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인환· 구교철 동학농민군의 흥양성 공격(?)

회령진 점령후 동학연합군 흥양성(고흥) 공격한 듯
(30) 이인환· 구교철 동학농민군의 흥양성 공격(?)
12월1일 장평 사창 집결까지 나흘동안 활동기록없어
관군에 체포된 장흥농민군이 흥양 인부와 병부 은닉
위의환씨, 보성경계집결 농민군 흥양공격 가능성 제기
 

▲ 회령진에서 바라본 장흥 관산회령진 앞 바다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농지로 변했다. 왼쪽 둥그런 모습의 조형물은 이충무공의 달량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탑이다. 회령진 동측 성벽 아래쪽에는 회령진성 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인환 대접주는 1984년 음력 11월 25일 대흥면에서 출정기포한 후 회진의 회령진성에 무혈 입성한다. 회령진성에는 조선수군이 사용할 무기와 식량이 보관돼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농민군의 사기는 높아졌고 실제 전력도 크게 증강됐다.

회령진을 점령 한 뒤 동학농민군은 장흥·강진 병영의 관군과 보성의 민병들과 산발적인 전투를 치렀다. 숫적으로 우세한 농민군은 관군들의 공격을 모두 가볍게 물리쳤다.

그런데 각종 기록을 살펴보면 동학농민군들의 움직임에 공백이 있다. 농민군은 음력 11월 26일 회령진을 점령한 뒤 12월 1일 장평 사창으로 집결했다. 대규모로 집결해 있던 농민군이 11월 27부터 11월 30일까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장흥의 향토사학자이자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있어 대단한성과를 올리고 있는 위의환 선생은 이인환 농민군이 11월 27일에서 30일 사이에 흥양(興陽: 고흥)을 공격했으며 그 경위가 분명치 않지만 흥양현의 인부(印符)와 병부(兵符)를 탈취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위씨는 그 추정의 근거로 흥양현의 가 장흥 농민군 수중에 있었다는 것을 적시하고 있다.흥양현의 인부와 병부가 동학농민군에게 탈취 당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선봉일기>에는 석대들 전투이후 관군이 생포한 동학농민군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장흥과 흥양현의 인부·병부를 장흥의 이인환농민군이 소지하고 있는 정황을 발견하고 농민군들을 심문해 결국 찾아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 회령진 동헌터에서 바라본 회진앞바다회령진 앞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섬이 덕도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덕도의 농민들은 썰물때 드러난 노두길을 통해 회령진으로 진격해왔다.

12월 24일 소모관 백낙중은 12월 24일 웅치접주 김창환(金昌煥)과 남면접주 고응삼(高應三)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장흥부사의 인부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학군의 집에 감춰져 있는 정황을 파악하고 이를 이두황에게 즉각 보고했다.

관군은 농민군 김희도(金希道)를 심문해 장흥과 흥양의 인부가 용계면(부산면) 용반 이정실(李正實)의 집에 숨겨져 있는 사실을 밝혀냈다. 관군은 12월 29일 이정실의 집을 뒤져 장흥과 흥양의 인부를 찾아냈다.

관군은 흥양의 인부를 곧바로 돌려주도록 조치했다. 흥양의 인부가 한 달 동안 이인환농민군의 수중에 있었다는 것은 곧 장흥농민군이 흥양성을 점령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농민군이 흥양성을 공격했으며 흥양성이 점령당했다는 공식기록은 전혀 없다.
 

▲ 회령진 동헌터.회령진 동헌 터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다. 한 눈에 회진앞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장소다. 동학군들은 회령진을 점령 한뒤 흥양을 공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장흥농민군의 흥양성 점령’은 ‘장흥농민군이 흥양성 인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 ‘추론’(推論)이다. 그러나 매우 가능성이 높다. <우선봉일기>에는 이 병부와 인부를 찾아낸 사람에게 백미 2석의 포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 흥양현에서 병부와 인부를 잘 수령했다는 보고를 이두황에게 올린 기록도 남겨져 있다. 흥향현의 인부와 병부가 장흥농민군에게 탈취당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정황을 들어 위의환씨는 11월 26일 회령진을 점령한 뒤 장흥동학군들이 곧바로 흥양성을 공격하고 11월 30일쯤에 돌아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위씨는 황현의 <오하기문>에 “(장흥 관군들이)11월 30일 보성경계에까지 농민군을 추격하였으나 발견하지 못해 군대의 추격을 멈추고 돌아왔다”는 내용도 농민군의 흥양성으로의 이동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이방언접주는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을 수습해 나주·광주 전투 등에 참여한 후 장흥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오하기문>에서는 11월 26일 이방언 장군이 이인환, 이사경. 구교철 등과 회령진을 점거하였다고 기록돼 있지만 이는 잘못된 기록인 듯싶다.

장흥유생들이 남긴 <영회단>에는 당시 이방언접주는 장흥지역에 있지 않았다. 이방언접주는 나주, 광주, 화순, 동복 등에서 패배한 잔류부대를 수습해 12월 1일쯤 장평 사창에서 이인환부대와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 회령진과 덕도를 잇는 농로. 과거 이 길은 썰물때 회령진과 덕도를 오가는 노두길 이었다. 간척이후 바다가 농경지로 변했고 노두길은 농로가 됐다.

여기에 전봉준 장군이 북진하는 과정에서 관군들이 장흥지역 농민군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으로 내려 보낸 김방서 휘하의 구원부대가 장평 농민군 부대에 합쳐지면서 장흥집결 농민군은 대군(大軍)을 이루게 된다. 농민군들은 12월 3일 장흥부 공격을 위해 장흥읍 평화와 건산 후등, 벽사역 뒤 평원, 행원 일대에 진을 쳤다.

■인부(印符):관인(官印)으로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認證)이 필요한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으로 청인(廳印: 관공서를 나타내는 도장)과 직인(職印: 직무상 쓰는 도장으로 직위 명칭에 ‘인’ 자를 붙인다.)이 있다. 도장이나 관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는 인신(印信)이라고 한다.

■병부(兵符): 조선시대 때 군대를 동원하는 표식으로 쓰이던 둥글납작한 나무패를 말한다. 한 면에 “발병(發兵)”이란 두 글자를 쓰고 또 다른 한 면에 관찰사(觀察使), 절도사(節度使) 부사(府使) 등의 이름을 기록(記錄)한 다음 가운데를 쪼개어 오른쪽은 그 책임자에게 주고, 왼쪽은 임금이 가지고 있다가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을 때, 임금이 교서와 함께 그 한 쪽을 내리면, 지방관(地方官)은 두 쪽을 맞춰보아 서로 맞으면 군대를 동원하여 주는 표식을 말한다.

이인환(李仁煥) 대접주는 누구인가?

약재상하며 동학전파, 대흥일대 농민군 핵심지도자
화약 잘 다뤄 군관출신 가능성… 나주 압송돼 처형
 

이인환(李仁煥) 대흥대접주는 장흥에 많이 거주하고 있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집안 인물이다. 천도교 장흥교구에서 일제 시대에 제작한 <갑오동학혁명혈사>에는 이인환대접주가 나주군 남평면에서 출생한 인물이나 가족은 물론 처가의 식구까지 장흥으로 데려와  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출신은 무기와 화약을 잘 다루었고 병법(兵法)이 탁월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환씨는 이런 구전을 토대로 해 이의환대접주가 회진 만호진(萬戶鎭)의 군관 출신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또 생약초 등의 약재상을 하면서 했다는 구전을 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동학을 전했을 것이라 여기고 있다.

 이인환 대접주는 대흥 일대 동학농민군을 결집시켜 장흥 관군들을 견제했다. 이방언 대접주가 전봉준 주력부대와 함께 북상할 때 목포 방면으로 상륙할지 모르는 일본군의 후방공격에 대비해 동학군들의 배후를 지켰다. 1984년 11월 25일 기포한 뒤 장흥, 강진, 병영성 공격에 앞장섰다.

 그는 석대들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조일연합군에 패배한 후 천관산 동굴에 숨어 있다가 체포됐다. 나주 감영으로 옮겨져 장흥출신의 최신동(崔神童), 문공진(文公辰), 이득춘(李得春)등 8명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1895년 3월 3일 처형당했다. 나주영문의 토굴감옥이 있던 현재의 남고문 앞 일대가 처형장소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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