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농민군 벽사·장녕·병영·석대들 싸움에 대거 참가

<98. 보성의 동학농민혁명>
보성 농민군 벽사·장녕·병영·석대들 싸움에 대거 참가
보성농민군 1·2차 봉기 적극 참여 남평·능주·장흥농민군과 연합
석대들 전투 패배 뒤 100여 명 넘는 보성농민군 참혹히 죽임 당해

보성군지도
보성군은 지금의 전남 보성군 보성읍, 노동면, 득량면, 미력면, 겸백면, 문덕면, 북내면, 율어면, 조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성의 내부를 보면 북쪽 부분에는 관청 건물이 들어서 있고 남쪽 부분은 민가가 밀집해 지역별 분화 현상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득량면 해평리 지역인 동남쪽 해안에는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서울로 운반하던 해창(海倉)이 있었다./서울대학교 규장각

보성지역에는 1891년께 장흥의 이방언(李芳彦), 이인환(李仁煥) 등을 통해 동학이 전파됐다. 보성출신 염현두(廉鉉斗)도 이 시기에 동학에 입교했다. 장흥과 보성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 장흥으로부터 동학을 수용했으며 장흥 동학조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보성에서는 문장형(文章衡)과 이치의(李致義)가 농민군을 이끌고 1894년 백산봉기에 참여했다.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농민군은 전주화약 이후 보성으로 돌아왔다. 전봉준을 지지하는 세력이었던 보성의 농민군 지도자 문장형, 박태길(朴泰吉) 등은 1,2차 봉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동학당의 지도자였던 안규복(安奎馥)은 보성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활동했다.

박태길을 비롯한 보성의 농민군 지도자들은 보성군수 유원규(柳遠奎)와 우호적인 관계에서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유원규는 집강소 운영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농민군에게 협조적이었다. 음력 7월 중순 보성의 농민군 수백 명이 장흥으로 진출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보성과 장흥의 농민군은 서로 연계해 강진 병영에서 동학도들을 모았다.

2차 봉기 이후 보성에서는 문장형의 주도로 농민군 3천명을 모았다. 보성의 경계인 웅치는 당시 장흥 관할이었는데 농민군들은 웅치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보성의 농민군들은 주로 웅치와 회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웅치의 농민군 지도자였던 구교철(具敎澈)은 장흥을 점령하기 위해 음력 10월 말부터 보성·광주·남평·금구·능주의 농민군과 연합했다.

특히 11월~12월 초에 장흥 인근지역 농민군과 연합한 농민군들은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은 사창에 집결해 벽사 역을 점령하고 장흥을 공격했다. 사창은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기관이었다. 농민군은 벽사역, 장흥읍성, 강진읍성, 병영성 등을 차례로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1894년 음력 11월 21일에 웅치면 접주 구교철이 이끄는 농민군 수천 명이 웅치에서 봉기했다. 이들은 25일 장흥 대흥면에서 이인환이 이끄는 농민군과 합류했다. 26일에는 이방언, 이사경, 백인명 등이 이끄는 농민군들과 함께 회령 진을 점령했다. 12월 초부터는 이방언의 장흥농민군과 함께 벽사역, 장흥부, 강진현, 병영 등을 차례로 점령해 나갔다.

그러나 12월 15일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조·일 연합군에 맞서 항쟁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보성의 농민군은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수성군의 집요한 추적을 받았다. 이들은 일본군과 관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보성 접주 안규복도 수성군에게 붙잡혀 효수됐다.

일본군들의 지휘 아래 관군들은 동학농민군 색출에 전력을 다했다. 순천의 도성찰(都省察) 손작란(孫作亂)은 보성읍 우산(牛山)의 토굴에 숨어 있다가 체포됐다. 음력 12월 22일 보성출신의 안규복은 낙안의 수성군과 외서면(外西面) 사람들에 의해 외서 돌이치(突伊峙)에서 붙잡혀 효수 당했다. 그는 수많은 농민군들을 지휘하며 보성을 비롯한 인접 군현을 중심으로 크게 활약했는데 이에 관군은 본보기 삼아 그를 군민(軍民) 앞에서 효수한 후 자른 머리를 좌수영으로 보냈다.

12월 26일 일본군과 수성군이 협력해 보성의 농민군 30여 명을 포살했다. 27일 보성의 수성군들은 낙안군 남상면칠동(南上面七洞, 현 벌교읍 칠동리) 거주의 접사(接司) 최환구(崔煥九)가 잠복한 하화리(下禾里)의 집에서 낙안의 유명한 농민군 지도자인 조보여(趙甫汝)와 보성 농민군 지도자 최덕화(崔德和)를 체포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음날 탈출했다. 관군은 그 보복으로 80세가 다 된 최덕화의 부친 최득수(崔得洙)를 모진 고문 끝에 사경을 헤매게 했다. 또한 그의 집과 황소 2두, 벼 11석을 빼앗았다.

1895년 1월 1일 보성군수의 보고에 따르면 농민군 65명이 총살당했고 33명이 처형됐다. 보성의 농민군 지도자 박태길은 1894년 말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석방됐다. 그는 보성군수 유원규를 비롯해 이방언, 김낙철 등과 같이 풀려났다. 하지만 전라도관찰사 이도재의 명령으로 다시 처형됐다.

유원규는 1895년 1월경 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농민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체포돼 서울까지 압송됐다. 그는 함평현감과 같이 농민군 연루 혐의로 체포됐다. 일본군이 보성과 함평의 수령을 동학당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보성군수는 나주의 관군을 지휘하며 농민군 지도자를 체포하는데 기여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1895년 음력 3월 21일 이방언 등과 함께 무죄로 석방했다.

1895년 1월 10일 보성 오치(烏峙)에서 농민군 9명이 포살됐다. 다음날에는 농민군 11명이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월 18일에는 보성 농민군 지도자 양성좌(梁成佐), 허성보(許成甫), 허용범(許用範) 등과 장흥의 농민군 지도자 김보열(金寶烈), 김성한(金成漢), 정덕흠(鄭德欽), 김시언(金時言), 구자익(具子益) 등과 같이 붙잡혀 효수됐다. 1월 19일 박윤지(朴允之), 김달매(金達每) 등도 군사들 앞에서 처형됐다.
 

일본군의 동학도 호송
각 지방의 중요인사들은 모두 나주감옥으로 압송됐다. 전봉준·손화중·최경선 등도 나주로 압송됐다가 서울로 이송됐다./동학농민혁명기념관
웅치면사무소
1894년 구교철이 이끄는 농민군이 현재 웅치면사무소가 있는 이곳에서 집결해 봉기했다./보성군청 제공
보성관아 터 전경(현 보성군청)
집강소가 들어섰던 보성관아 터. 보성군수 유원규는 농민군 지도자 박태길과 타협해 이곳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 현재의 보성군 웅치면사무소
1894년 구교철이 이끄는 농민군이 현재 보성군 웅치면사무소가 있는 이곳에서 집결해 봉기했다./보성군청 제공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