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동학농민혁명군의 나주성 공격

동학농민군, 네차례에 걸쳐 나주성 공격
수만명 농민군 용진산과 고막원 등지에 진 치고 공세
함박산까지 진출하다 결국은 대포앞세운 관군에 패배
민종렬 지휘 초토영 군사 성밖에까지 나가 적극 진압
 

▲ 나주 관찰부 건물나주는 1895년까지 나주목이었다. 갑오경장 때 전국 8도가 23개 관찰부로 바뀌었는데 이때 전라도는 전주·남원·나주·제주관찰부로 분할됐다. 그런데 1896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전국은 다시 13도로 구분됐다. 이때 역사상 처음으로 전라남도라는 행정구역이 처음 생겨났고 관찰부 소재지가 광주가 결정됐다.

1894년 음력 10월 15일께 손화중이 이끄는 광주농민군과 오권선 휘하의 나주 농민군은 나주성 공격에 나섰다. 나주 동쪽에서 20리쯤 떨어진 침산(砧山:지금의 광산구 하산동 446-2 일대), 송정리 옆의 선암(仙巖), 북쪽 용진산(龍珍山)일대로 진출했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성밖으로 출정하여 농민군을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김창균을 선봉장으로, 김성진을 중군장으로, 정석진을 후군장으로 삼고 200명씩의 포군을 지휘토록 했다. 그러나 전투 직전 김창균이 나이가 많다하여 정석진이 선봉장으로 출전하게 됐다.

600명의 수성군은 10월 20일 석현리에서 하룻밤을 잔 뒤 다음날 농민군 선발대와 접전을  벌였다. 수천 명의 농민군은 침산 뒤 봉우리에 진을 치고 공격해오는 수성군에 맞서 싸웠으나 포를 쏘며 공격해오는 수성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농민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금성정의록>에는 침산전투장면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적과 냇물 하나 사이의 거리에 이르니 적들은 조총을 난사했다. 도통장이 강 언덕으로 가까이 가서 강충삼에게 대완포를 쏘게 하니 포탄이 떨어진 곳에 적의 무리들이 어지럽게 죽어갔다.

또 천보총을 연발로 쏘아대니 적들은 크게 무너지고 인마(人馬)가 서로 밟혀 사망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적들을 소탕시켜 버리도록 하고 군을 소집하여 점검해보니 한 사람도 사상자가 없었다.”
11월 11일 손화중 휘하의 농민군은 또 다시 나주성 공략에 나섰다. 농민군들은 광주 두동(斗洞)에 주둔하고 있었다. 13일 농민군들은 용진산(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선동 산 69번지 일대)으로 진지를 옮겼다.

11월 13일 나주 수성군들은 용진산으로 출전했다. 용진산 중턱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 금성토평비나주읍성의 수성군이 동학농민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에 세워진 비.

<금성정의록>은 용진산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적들은 산 위에 거점을 두고 관군은 아래에 거점을 두었으니 관군이 지형적으로 불리했다. 이를 우려하고 있는 때 접응장 박근욱과 박재국, 최윤용, 구유술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측 편 산상으로 진을 치고 적들을 삼면에서 공격했다. 또 민병들은 좌우로 나누어서 진을 치고 있으니 공격하니 농민군들은 모두 허둥댔다. 임여현등은 좌측에 불을 질러 식량보급로를 차단했다.”
농민군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나 수성군의 대포공격과 산의 세면에서 동시에 쳐들어오는 양동작전을 견뎌낼 수 없었다. 수성군은 산 왼 쪽에 불을 놓아 양식보급로를 끊어 버리고 오른 쪽에도 불을 질러 도주로를 막아버렸다. 밤이 되면서 추위와 허기에 지친 농민군들은 북쪽 산을 타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농민군은 나주의 북쪽에서는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이 이끄는 농민군이 공격을 하고 나주 서남쪽에서는 무안 배상옥의 농민군이 공격을 하기로 계획했었다. 11월 16일에는 무안의 농민군 수만 명이 나주와 무안의 경계지역인 고막포(古幕浦)에 집결했다.

고막포에 주둔했던 농민군은 17일 두 길로 나누어 수성군이 머무는 초동 장터 근방의 장등을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수성군 측의 대완포 공격에 밀려 후퇴했다. 추격을 당한 농민군이 한꺼번에 좁은 고막 다리로 몰리면서 많은 농민군들이 물로 떨어져 빠져 죽었다.
 

▲ 나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초토영(招討營)호남 지역의 농민군이 기세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1894년 음력 10월 28일 나주에 호남초토영을 설치하고 나주목사 민종렬을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에 임명했다. 지금은 나주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의 농민군이 다시 나주성 공격에 나선 것은 11월 23일이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농민군은 금안면 남산촌과 태평정 등지에 진을 쳤다. 그리고 나주성 북문 밖 함박산(咸朴山)까지 접근했다.

함박산까지 접근했던 농민군은 이날 밤 남산촌까지 물러나는데 이유는 농민군과 관군 사이의 증언과 기록에 차이가 난다. 농민군 쪽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날 밤 추위가 너무 심해농민군이 물러났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관군 쪽 기록은 이날 밤 나주 수성군 막사에 불이 났는데 이 불이 화약이 쌓여져 있는 곳까지 번져 마치 대포를 쏘는 듯 한 소리가 나자 농민군들이 이 소리를 관군이 대포를 쏘는 소리로 알아듣고 멀리 퇴각했다는 것이다.

다음 날인 11월 24일 수성군 도통장 정진석은 남산촌의 농민군을 급습했다. 농민군은 소를 잡아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농민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날 죽은 농민군의 수만 35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11월27일 광주로 돌아가 광주관아에 머무른다. 농민군의 세가 약해져 더 이상 항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손화중은 12월1일 농민군을 해산하고 집강소를 떠났다. 최경선도 몸을 숨겼다.
 

▲ 나주향교나주향교의 유림들은 나주목사 민종렬과 힘을 합쳐 동학농민군들이 나주읍성내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했다.

손화중은 고창군 길마재에 있는 이모씨의 제실(祭室)에 숨어 지내다 12월 11일 주민들에게 체포돼 고창현에 갇혀 있다가 일본군에 넘겨졌다. 최경선 역시 12월3일 화순 동복에서 체포돼 일본군에게 인도됐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전봉준과 같이 나주에 수감됐다가 서울로 압송됐으며 1895년3월29일 사형을 언도받고 곧바로 처형당했다. 이들과 함께 동학지도자인 주윤철과 박윤화, 정수해, 이봉조, 허인 그리고 접주였던 백반석과 이여일, 김찬숙, 이선규, 심필중, 박윤식, 손화중의 기포장이었던 최서중 등 20명은 체포된 즉시 처형됐다.

이규태가 이끄는 관군은 11월 28일 나주에 입성했다. 이규태가 지휘하는 관군은 통위영군 357명이었는데 교도중대 326명이 지원병으로 합류했다. 통위영군과 교도중대는 나주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농민군을 색출하고 가혹하게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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