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녕성 점령한 농민군, 하루 뒤 강진현 공격>

1만여명 농민군, 장흥 사인점 집결 강진현 진격

병영성 공략하기전 배후 관군세력 제거 위해 강진현 먼저 공격

장흥~병영성간 계곡 협소해 관군 기습시 농민군 피해도 고려
 

강진 지도
1872년에 제작된 <지방지도>. 강진은 조선 태종 17년(1417) 이전까지 강진이라는 고을은 없었다. 강진(康津)은 1417년(태종 17)에 영암군에 속하던 도강현(道康縣)과 장흥부에 속하던 탐진현((耽津縣)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만든 지명이다. <세종실록 지리지L>에 의하면 당시 호수는 355호, 성인남자의 수는 1천644명이었다. 1914년에 현재와 같은 강진의 윤곽이 잡혔으며 1936년에는 강진면이 읍으로 승격돼 1읍 8면이 됐다.
사인점
장흥과 강진 경계에 있는 사인점. 동학농민군은 장녕성(장흥성)을 함락시킨 후 사인점에 집결해 강진 공격을 준비했다. 사인점에 있는 사인정.
강영석씨
강영석씨는 강진군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다산기념사업회회장을 맡고 있다. 강진지역의 향토사 발굴및 정리에 공을 쏟고 있다.
강진읍 전경
강진읍 보은산에서 바라본 강진읍 전경. 멀리 강진만이 보인다. 강진은 해산물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진 곳이다. 풍요로웠던 만큼 관리들의 수탈도 심했다. 조선 말 강진의 동학세는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허물어진 강진성의 흔적
강진읍성은 동학농민혁명때 허물어져 버렸다. 총 둘레가 3천400m, 너비가 2.5m, 높이가 3~4m에 달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읍성이 있었던 보은산 등산로 곳곳에서 무너져 내려있는 읍성의 돌무더기를 쉽게 볼 수 있다.

■ 강진

강진의 동학유적지 답사에 동행해준 이는 강영석씨다. 강진군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다산기념사업회회장을 맡고 있다. 선생은 군자리와 병영, 강진읍 성을 함께 다니며 강진의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과 유적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강진은 동학세가 강했던 장흥과 인접한 지역이라 동학교도들이 많았다. 강진지역의 동학교도들은 장흥의 동학도들과 함께 1892년의 삼례집회와 1893년의 광화문복합상소, 같은 해 3~4월의 보은·금구집회에 같이 참가할 정도로 유대관계가 깊었다.

전봉준의 부대와 함께 전주성을 공격했던 강진의 농민군들은 전주화약 이후 강진에 돌아와 도소를 설치하고 온 농민군들은 폐정개혁활동에 들어갔다. 1894년 6월께 장흥 지역의 농민군은 7천여 명, 강진지역은 칠량(七良), 대구(大口), 도암(道岩), 군동(郡東), 작천(鵲川), 병영(兵營) 등을 합쳐 3천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 농민군은 강진군청 자리에 있었던 관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속인전(俗人錢)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거두기도 했다. 박기현의‘일사’에는 6월 중순 ‘병영(兵營)에도 도소가 설치됐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강진 지역 집강소는 수성군들이 수성소를 설치하면서 사실상 폐쇄됐다.

강진군에는 이렇다 할 동학혁명 유적지가 남아있지 않다. 동학농민군과 수성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강진성터와 병영성, 그리고 수성군이 있었던 강진관아(현 강진군청), 오남 김한섭의 묘갈명 등이 동학혁명 유적지랄 수 있다.

장흥을 함락시킨 동학농민군은 12월 6일 오전에 벽사역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동학농민군은 벽사역 뒤 언덕에서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쯤에 장흥과 강진병영 접경지역인 사인정(舍人亭·현 장흥읍 송암리) 앞들로 이동했다. 농민군 주력부대는 장녕성 승전소식을 듣고 각 지역에서 몰려든 다른 농민군들과 사인정에서 합류했다.

농민군들은 저녁 무렵에 강진으로 출발했다. 농민군은 2개부대로 갈라졌다. 1개 부대는 강진으로 향하고 나머지 1개 부대는 병영으로 진격했다.

위의환 선생은 “동학농민군이 사인점에서 곧 바로 병영성을 공격하지 않고 강진현으로 진격한 것은 탁월한 전략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그 첫 번째 이유로 농민군이 관군을 상대하기가 병영성보다는 강진현이 쉽다는 점을 들고 있다.

두 번째로는 사인정에서 병영성으로 가는 길은 금강천을 따라 양쪽에 협곡이 있어 평원이 좁은 관계로 외길을 따라 많은 농민군이 진군 하기가 매우 비좁아 매복이라도 걸리면 많은 희생을 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위 선생은 농민군이 강진현을 공격한 시간을 7일 오전 7시~9시 사이로 보고 있다. 병영성의 병사의 보고(巳時)와 강진현의 현감의 보고(辰時)가 다르지만 아마 늦은 진시(辰時· 오전 7시~9시)가 맞을 것이다.

이규태 진영에서 작성한 강진현 함락에 관한 기록은 12월 9일조의 <선봉진일기>와 12월 12일조의 <선무사정보첩>, 12월 초 9일조, 12월 초 10일조, 12월 12일조의 <순무선봉진등록>에 있다. 모두 비슷한 내용이기에 12월 12일조의 <순무사정보첩>의 기록을 소개한다.

“12월 초 7일에 발송하여 초 9일에 도착한 강진병영(康津兵營)의 보고문에 [동학농민군은] 초 6일 사시(巳時·오전 9~11시) 경에 벽사역(碧沙驛)의 뒤쪽 고개로 이동하여 진을 치더니 미시(未時·오후 1시~3시) 경에는 다시 장흥·강진 본영의 접경지인 사인점(舍人店) 앞들로 이동하니 본영과 10여 리에 불과합니다. 저들의 흉측한 말이 낭자하게 선전되어 동쪽에서 소리치고 서쪽을 공격하여 과연 예측하기가 어려우므로 미약한 군사로는 방어할 대책이 없어 위급한 화가 경각에 닥쳐옴에 어찌 황급하게 보고하지 않겠습니까? 장흥부사가 피살됨에 관인과 부절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고 공형들도 함께 죽어 일을 집행할 사람이 없고 온 성 안은 텅 비어 공문이 계류되고 있는 것을 무어라 책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일 한시라도 급히 저들과 상대할 군사가 없으면 본영을 잃는 환란도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귀 군영에서는 특별히 속히 지원하여 한 영(營)을 보전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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