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장흥 유치 조양촌 전투)

(43 장흥 유치 조양촌 전투<上>)

장흥 농민군, 유치 조양촌에서 일본군 급습

文씨 종가(宗家) 집에서 아침 식사하던 朝日연합군에 피해 입혀

日軍 제19대대 3중대와 官軍 교도중대 타격입고 영암으로 후퇴

조양촌은 유치 대접주 문남택의 본거지, 일군 화풀이로 집 불살라
 

석대들 전투 상상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석대들 전투 상상도. 조연희 화백의 작품이다.

■조양촌전투

장흥 사학자 위의환씨는 조일연합군(朝日聯合軍)이 장흥으로 진입하기 전 장흥 유치 조양촌(朝陽村)에서 동학농민군과 조일연합군 간의 전투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조양촌 전투의 특징은 장흥농민군이 일본과 관군을 습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다.

조양촌 전투는 장흥 일대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조일연합군 간의 전투이기도 하다. 조일연합군은 1984년(음력)12월 12일 오후 장흥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날 저녁 조일연합군은 건산리(모정등)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인다. 조양촌 전투는 이보다 빨리 12일 아침에 벌어졌다.

장흥농민군은 나주에서 장흥으로 진격하는 조일연합군을 막아내기 위해 유치면 조양촌에 농민군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유치면 조양촌은 나주성에서 직선거리로 장흥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나주시 세지면 동창을 넘으면 영암군 금정면이고 이곳을 넘으면 바로 유치면 조양촌(현 조양리·신풍일대)이다.

장흥에서 조일연합군과의 첫 전투는 장흥읍이 아닌 유치면 조양촌에서 벌어진다. 1894년 (음력) 12월 12일 일본군 제19대대 3중대와 이 부대를 수행하던 경군교도중대 일부 병력이 조양촌에서 아침식사를 하다가 농민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해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조선전도(朝鮮全圖)
일본군이 조선의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때 사용한 조선전도.

그러나 조양촌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이는 조양촌 전투에 관한 일본군과 관군의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조양촌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본군의 기록은 모두 10字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10자는 일본군이 작성한 ‘전투상보’에 있는 것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일본군 토벌대장이 일본 공사에게 제출한 “각지 전투상보 및 동학당정토책 실시보고서 송부의 건”에는 조양촌 전투상보가 포함돼 있다.상당한 규모의 전투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과 동학농민군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술이 없다.

일본군의 문서인 <19대대 숙박표> 12월 12일字에는 ‘支2 朝陽(戰)’이라는 기록이 있다. <각지 전투상보 및 동학당정토책 실시보고서 송부의 건>에는 ‘朝陽村부근’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위의환 선생은 “일본군은 진을 치고 체류한 곳은 체(滯)로 표시하고, 전투를 한 곳은 전(戰)이라 표시하며, 행군한 곳은 그냥 지명만을 표시했던 만큼 유치면 조양촌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강조한다. 일본군 기록에 어떤 전과나 피해사실이 적혀져 있지 않아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흥 북문
일본군과 관군들은 나주~유치~보림사 길을 통해 장흥읍으로 진격해왔다. 가운데 산 능선이 장흥성(장녕성) 북문이 있던 곳이다.

위 선생은 일본군에 의해 전투상보가 작성될 정도였으면 조양촌 전투가 상당히 치열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위 선생은 그 근거로 조양촌 전투를 치렀을 ‘支2’(위 선생은 제19대대 3중대로 해석)병력이 장흥전투 기간인 1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어떤 전투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고 있다.

‘支2’는 17일 대흥면에서 농민군을 소탕한 2중대를 의미하는데 위 선생은 조양촌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3중대가 2중대로 편입됐기에 ‘支2’라는 표기가 이뤄졌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즉 장흥전투 이후에 전투상보를 작성하면서 편제가 없어진 3중대 대신 2중대를 대신 기입(記入)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조양촌 전투에서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제19대대 3중대였던 것이 분명하다. 3중대를 지원하던 관군 교도중대도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당초 예정대로라면 이 3중대가 가장 먼저 장흥에 진입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농민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해 피해가 발생하자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영암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진입이 늦어졌다.

이런 이유로 장흥읍에는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 중위가 지휘하는 제19대대 본부 소속 부대가 가장 먼저 들어온다. 이 부대는 나주~영암군 금정면 세류리·쌍효리·청룡리~암천계곡(암챙이 골짜기)~보림사를 거쳐 12일 오후에 장흥읍에 도착한다. 이 부대가 건산에 진치고 있던 일부 농민군과 장흥읍에서 12일 저녁 최초의 전투를 벌인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그러나 조양촌 전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헤아려볼 수 있는 실마리가 1992년 12월에 간행된 <유치면지>에 담겨져 있다. <유치면지> 119~120쪽과 580~581쪽, 591쪽, 611쪽 등에는 유치면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촌로들의 증언이 기록돼 있다. 이 기록들은 당시 유치면이 목포대학교 인류학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의 구전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다.

<유치면지>에 실린 증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유치면 조양촌 일대(조양1구 2구, 신풍1구)가 유치면 동학의 근거지였다는 것이다. 또 조양촌 문씨 종가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피해를 입은 일본군들이 분풀이로 종가 집을 불태워버렸다는 사실이다.

조양촌 전투는 장흥에 진입한 조일연합군과 농민군들 사이의 최초 전투였다는 점과 농민군들이 기습작전을 펼쳐 타격을 입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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