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떠돌고 있는 진도동학농민군 유골

<61회, 진도동학농민혁명의 재발견(나)>

120년 떠돌고 있는 진도동학농민군 유골

1909년 日 농업기사 사토 마사지로 진도에서 수집해 가져가

1995년 북해도大 표본고에서 다른 유골 5점과 함께 발견돼

1996년 한국 봉환 후 20년 넘게 전주박물관수장고에 보관
 

지난해 12월에 열린 진도동학과 동학지도자 유골에 대한 학술대회.

◆일본에서 발견된 진도동학지도자 해골문제

해골의 발견과 화장저지

1995년 7월25일 일본 북해도대학 후루카와 강당 인류학 구표본고에서 아이누계 청소부가 6개의 해골이 신문지에 싸여 들어있는 종이상자를 발견했다. 그 가운데 1개에 채집자의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다. 또 해골 표면에는 ‘조선 동학당 수괴의 수급, 사토마사지로로부터’ 라는 붓글씨가 남아 있다.

이 사실은 구표본고 청소원으로 고용된 아이누족으로부터 제보를 받은 아이누 민족 인권운동단체인 ‘아이누 민족에 관한 인권개발 사진 판넬전 실행위원회’ 대표 야마모토 카즈아키가 일본의 3대 일간지의 하나인 마이니치 신문에 제보함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일본 북해도 대학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유골. /KBS사진자료

촉루(해골) 명치39년(1906년) 9월20일 진도에서

명치27년(1894년) 한국 동학당 봉기가 있었다. 전라남도 진도는 그들이 가장 창궐했던 곳이었는데, 그들을 평정하고 돌아올 무렵에 그 수창자 수 백 명을 죽여서 시체가 길을 가로막고 있을 정도였다. 수괴자는 효수하였는데 이 촉루는 그 가운데 하나로 그 섬을 시찰할 때 채집한 것이다.

佐藤政次郞(사토 마사지로)

해골에 붙어있는 메모지의 내용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간단하다.

1909년 9월20일 진도를 출장한 일본 한국통감부 권업모범장 목포출장소 기사 사토마사지로( 佐藤政次郞)가 진도면 채종포에 왔을 때 ‘채집’한 해골이다. 즉 어떤 목적이었든 이 해골을 의도적으로 가져갔다는 뜻이다.

1894년 동학봉기가 있었을 때 진도는 동학교세가 가장 창궐했던 곳이었다는 표현은 과장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일면 진도가 의외로 격심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해도대학에서 발견된 해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이처럼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도 없을성 싶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진도 이동진 군수가 지난해 4월13일 전북 전주시를 방문해 진도동학군 유골반환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뉴시스

▶그는 사망 당시 30∼40대 남자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싸우다가 붙잡혀 그의 머리가 진도읍 솔개재에 효수되었다.

▶효수 12년 뒤인 1906년 9월20일 한 일본인이 그 해골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1995년 7월25일 해골이 일본에 간지 90년 만에 북해도대학에서 발견되었다.

▶1996년 5월30일 한국으로 봉환되어 이튿날 전주시 덕진공원에서 환영식이 거행되었다.

▶고국봉환 20년이 흘렀는데 잠들지 못하고 전주박물관 수장고에 갇혀있다.

▶전주 측은 유전자검사를 마치지 않은 채로 해골을 화장하여 매장할 계획이다.

▶자식이 없는 그이는 유전자자료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질 운명이다.

유골 방치 사건이 1995년 8월3일자 마이니치 조간에 특종 보도되면서 후루카와 강당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홋가이도 대학 문학부는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유골이 발견된 직후 ‘후루카와 강당 구표본고 인골문제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한국 진도동학농민군 유골을 포함한 6구의 두개골이 홋가이도 대학으로 반입되게 된 경위 조사를 포함한 진상규명에 착수한 것이다.

6구의 두개골 가운데 동학농민군 유골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8월4일이었다. 한겨레신문 등의 보도를 통해 농민군유골 방치 사건 소식을 접한 국내에서도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다. 정부의 외교통상부를 비롯하여 한승헌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재중 천도교중앙총부 교령, 박주언 등 유골조사자문위원들이 홋가이도 대학 문학부 앞으로 공문을 발송하여 진상규명 및 농민군 유골의 국내 봉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유골 방치 사건이 알려진 직후 일본 국내외로부터 동 사건의 정확한 진상규명 및 유골 봉환 등의 압력을 받은 홋가이도 대학 조사위원회는 전남 진도와 목포를 포함한 한국 현지 조사 결과를 정리해 1996년 4월에 ‘후루카와 강당 구표본고 인골문제조사위원회 중간보고서’라는 이름으로 공표했다.

홋가이도 대학 측은 유골이 전남 진도출신 농민군지도자의 것임을 최종 확인하고 1996년 5월 30일 유골을 한국으로 봉환했다. 전주 덕진종합운동장에서 거행된 진도동학군지도자 유골봉환기념식에 진도에서 김문준 진도군번영회장, 박주언 유골조사자문위원 등이 참석했다.

한편 일본 북해도대학 해골발견사건 이후 북해도 아이누족들은 ‘진도평화제’에 참가하여 동학관련 사망자들에 대한 아이누식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또 2013년 10월 25일 마에다 겐지(前田憲二, 77세) 다큐영화감독과 촬영팀 일행이 진도에 도착하여 조도면 창유리 박중진(朴仲辰) 생가와 후손들을 찾았다.

그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과 1950년 한국전쟁 등이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야기된 일본의 대륙진출에 따른 결과로 보고 있었다. 마에다 감독은 동학의 역사성을 다시 짚고 가자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 나름의 시각과 소신으로 한일간 역사를 재조명하는 양식 있는 일본사람이다.
 

진도에서 일본으로 유골을 가져간 사토 마사지로.

풍신수길을 주제로 한 ‘월하의 침략자’ 전시의 만행을 지적하는 ‘이총(耳塚)’, ‘강강술래’ 등을 제작할 때 많은 한국사람들이 협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이와 함께 일하는 촬영팀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모인 일본사람들이다. 마에다 감독은 일본에서 본 어떤 기록에는 진도에 동학혁명군이 1만∼2만명 들어왔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많은 한국사람들은 동학의 역사적 중요성에 비추어 잘 알지 못하고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다.

/글 박주언·정리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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