향, 초야에 묻혀 마음을 닦으며 평생을 지냈던 조선 명종 때 선비 장춘 유충정 선생(藏春 柳忠貞· 1509~1574). 나주군 다시면 죽산리 화동마을 안쪽에는 그의 정신을 오롯히 묻고 있는‘장춘정(藏春亭)’이 자리하고 있다. ‘장춘(藏春)’이란 이름 때문인가. 정자의 주변에는 한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숲과 사시장철 피고 지는 꽃들이 항상 봄을 간직한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1561년(명종 16) 장춘 선생에 의해 건립된 이 정자는, 퇴계 선생과‘사단칠정론’을 논했던 조선시대 대학자 고봉 기대승을 비롯해서 면앙정 송순, 사암 박 순, 석천 임억령 등 인근 선비들의 출입이 잦아 ‘학문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자의 주인 장춘 선생은 고흥유씨 유해(柳 瀣)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무과에 급제(1534년, 중종 29), 부안현감을 시작으로 강진현감, 김해부사, 장흥부사 등의 수령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로 부터 추앙을 받았다. 장춘정의 역사는 정내(亭內)에 결려있는 고봉 기대승(1527~1572)선생의 ‘장춘정기(藏春亭記)’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정기(亭記)에는 장춘 선생의 학문과 옳고 그름을 냉철하게 판단할 줄 아는 인물의 됨됨이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장춘 선생의 행장들은 정내(亭內)에 즐비하게 걸려있는 당대 학자들의 글귀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면앙정 송순(1493~1583)을 비롯 석천 임억령(1496~1568), 원기 오상(1512~1573), 풍암 임복(1521~1576), 사암 박순(1523~1589), 고봉 기대승(1527~1572), 연파 박개, 손재 박광일, 백호 임제(1549~1587), 안위, 설봉 강백년(1603~1681) 등의 글들이 모두 그 것들이다. 장춘 선생이 부안 현감으로 재직시절, 서해 바다에 출현했던 해적을 일소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을 비롯해서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당시 순찰사 안위와 함께 칠산 앞바다에서 왜적의 전함을 나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장춘 선생이 온성부사로 재임할 때의 일화는 지금도 후세에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선생은 무관으로서 위기에 몰려있는 나라를 위해 북방의 육진을 평정, 북관을 안전케 했지만 어지럽게 돌아가는 나라꼴에 대한 환멸을 느낀 나머지 부귀영화를 버리고 낙향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이 남긴 글 한 구절은 지금도 마음을 뜨겁게 한다. ‘이광이 비록 명장이나 평생에 제후를 얻지 못하였고, 나도 차라리 옛집에 돌아가 한가로이 금강에 낚싯대나 드리울거나…’라며 당시의 암담한 정치현실을 이렇게 적고있다. 장춘정에 대한 기록은 관찬지리서인 ‘여지도서’(1757년)을 비롯 ‘호남읍지’, ‘나주목읍지’들에서도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정자의 뒷편에는 봄·가을로 화려하게 피어내는 동백나무 숲을 이루고 있고, 옆엔 장춘정의 역사와 함께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등 아름드리한 노거수가 서 있다. 장춘정은 정면 3간 측면 2간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방1간 대청 2간으로 구성돼 있다. 1818년과 1930년의 중·보수를 거쳐 올해 4월 전라남도 기념물 제201호로 지정됐다.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글
기획특집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2.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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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낙암정은 1934년 고봉 기대승의 후손인 낙암(樂庵) 기정룡(奇廷龍)에 의해 광산구 임곡동 신촌리에 건립됐다. 이 정자의 뿌리는 고봉 선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樂庵’이라는 현판에서 고봉의 깊은 학통을 엿볼 수 있다. ▲사진(2)=고봉 기대승의 학통을 후손 낙암(樂庵) 기정룡(奇廷龍)이 맥을 이어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의 요람이 됐던 낙암정 전경.
기획특집
남도일보
2002.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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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선생, ‘사정칠단’을 논해 봅시다” ▲ =고봉 기대승 후손 기정룡이 정자 짓어 학통 계승 조선시대의 대학자 고봉 기대승 선생(高峰 奇大升·1527~1572). 그의 체취를 묻고 있는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 신촌리 등성이에 자리한 낙암정(樂庵亭)을 찾았다. 이 정자는 1934년 고봉의 후손 낙암 기정룡(樂庵 奇廷龍)에 의해 건립된 것이지만, 사실 그 뿌리는 고봉 선생으로부터 비롯됐다. 이 정자의 초건(初建)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낙암이건기(樂庵移建記)’에 따르면, ‘이 정자는 고봉 기대승 선생이 고마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활용해오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쇠락된 것을 후손 낙암 기정룡에 의해 중건된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낙암정의 텃자리를 잡아주었던 고봉 기대승 선생의 행적을 들여다 보자. 고봉은 1527년(중종 22) 광산구 임곡에서 학자 기진(奇進)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총명해 그의 나이 15세에 이르자 옛 성인을 그리며 글을 배우고 익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예법(禮法)과 산수(算數)에 관한 학문에는 이를 전문으로 하는 대가에 못지 않았다. 1549년(명종 4) 초시(初試)에 들고 1558년(명종 13)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1563년(명종 18)에는 호당(湖堂)에서 공부하고 주서(註書)를 거쳐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新進士流, 새로 진출한 유학자와 문인)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 세조가 임금자리를 빼앗을 때 공을 세운 사람)에 의해 벼슬을 빼앗겼다. 1567년(명종 22)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이듬해 선조가 즉위 하자 집의(執義)가 되고 이어 전한(典翰= 홍문관에 딸린 종 3품 벼슬)이 되어 조광조(趙光組)·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 죽은 뒤 벼슬을 높여줌)을 강력히 건의하기도 했다. 이듬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시독관(侍讀官,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직책)을 겸직 하였고 1570년(선조 3) 대사성(大司成)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 사이가 나빠 그만 두었다. 뒤에 대사성에 복직 되었지만 사퇴하고 이듬해 다시 부제학이 제수 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 대사간을 잠시 지내다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그해 8월 고향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병세가 악화돼 그해 11월 전북 고부에서 4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고봉이 타계하자 1590년(선조 23)에 조정에서는 생전에 세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추록, 덕원군(德原君)에 봉해 졌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주어지고 문헌(文憲)이란 시호가 내렸다. 선생은 사물을 보고 헤아리는 생각이 남달리 뛰어나서 독학으로 고금에 통달, 일제(一齊)· 퇴계(退溪)와 서로 오가면서 선학(先學)들이 미처 깨우치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내보이기도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 많은 일화 가운데, 퇴계와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사람의 본성에서 우리라는 네 가지 마음씨와 일곱가지 심리작용)에 대한 논변(論辨)은 지금도 후세에 전해오고 있다. 특히 8년 동안 자신들의 학설을 주고받은 편지는 조선 성리학계의 2백년간의 논쟁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율곡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 이르기를 “고봉은 어릴적부터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사물을 넓게 보고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였으며 기품이 호걸스러워 담론하는데 좌중 사람들을 승복하게 만들었다”고 극찬하고 있다. 저서로는 평소 임금의 물음에 대답했던 것을 사관(史官)이 기록한 3권의 ‘논사록(論思錄)’과 시문집(詩文集) 및 퇴계와의 ‘왕복서간집(往復書簡集)’, ‘종계변무주청문(宗系辨誣奏請文)’등이 있다. 현재, 낙암정에는 고봉 선생으로부터 내려오는 학통을 후손 낙암(樂庵)이, 다시 지역 유림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글
기획특집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2002.10.3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