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황 장위영軍, 농민군 잔인하게 처형하고 재물 약탈

<97. 구례의 동학농민혁명>
이두황 장위영軍, 농민군 잔인하게 처형하고 재물 약탈

관리·양반·유생·향리 등 토호세력…민포 조직해 농민군 진압
체포 피한 농민군들 살아남기 위해 이름 바꾸고 고향 떠나
허탁·임양순·우공정 간신히 살아남아 천도교 교역자로 활동
 

일본군의 동학군 처형 사진
일본군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동학군들을 모두 죽이는 방침을 정했다. 일본군은 잔인하다는 소문을 피하기 위해 조선관군을 앞장세워 곳곳에서 농민군들을 잔인하게 총살했다./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제공

1894년 음력 11월 중순경 농민군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구례농민군도 민보군과 관군의 토벌에 의해 지도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례농민군 지도자와 접주들은 생명을 건지기 위해 도망가거나 이름을 바꿔야만 했다. 일반 농민군의 상당수는 자취를 감췄다.

관군들은 눈에 불을 켜고 동학농민군 색출에 나섰다. 농민군을 잡아들이면 잔혹하게 처형했다. 구례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 나섰다. 반면에 숨죽이고 있었던 토호와 향리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동학군을 잡아들이는데 앞장섰다.

농민군들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한 수성군, 이른바 ‘의병’이 여러 지역에서 결성됐다. 이들은 ‘민포(民砲)’라 불렸는데 의병과 유사했다. 농민군 지도자의 대부분은 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체포되거나 생매장 당했다.

장위영군이 도착하기 전 구례의 수성군은 이기(李沂)를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에 맞서 세를 키워가고 있었다. 양반 유생인 이기는 전북 만경(萬頃) 출신으로 구례에 살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당초 그는 동학농민군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농민들이 백산에서 봉기하자 이기는 전봉준을 찾아갔다. 그는 전봉준에게 서울로 쳐들어가 간신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전봉준은 그의 말에 솔깃해 김개남에게도 찾아가 보라고 했다. 그러나 김개남은 그를 믿지 못하고 해치려 했다.

위기를 겨우 모면한 이기는 구례로 도망해 수성군의 선봉에 섰다. 그는 농민군을 무찌를 계책을 세워 민포군을 동원해 읍성을 굳게 지켰다. 또 혁명에 가담한 농민들을 색출해 읍내의 치안을 장악했다.

이기는 민포군을 모집해 성을 지키고 농민군을 체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훗날 군공록에 올랐다. 구례의 수성군 편에 서서 가담한 주요 구성원으로는 이기를 비롯해 유학 왕사춘(王師春), 전 도사(都事) 김홍식(金弘植) 등이 있다.

구례의 토호세력이었던 유제양은 농민군 가운데 일부가 민포군으로 돌아서 생명을 보존한 것에 한탄했다. 동학농민혁명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유제양은 <갑요전(甲擾傳)>라는 동학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농민들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폭정에 시달린 점은 인정하면서도 정부에 저항해 무장폭동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라고 적었다. 또한 <시언(是言),1851~1922>이라는 자신의 일기에서 농민군에서 변심한 인물로 구례현감 남궁표를 언급했다.

남궁표는 농민군에 적극 협조하고 동학을 신봉했지만 결국에는 수성군에 참여했다. 구례의 토호세력으로 전직 관리와 양반, 유생, 향리들이었던 이들은 읍성을 방어하기 위해 민포를 조직했다. 이들은 농민군 지도자나 접주, 일반 농민군을 체포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자 농민군들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1895년 음력 1월 9일 장위영(壯衛營) 부령관(副領官) 이두황(李斗璜)은 경군 800여명을 이끌고 구례에 쳐들어왔다. 이두황의 장위영군은 가는 곳마다 농민군 진압을 명분 삼아 갖가지 나쁜 짓을 벌였다. 이두황은 기생을 끼고 다니며 재물을 탐하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그는 구례를 출발할 때 40~50마리의 우마에 재물을 가득 실어갈 정도로 욕심이 많았다. 또 농민군을 체포했다가 풀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기도 했다.

이두황은 1895년 음력 1월 11일 구례접주 임정연과 접사 양주신(梁柱臣)을 병사들 앞에서 포살한 후 순천으로 떠났다. 이기를 중심으로 한 구례 의병소는 이두황의 장위영군과 일군이 떠난 후에도 농민군 7명을 잡아 교수형에 처했다.

구례군 광의면 사직동에 살고 있던 임정연의 마을에는 동학교인들이 매우 많았다. 그는 같은 마을의 이기옥(李起玉)과 광의면 대산리 유산 마을의 양군섭 등과 힘을 합해 농민군을 조직했다. 임정연와 이기옥은 화엄사 올라가는 방향의 쑥골에서 체포됐다. 그의 시신은 광의면 지천리 구리실 부근에 묻혔다. 임정연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구례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구례현감은 구례의 농민군 7명을 수성군, 이른바 ‘의병소’로부터 인계받아 장위영의 지시에 의해 처벌했다. 일반 농민군으로 참여해 잘못이 없는 농민군들도 무조건 잡아들여 행적을 조사했다. 대부분의 농민군들은 체포되거나 자신의 생활 터전을 버리고 멀리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유제양의 종제는 수성군의 소모사(召募使)로 활동했지만 일본군의 모함을 받아 서울에 가서 스스로 잡혔다.

구례에서 가장 먼저 동학을 받아들인 허탁과 임양순, 우공정 등은 농민혁명 과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1900년 후반에 천도교 교역자로 활동했다. 허탁은 1907~1909년까지, 임양순은 1910년까지, 우공정은 1911년까지 구례군 산동면 전교사(傳敎師)로 활동했다.

허탁은 1910년과 1916년에 구례군 교구장을 역임했다. 우공정은 1910년에 공선원(共宣員)을 지내는 등 구례지역의 대표적인 천도교 지도자로 활동했다. 1894년 농민군을 지도했던 동학접주들은 살아남은 이후에도 천도교 활동을 계속했다. 일반 농민군들의 경우에는 전력(前歷)을 숨기고 이름을 바꿔 겨우 살아남았다.
 

전남대에서 정년퇴임한 뒤 동학을 비롯 구례의 향토사를 정리하는데 헌신한 문승이 선생(앞쪽)과 최혁 주필
체포된 동학군
1894년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1만여 명 중 500명만 살아남는 등 크게 패했다. 12월 말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사진 속의 동학군들이 체포된 지역과 신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친일파 이두황
이두황은 장위영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앞잡이가 돼 경기·충청·호남·전남지역 농민군들을 진압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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