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과 김인배, 순천을 갑오항쟁 남도지휘부로 삼다

<99. 순천의 동학농민혁명>
김개남과 김인배, 순천을 갑오항쟁 남도지휘부로 삼다
김인배 영호도회소 설치하고 전라 동부와 경상 서부 총괄
낙안군·광양현·좌수영 관할하며 하동·진주까지 진출해 전투
김개남 측근 김인배 지역 장악하면서 전봉준 영향력은 쇠퇴

 

순천부지도(順天府地圖, 1872년 지방지도)
순천부는 지금의 전남 순천시, 별량면 동부, 쌍암면, 서면, 송광면, 월등면, 주암면, 해룡면, 황전면과 여수시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순천시내 영동 일대에 있었다. 남해안의 동쪽 경상도와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 여수반도에서 돌산도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길게 걸쳐있다. 해안에는 左水營, 古突山鎭, 防踏鎭 등의 진영이 포진하여 군사적으로 매우 중시되던 곳이었다./서울대학교 규장각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순천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백산봉기 이후 전라병사 이문영(李文榮)은 순천에서 150명, 광양·낙안·곡성·흥양 등에서 각 100명씩 포군을 선발한 뒤 병영에 주둔시켜 농민군과의 전투에 대비했다.

하지만 1894년 음력 5월 7일 체결된 전주화약 이후로는 각 군의 수령이 도망가거나 농민군의 눈치를 살피며 향응을 베푸는 경우가 많았다. 순천 역시 농민군의 영향력이 갈수록 높아졌다.

1894년 음력 6월 25일 김개남은 휘하의 농민군 수만 명을 지휘해 남원을 점령했다. 전봉준은 소식을 전해 듣고 즉시 남원으로 달려와 김개남에게 농민군을 해산할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김개남은 농민들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렵다는 이유로 농민군의 해산을 거부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당시 국내외 정세에 서로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전주화약 체결 후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해 각자 지역 활동에 들어갔다. 전남 동부출신의 농민군들도 대부분 귀향했다. 김개남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던 전북 금구(金溝) 출신의 김인배(金仁培)는 전라좌도의 핵심적인 농민군 지도자였다. 그는 좌도의 남쪽 요충지인 순천부를 점령하라는 김개남의 지시를 받고 순천으로 이동했다.

김인배는 1894년 음력 6월 이후에야 순천에 들어왔다. 백산 봉기에 참여한 순천 농민군보다 한 달 정도 늦게 들어온 것이다. 그 이유는 김개남이 남원 점령에 앞서 음력 5월 하순부터 약 한 달간 태인·순창·옥과·담양·창평·동복·낙안·순천·보성·곡성 등 주로 전라좌도 지역을 집중적으로 순행했을 때 이 과정에서 순천의 중요성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 후 1894년 음력 6월 말 김인배에게 순천을 점령하고 영호도회소를 설치하도록 했다.

대접주 김인배는 순천에 들어올 때 금구에서 인솔한 동학군 외에 광양 수접주 유하덕(劉夏德)과 함께 동학도 수만 명을 동원해 동학의 엄청난 위세를 과시했다. 당시 순천부사 이수홍(李秀弘)은 동학군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이로 인해 김인배가 인솔한 농민군은 손쉽게 순천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순천에는 전봉준의 노선을 따르는 박낙양(朴洛陽) 등의 농민군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라좌도는 김개남의 영향권에 있었고 그의 핵심인물인 김인배가 순천에 들어오자 박낙양의 활동상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김개남의 영향력으로 순천 지역에서 전봉준을 따르던 세력은 집강소 시기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 영호도회소의 집강소 활동

영호도회소는 순천도호부의 읍성에 본부를 두고 낙안군·광양현·좌수영을 관할했다. 현재의 순천·광양·여수 지역에 해당된다. 영호도회소는 김개남의 영향 아래 전남 동부지역 농민군의 구심점으로서 폐정개혁 활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전주도회소나 남원의 도회소로부터의 지시 사항을 각 군·현의 농민군에게 전달했다.

영호도회소는 지리적인 이점(利點)을 고려해 순천에 본부를 두었다. 순천은 예로부터 소강남(小江南)이라 불릴 정도로 물산이 풍부한 유통의 중심지이자 주위에 큰 산과 바다에 인접한 영·호남 사이의 대도회지(大都會地)였다. 따라서 전남 동부의 중심지인 순천에서 인근 지역을 관할하기가 편리했다.

도회소 앞에 ‘영호’는 섬진강 하류의 순천·광양·하동·진주 지역을 포괄한다. 경상 서부와 전라 동부 지역을 총괄하는 의미에서 ‘영호’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측에서도 영호도회소의 대접주인 김인배가 전라 경상 양도의 도통령(都統領)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경상 서부지역은 일시적으로 하동과 진주 지역에서 활동했을 뿐 영호도회소는 실질적으로 전남 동부지역을 관할한 농민군 조직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할 조짐이 보이자 조선을 완전한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속셈을 드러냈다. 개화파 정권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했다. 순천의 영호도회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평소 김개남과 투쟁노선을 같이 하던 영호도회소 대접주인 김인배와 영호도회소는 방침을 바꿔 8월 말부터 본격적인 무력 진출을 시도했다.

김인배는 원래의 목표대로 수접주 유하덕과 함께 직접 동학농민군 주력 부대를 이끌고 하동·진주 방면으로 출전했다. 이 지역을 장악해야만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미리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호도회소 주력 부대가 광양을 거쳐 하동 방면으로 출전했고 나머지 농민군은 영호도회소의 본거지와 그 후방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영호도회소의 후방은 안전해졌지만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 군대는 여전히 동학농민군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음력 8월 19일 남원의 동학농민군은 남원읍성과 교룡산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20일에는 동학농민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김개남은 남원에서 웅거하면서 농민군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개남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들은 더 이상 조정과 전봉준의 요구대로 치안 유지에 협력할 수 없으며 일본의 만행을 좌시할 수 없다고 결의했다.

김개남 영향력 하의 전남 동부지역 동학농민군들은 곳곳에서 읍내를 무력 점거하고 무기를 빼앗는 등 급격히 재봉기의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수개월간 유지되어 온 조정과의 화해 국면은 무너져내렸다.
 

영호도회소 터(옛 순천도호부의 관아터)
전남 순천시 영동1 일대. 1894년 음력 6월 말부터 12월까지 전남 동부지역동학농민군 지휘부인 영호도회소가 있었던 곳이다.
영호도회소 터 부근에 세워진 팔마비
영호도회소 터 부근에는 고려시대의 청백리였던 순천부사 최석을 기리기 위해 세운 팔마비가 있다.
순천대 홍영기 교수와 최혁 주필.
순천대 홍영기교수(우측)와 최 주필이 전남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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