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백성, 농민군 식량·물자 징발로 고통 극심

<93. 곡성의 동학농민혁명>
곡성 백성, 농민군 식량·물자 징발로 고통 극심

동학 세 약한 탓에 지역 지킬 수 있는 농민군 절대부족
남원·장성지역 농민군 몰려와 쌀·창 등 군수물자 가져가
곡성 유생·향리들 수성군 조직한 뒤 타 지역 농민군 방어

 

곡성현지도( 1872년 지방지도 )
곡성현은 전남 곡성군 곡성읍, 삼기면, 오곡면, 석곡면, 목사동면, 죽곡면 일대에 해당한다./서울대학교 규장각

담양의 동쪽에 위치한 곡성은 1894년 곡성현과 옥과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1861년 최제우가 머물렀던 남원은 1889년에 동학교인이 수천 명으로 증가했는데 남원과 인접해 있는 곡성은 1890년을 전후한 시기에 동학이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1892년에는 곡성의 동학교인들이 구례로 동학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1892년 곡성에 살던 기봉진(奇鳳鎭)의 전도로 구례에서는 허탁(許鐸)등이 동학을 받아들였다.

전남북도 접경 지역의 동학조직들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각 군현의 아문(衙門)에 전봉준이 작성한 창의문(倡義文)을 게시할 때 곡성의 동학교인 김재홍(金在弘)이 벽서를 붙였다. 당시 남원의 김영기, 운봉의 김성기, 구례의 유태홍 등의 동학교인들도 괘서운동에 동참했다. 벽서는 교조신원운동이나 동학 포교의 자유, 교인의 탄압 중지 등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1894년 3월 백산대회에 농민연합군을 편성할 때 곡성에서는 조석하(趙錫夏), 조재영, 강일수, 김현기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참가했다. 농민군 세력이 전라도 전체로 확산되자 전라병사 이문영은 포군을 징발해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음력 4월 20일 곡성에서도 포군 100명을 징발해 일부를 무안으로 파견하고 나머지는 곡성을 방어하게 했다. 5월 10일에는 농민군을 방어할 목적으로 촌정을 모집했는데 인민들의 원망을 들을까봐 홍계훈이 이것을 금지하도록 했다.

곡성지역의 농민군 세력은 다른 곳에 비해 약했다. 지리적으로 깊은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원과는 들판으로 이어져 있어 군수물자를 조달하는데 유리했다. 인접한 지역의 강력한 농민군 부대들은 곡성에 쳐들어와 약탈하며 군수물자를 조달했다.

곡성의 농민들은 관군의 힘으로 다른 지역에서 쳐들어오는 농민군 부대를 막아주기를 기대했다. 민간의 자체 조직만으로는 농민군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음력 7월초 장성 제암리(霽岩里) 출신의 이사홍(李士弘)이 이끄는 농민군이 밤에 쳐들어와 곡성읍성을 함락시켰다. 이들은 군기고의 무기와 민가의 재산을 남김없이 빼앗아갔다.

이일을 당한 후 곡성의 토착세력과 향리들은 수성군을 결성해 타 지역에서 쳐들어오는 농민군에 대응했다. 선비였던 김명국(金明局)이 수성장을 맡고 호장 신정렬(申正烈) 등 아전들을 중심으로 수성군을 결성했다. 흩어진 노비와 천민들을 모아 사졸로 편입시켜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또한 각 면리마다 청장년을 모집해 타 지역 농민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활동했다.

하지만 한창 바쁜 농사철에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면서 많은 피해들 입은 그들에게 원성을 샀다. 수성군은 농민군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호장 신정렬은 당시 이교(吏校, 조선 시대 서리와 장교를 통틀어 이르던 말로 중인 신분으로 양반과 양민의 중간 계급)에 해당했다. 이들은 군사적 업무에 능숙한 몇몇 사람들과 계책을 논의하고 실행했다.

각 리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군수물자를 각자의 능력에 따라 스스로 내놓도록 했다. 그 결과 읍성을 지키려는 결의가 고조됐고 주민들도 차츰 안도했다. 또 인근 지역에서 곡성으로 피신해 온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점차 인근 읍의 농민군 세력이 커지면서 전라도의 모든 군현이 몸살을 앓았다.

곡성 역시 수세에 몰리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수성장 김명국과 수성군 간부로 참여한 사람들은 민포(民砲)로 지목돼 농민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10여 차례의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곡성관아 건물 터
곡성관아 부속건물이 서 있던 곳이다.
곡성관아 뒷담
군청 뒤쪽의 담들에 옛 관아의 흔적이 담겨 있다.
곡성군청(곡성관아 터)
백년 된 팽나무가 관아 터였음을 짐작케 한다.
곡성중앙초등학교(장대 터)
장대 터는 군사들이 훈련을 받던 곳이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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