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끌려가 티니안 섬에서 혹사당한 조선 처녀들

106년만에 공개된 심남일(沈南一) 의병장의 ‘湖南義將’(호남의장) 인영

심남일 의병 인장은 서신·연락에 사용되던 신표(信標)

전남 동서부 지역 의병부대에 문서 보낼 때 사용한 듯

광주공원에 심남일의병장순절비 자주 찾아 뜻 기려야
 

일제의 의해 체포된 의병장들
1909년 일제가 벌인 ‘남한대토벌’작전 때 붙잡힌 의병장들. 뒷줄 좌측에서 네 번째가 심남일 의병장이다.
일본인들의 장흥재향군인회 회원발회식(大正6年春 長興在鄕軍人會 會員發會式)
1918년 장흥에 거주했던 일제 헌병과 경찰, 그리고 군 관계자들이 모여 모임을 갖고 찍은 사진. 심남일 의병장 인영 사진 역시 이들 중 한명이 보관하고 있다가 고 박진옥씨에게 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제 헌병과 경찰은 심남일 의병장 체포에 혈안이 돼 있었다.
영산포헌병대장흥분견대
일제는 1905년에 장흥에 헌병대를 설치하고 항일독립지사들에 대한 색출, 검거를 실시했다. 영산포헌병분견대는 심남일 의병장을 체포하는데 주력했다. 심남일 부대는 장흥에서도 수차례 일본 헌병, 경찰과 전투를 벌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광주공원에 있는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
심남일 의병장은 전해산·안규홍 의병장과 함께 전남의 3대 의병장으로 불린다. 1972년에 광주공원에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가 세워졌다./남성진 기자 nam@namdonews.com
장흥 향토사학자 양기수 선생
양기수<오른쪽> 선생이 최초로 공개한 심남일의병장의 인장 인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 선생은 심남일의병장의 인장이 전남지역 의병부대와 연락을 주고받을때 신표처럼 사용됐을 것이라고 말했다./남성진 기자 nam@namdonews.com

이번에 공개된 심남일(沈南一) 의병장의 인장 인영은 심남일 의병장의 의병활동과 관련된 유일한 유물이다. 이 인영 사진의 출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인영 사진 옆에 있는 글 ‘韓國派遣步2. 12中隊 優竹 大尉之賜 全南暴徒首魁沈南一之使用 印影’에는 일본군 제2보병대대 1중대 유우다케(優竹) 大尉가 누군가에게 선물로 준 것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심남일 의병장 인영은 일제초기 장흥재판소에서 근무했던 박진옥(朴珍玉)씨가 수집해 보관해 왔던 것이다. 박씨는 해방직전에는 산림조합의 경찰로도 근무했다.

심남일 의병장의 인영은 당시 조선의병 진압에 나선 일본군인이나 체포에 동원됐던 헌병이 압수한 인장을 종이에 찍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박진옥씨의 외손자인 향토 사학자 양기수씨에 따르면 1945년 광복 당시 일본으로 도망가던 장흥의 일본인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귀중품과 기념품들을 박씨에게 상당량 건네주었다. 유우다케 대위로부터 받았던 이 인영을 누군가가 박 씨에게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박씨는 지난 1970년 사망했다. 양기수씨는 지난 1988년 외조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심남일 의병장 인영 사진을 발견했다. 양씨는 여러 정황상 광주지역의 영향력 있는 일본인들과 교류가 잦았던 장흥지역 일본인 중 누군가가 일본 군부 혹은 헌병대 관계자들로부터 이 인영사진을 선물로 받아 보관하다가 외조부에게 주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남일 의병장이 사용했던 인장의 ‘湖南義將’(호남의장)은 조선시대 관아의 인부(印符)처럼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문서에 적혀진 명령과 지시가 심남일 의병장의 뜻임을 밝히는 신표(信標)였던 것이다. 전남 동부의 안규홍 의병부대와 서부지역의 전해산 의병부대와 긴밀히 연락할 때 서신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8~9년 사이 전남 중남부 지역에서 맹위를 떨치던 의병부대였다. 수십차례의 일본군·헌병과 전투를 치르면서 수십명을 사살하고 수백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일제는 심남일 의병장 등 남도지역 의병장들을 체포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908년 10월 영산포헌병분대는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정찰대를 발족시켜 의병장들의 뒤를 쫓았다.

그 해 12월에는 영산포헌병분대장의 지휘를 받은 8개 부대와 광주수비대 3개 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 등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기도 했다. 일제의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 거세지자 호남지역 10여명의 의병장들은 잠시 의병을 해산키로 하고 몸을 피하기로 했다. 그러나 심남일 의병장은 1909년 10월 9일 능주의 풍재바위굴 속에서 일본헌병에 체포된다.

일제는 심남일 의병장을 체포하자 그 이튿날인 10월 10일에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종결지었다. 그만큼 심남일의병장의 활약이 대단했던 것이다. 심 의병장은 9월 2일 광주교도소로 옮겨져 모진 고문을 받다가 대구 감옥으로 이감된다. 결국 다음해인 1910년 10월 4일 처형당하고 만다. 광주공원노인복지관 앞에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정부는 고인의 장한 뜻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조선여자사진’의 존재를 알려준 사이판 미국평화공원 직원
카일 포드지웨스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마리나 제도에 살던 조선인(한국인)들에 관한 자료를 성실히 알려줬다. 그의 협조로 티니안 역사책에 있는 조선인농부가족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티니안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
일본은 1914년 연합군으로부터 태평양 섬에 대한 위임통치 권한을 받은 뒤 섬들을 식민지보급기지로 키웠다. 일본은 1920년대부터 오키나와 원주민과 조선인 징용자, 현지 차모르인들을 동원, 티니안과 사이판 등 섬에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3천㎞ 끌려가 티니안 섬에서 혹사당한 조선 처녀들 

현지 공식문서에는 조선인 정신대·위안부 존재 없어

원주민 노인들 “나이 어린 조선여자들이 많이 살았다”
 

티니안 섬은 북마리아나제도에 속해 있는 섬이다. 일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부터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할 때까지 중서태평양지역을 통치했다. 사이판을 포함해 티니안과 로타가 있는 북마리아나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 마셜제도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일본은 태평양 섬들을 군사기지와 군수물자 보급기지로 삼았다.

티니안 섬 사탕수수 밭에 조선인 여자들이 서 있는 사진은 일본인들이 찍은 것이다. 촬영연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역사학자 돈 패럴이 다른 사진을 설명하면서 “사탕수수 밭을 갈기 위해 미국에서 만든 캐터필러 불도저와 오키나와 원주민, 오키나와 조랑말들이 티니안에 들어올 때 조선인들도 같이 들어왔다”고 쓴 글을 참조하면 ’조선인 가족‘들은 1930년대 후반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면 불도저는 미국에서 1923년 처음으로 개발됐으며 사이판과 티니안 등지에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사용됐기 때문이다. 일제는 1932년 정신대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1938년 본격적으로 조선과 중국 여인들을 강제로 동원해 군수공장 근로자와 위안부로 삼았다. 따라서 이 사진속의 여인들은 일제에게 끌려와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 사이, 티니안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조선인들로 보인다.

돈 패럴이 사진 속 조선소녀들을 정신대나 위안부로 끌려왔던 소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일본인들의 사진설명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제가 조선처녀들을 징발해 일본 군부대 일대로 보낼 당시 티니안에 조선인 가족 전체가 농사를 짓기 위해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제는 강제로 끌고 온 여성들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조선인농부가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다.

당시 티니안에 몇 명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1935년 당시 티니안 섬에는 일본인 1만4천108명과 조선인, 차모르인, 캐롤리니안들이 살고 있었다. 1945년 미군이 티니안 섬 인근의 사이판 섬을 점령하면서 파악한 조선인의 수가 1천300명에 달한 만큼 사이판에서 5㎞쯤 떨어져 있는 티니안 섬에도 그 정도의 조선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200만명에 달하는 조선 청년과 소녀들을 군대와 군수공장 등으로 끌고 갔다. 조선청년들은 탄광에서 혹사당했다. 군대로 끌려간 이들은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됐다. 남태평양 군도에서 벌어진 미군과의 전투에서 수천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인다. 소녀들은 만주와 인도차이나 반도, 그리고 북마리아나, 캐롤리니아, 솔로몬 제도 등 태평양 섬으로 끌려가 정신대로, 혹은 위안부로 지내면서 참혹한 세월을 보냈다.

티니언 섬의 노인 중에는 “전쟁(제2차 세계대전) 때 나이어린 한국여자들이 티니언에 많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어렸을 때 “한국여자들이 (일본군인들에게) 성을 팔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현지의 어떤 공식문서에도 ‘조선여자들이 끌려와 위안부로 일했다’는 기록은 없다.

일본 정부가 남태평양 섬 자치정부에 상당한 원조를 하면서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간접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피해자들의 증언이 없는 것도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원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대와 위안부 문제를 이대로 덮어둘 수는 없다. 일본의 만행을 제대로 알아야 일본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다. 그래야 일본의 간계에 속지 않고 이 나라를 건강하게 지킬 수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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