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65.쌍산의소(雙山義所)와 화순의병(和順義兵)

나라위한 붉은 마음 그대로 남아있는 화순 쌍산

쌍산(계당산)과 증동마을에 의병 숙영지·유적 존재

야철소·유황굴·무기제작소·방어용 성벽 등 유적 많아

화순의병 진을 쳤던 의로운 곳이라 하여 쌍산의소

양회일의병장·임상영 등 일제와 싸우다 장렬히 순국

계당산에서 내려다본 쌍산의소 의병주둔지
■계당산과 화순 의병

지금이야 교통사정이 좋아져서 오가기가 편해졌지만 전남 화순 능주와 이양은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오지에 속했던 곳이다. 이양에는 호남정맥의 한 줄기가 뻗어 나와 비교적 깊은 산을 이루고 있다. 계당산(桂堂山)이다. 높이는 581m다. 계당산은 이양면 증리와 보성군 복내면 계산리에 걸쳐 있다. 영산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이다. 정상에서는 조계산과 주암호 등을 볼 수 있다.

계당산은 그 품이 넓어 산을 넘기가 만만치 않다. 굳이 복내 쪽에서 산을 타서 건너편 쌍봉사로 가고자 하면 반나절 발품은 내놓아야할 산세다. 직선거리는 별로 되지 않지만 험한 산이라 산길을 구불구불 걸어야하니 시간이 꽤 걸린다. 58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옥리 쪽에서 계당산에 오르는 임도가 나있어 차를 타고도 종단이 가능하다. 쌍봉사까지 4Km정도 인데 시간은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계당산은 쉽게 갈 수 있는 산이 아니다. 사람들은 계당산 자락에 위치한 쌍봉사를 찾기 위해 계당산 언저리에 모습을 드러낼 뿐, 정작 계당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계당산은 우리가 자주 찾아야 하는 산이다.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우리 조상들의 뜨거운 숨결과 급박했던 발길이 여기저기 남아있기 때문이다. 계당산에는 구한말 의병 유적지인 쌍산의소가 자리하고 있다.

쌍산의소 안내표지판(낮달제공)
■화순 쌍산의소(雙山義所)

계당산은 예부터 그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는 쌍산이라고 불린다. 쌍산의소는 쌍산에 있는 의로운 장소(義所)를 뜻한다. 구한말 쌍산을 중심으로 해 활동하던 의병들과 관련된 유적들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쌍산의소의 ‘유적’들은 의병들이 머물던 막사와 철을 부려 무기를 제작하던 야철소, 무기제작소, 유황을 보관하던 동굴 등이다. 의병들이 방어용으로 쌓았던 석축도 남아있다.

한마디로 쌍산의병들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본부였던 것이다. 이 의병진(義兵陣) 시설들은 계당산 정상부근 3천여 평에 흩어져 있다. 쌍산의소 의병들은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마을을 중심으로 해 일어나 1906년 음력 10월부터 다음해 음력 3월까지 활동했던 의병들이다. 의병장 양회일(梁會一)을 중심으로 임창모(林昌模)·안찬재(安贊在)·이백래(李白來)·임노복(林魯福)·임상영(林相永) 등이 주축이 됐다.

이들은 능주(綾州)와 화순 관아를 공격하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도마치(刀摩峙) 전투에서 패하고 의병지도자 대부분이 체포돼 지도(智島)에 유배됐다. 이후 풀려나 다시 활동을 재개했는데 임창모·안찬재·이백래·안규홍(安圭洪) 의병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임창모 부자와 안찬재 등은 1909년 증동(甑洞)·묵석동(墨石洞)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쌍산의소 의병 막사터
쌍산의병들은 증리 증동(甑洞)마을과 뒷산 계당산 서쪽 기슭에 의병촌을 구축했다. 쌍산의소 항일유적지에는 무기제작소와 유황굴, 의병막사 터 및 방어시설로 보이는 의병성(義兵城)등이 남아 있다. 증동마을 뒤편 골짜기에는 쇠를 녹이고 부렸던 야철로(冶鐵爐)의 벽채와 쇠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다. 의병들은 이곳에서 4km 떨어진 보성군 복내면 철광산에서 철광석을 운반해온 것으로 보인다.

의병성과 막사터
계당산 동쪽 기슭에는 방어시설인 의병성과 의병들이 생활했던 막사의 터가 자리하고 있다. 의병성은 높이 80㎝ 내외로 왜경들과 전투 시 엄폐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쌓아올린 석축(돌담)이다. 낮은 돌담 안쪽으로는 둥그렇게 혹은 마름모 꼴로 놓여진 돌들이 보이는데 이는 막사 기둥들을 받치던 돌들이다. 돌담 안쪽으로는 제법 넓은 공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의병들이 훈련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황굴 터
쌍산의소에는 구한말 항일의병의 본거지 형태가 잘 보존돼 있다.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항일의병 유적지와 관련 유적들이 이렇게 잘 남아있는 곳은 쌍산의소가 남한에서는 유일한 듯싶다. 쌍산의소는 1994년 1월 3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됐다. 이후 한말의병의 실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적이어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 2007년 8월, 사적 485호로 지정됐다.

쌍산의소 대장간터 기념석
■의병장 양회일, 의병을 모으다

의병장 양회일에 관한 문헌으로 <행사실기>(杏史實紀)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양회일의 의병활동에 관한 문헌으로 양회일을 추모하는 글들이 함께 실려 있다. 양회일의병장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당시 전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정우원(鄭友源)·정의림(鄭義林)·양회룡(梁會龍)·오진영(吳震泳)·권재규(權載奎)·정기(鄭琦)·김문옥(金文鈺)·고광렬(高光烈) 등이 참여해 1950년 간행됐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널리 유포되지 못했다.

이에 화순의 제주양씨(濟州梁氏) 문중이 1958년에 다시 간행했다. <행사실기>에 따르면 양회일 의병장은 능주 일대에서 명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가산을 털어 의병을 조직, 창의하고자 했다. 그러나 호응 자가 적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양회일은 1906년 겨울(음력 10월 쯤)증동마을의 유력자 임노복을 방문해 도움을 요청했다.

쌍산의병들이 머물던 막사가 있던 자리. 방어용으로 돌담을 쌓았다.
이때 양회일은 임노복이 흔쾌히 이를 받아들이고 주민들이 협조함에 따라 의병들을 모을 수 있었다. 임노복은 양회일에게 쌍산의소의 방략(方略)으로서 첫째 득인(得人), 둘째 병기(兵器), 세째 양도(糧度:군량)를 갖출 것을 제시했다고 한다. 의병수와 무기, 군량을 잘 갖춰야 일경과 싸워 이길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런 제언에 따라 양회일은 의병 주둔지에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야철소와 대장간을 마련했다.

증동마을 임상영은 쌍산의소의 참모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의 아들 임노창은 임영상의 아들로서 양회일과 임노복, 임영상 등이 임노복의 집에서 만나 의거를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해 두었다. 임노창은 당시 14~5세로서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루마리에 간단히 적은 이 기록은 <창의실기>라 하는데 여기에는 의병과 무기들을 모으고, 중동마을 사람들이 양회일을 돕는 과정이 적혀 있다.

‘지난 1906년 겨울 음 10월경 양회일과 양공거는 백설을 무릅쓰고 나의 집을 방문하였다. 양회일은 호남의 유명한 집안이며 가액한 선비이다. 나의 부친 상영은 대대로 검소하고 집안이 당시 증리의 일을 관장하여 한 집안의 번성을 이루었다. 양회일은 여러 날 머물렀는데 임노복에게 요청하였다. (중략)

양회일이 말하기를 “지금 섬나라 오랑캐 이등박문이 난을 일으켜 금수와 날짐승의 발자취가 나라 안에 가득 찼다. 더욱이 인민은 도탄에 빠지고 국가의 일은 날로 잘못되어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다” 임노복이 말하기를 “정말 그렇다. 이는 이른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빈손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묵묵히 생각할 뿐이다. 만약 거사하려면 첫째가 득인, 둘째 병기, 셋째 양도이다. 이 세 가지를 잘 준비해야 한다(중략)

이들은 수백 명의 용사를 불러 모았는데 양회일은 동복 군으로부터 병기 300정을 도모하였으며 임의 지모에 의해 나온 계획이 많았다. 1906년 음 10월부터 1907년 봄 3월까지 병사를 여러 달 길렀다. 정예의 훈련을 하였고 그 사이에 방법과 조절을 유지하였다. 나의 부친이 전신묵 차재문등 제씨를 데려왔으며 모든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성심껏 도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07년 음력 3월초에 행군하였다.‘(임노창 <梁與林魯福倡義實記>,1946)

위내용에 따르면 양회일은 임노복, 임상영등 증동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증등 마을을 의병기지로 삼았다. 그런 다음 1907년 음력 1월 격고 문을 사방에 보내 의병을 본격적으로 모집했다. 또 다른 곳에서 무기를 사들이고, 부족한 무기는 중등마을에서 직접 제작했다. 이때 의병모집과 무기 확보에 도움이 됐던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능주군수 박용훈이 도적을 막는 방도조직(防盜組織)을 적극 후원했으며 총 책임자(都約長)에 양회일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구한말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만큼 도적들이 들끓었다. 그래서 각 마을은 도적을 막는 조직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치안을 지켰다. 양회일은 자신이 방도조직의 도약장이 된 것을 잘 활용했다. 방도조직에 참여했던 능주 지역 청년들을 의병으로 끌어들이고 관에서 지급받은 무기들을 의병 무장에 활용했다. 양회일의병부대 구성원들 중에는 정읍 보성 남원 출신자도 많았으나 주요 구성원들이 능주 출신이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쌍산의소 의병 구성과 활약
순천대 홍영기 교수
순천대 홍영기교수는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사회운동사>중 ‘동학농민혁명과 의병항쟁’편에서 <행사실기>초간본과 <구한국관보>등의 자료를 통해 쌍산의소의 주요구성원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맹주 양회일(거주지 능주)▲부장 신재의(능주)▲선봉장 이광선(이광언:하동)▲중군장 임낙균(보성)▲중군장 안기환▲후군장 노현재(남원)▲후군장 최기표(화순)▲도포장 유병순(정읍)▲총무 양열묵(능주)▲고군장 안찬재(능주)▲고군장 임노복(능주)▲군의 전신묵(순창)▲서기 이병화(능주)▲참모 박중일(능주)▲참모 임영상(능주)▲참모 양수묵(능주)▲모사 박용계(여주)▲모사 이윤선(보성)▲모사 유이삼(정읍)▲모사 유태경(정읍)▲모사 신태환(정읍)▲모사 김대현▲모사 양동묵(능주)▲모사 양수묵(능주)▲모사 임노성(능주)▲모사 정세현(동복)양회일은 가산을 정리해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의병들이 모아지자 각자에게 직책을 부여하고 의병부대로서의 체계를 갖췄다. 이와 함께 의병들이 명심해야할 행동지침인 <서고군중문>(誓告軍中文)을 발표했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천대 홍영기 교수의 글 발췌)

·군자금 3천량은 이미 스스로 준비하였으므로 촌민들을 절대로 침탈하지 말 것.

·기계와 병장기는 지난해 도적 방어 시 관으로부터 지급받은 대포 30문, 소포 50정을 현재 각 마을에서 민포들이 응용하는 중인데 모두 거두어들일 것.

·정정당당한 의병의 바른 이름을 우선시하고 행군 시에는 평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

·선봉장 중군장 후군장 등 제장은 각기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서로 권한을 침해하지 말 것.

·도포 장은 포군을 이끌고 보졸장은 보군을 이끌며 각기 부서를 정하여 위반하지 말 것.

·위의 제 사항은 각기 모두 준수하고 위반하지 말 것, 만약 위반하면 군율로 처단한다.

쌍산의소의 의병들은 1907년 양력 4월말부터 행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먼저 능주와 화순을 공격했다. 능주와 화순은 관아소재지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우편소와 상가가 있었다. 당시 우편소는 일경들의 주요 통신망으로 일제는 우편소를 통해 의병진압계획을 신속하게 전달했었다. 그래서 전주는 파괴하고 전선은 잘라버렸다. 그리고 일제의 지시를 받는 관아와 경무서를 공격해 무기는 노획했으며 문서들은 불태웠다.

쌍산의소 의병들은 능주와 화순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광주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일경들의 반격에 밀려 다수가 죽거나 다치는 피해를 입었다. 의병장 양회일과 주요 간부 6명이 체포됐다. 나머지 의병들은 다른 의병부대로 들어가 의병투쟁을 계속했다. 일부는 쌍산의소 의병활동이 실패도 돌아가자 은거하기도 했다.

양회일의병장등 체포된 의병들은 1907년 지도에 유배됐다가 같은 해 12월 순종의 특사로 석방됐다. 양회일 등은 쌍산의소 재기를 위해 은밀히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던 중 1908년 음력 5월에 의병혐의로 강진헌병대에 체포됐다. 양회일의병장은 수일간 구금됐다가 풀려났으나 음력 6월 장흥헌병대로 다시 끌려갔다.

1909년 헌병장흥분견소 사진. 일제는 동학농민군의 저항이 거셌던 장흥에 영산포헌병ㅂ분견대를 설치하고 항일의병들을 진압했다. /양기수씨제공
양회일의병장은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일제의 고문에 맞서 7일간 단식하다가 순절했다. 양회일 의병장은 일본 군경에게 고문을 받으면서도 “내가 비록 죽는다 해도 천하의 의사(義士)들을 너희가 모조리 죽일 수 있겠느냐!” 호통을 쳤다고 전해진다. 해방 직후에 건립된 양회일 의병장 순의비는 쌍봉마을 진입로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비문은 한말의 대표적인 학자인 김영한이 찬술했다. 최근에 새로 건립된 비는 쌍봉마을 어귀에, 그리고 묘소는 쌍봉마을 앞산에 위치하고 있다.

석천 임상영 의적비(낮달제공). 쌍봉사 뒤쪽 산길에 자리하고 있다.
쌍산의소 의병들은 호남지역 후기의병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임낙균과 안찬재 역시 안규홍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 10월 순국했다. 양회일의병장의 참모로 활동하던 임상영 역시 1909년 일제에 체포돼 순국했다. 선봉장 이광선은 독자적으로 의병활동을 벌였다. 도포장 유화국은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의 군량관으로 활약했다.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1907년(순종 즉위년)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계기로 의병 구국 운동은 의병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자 군인들은 일본군과 시가지 전투를 벌이면서 저항했다. 그러다 의병에 합류해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벌였다. 일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동학농민군의 후손과 지방의 유생, 구한말 군인, 울분을 참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의병대열에 합류했다.

의병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은 호남, 특히 전남지역이었다. 1909년 당시 전국 의병은 3만 8천여 명 정도였는데 이중 1만7천여 명이 전남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일제는 파악하고 있었다. 전남지역의 의병활동이 거셌던 것은 예부터 충의의 정신이 강했기 때문이다. 또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있는 서울과 거리가 멀어 비교적 의병활동이 순조로웠던 이유도 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합병하기 위해서는 호남의병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한대토벌작전에 들어갔다. 남한대토벌작전은 일본군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에 걸쳐 화순을 비롯한 전남지역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실시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다. 이 작전에는 일본 정규군 2개 연대가 투입됐다. 2천여 명의 정규군과 헌병대와 경찰, 조선인 밀정 등이 진압작전에 동원됐다.

일본군은 의병근거지를 공격해 의병부대를 와해시켰으며 의병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마을들은 모두 불 태우는 등 잔인하게 진압작전을 펼쳤다. 경기·황해·강원·경상도 등지의 의병들을 진압한 일제는 가장 극성을 부리던 전라도의병을 토벌하는데 나섰다. 일본군 1개 연대는 남원~하동~섬진강~구례~담양~나주~무안 쪽으로 진격하면서 의병 소탕작전에 나섰다. 다른 1개 연대는 영산강을 따라 남하하면서 작전을 펼쳤다.

백운산과 백아산, 추월산, 어등산, 쌍산 등 산속에 근거지를 두고 활약하던 의병들은 이때 거의가 궤멸됐다. 의병들은 참빗으로 훑어내듯이 쓸고 올라오는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일본군의 잔인한 의병진압 작전에 대해 황현은 <매천야록>에 ‘촌락마다 샅샅이 수색하기를 마치 참빗으로 빗질을 하듯 했고,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즉시 죽였다’라고 적었다.

일본군은 전남 연안에 함정을 배치하고 의병들이 섬으로 도주하는 것을 원천봉쇄하는 한편 교반적 작전(攪拌的 作戰)을 수행했다. 교반작전은 의병들이 숨어있다고 생각되는 지역은 몇 번이나 전후좌우·동서남북을 거쳐 되풀이해, 위력 수색하는 작전형태였다. 또 후퇴하는 척 했다가 갑자기 기습공격을 하는, 다소 변칙적인 작전이어서 의병들의 피해가 컸다.

■호남의병의 궤멸

일제에 체포된 의병장들
남한 대토벌 작전 기간에 전남 지역에서는 의병장 100여 명이 체포됐다. 의병 4천여 명이 체포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노령산맥 일대에서 활동하던 전해산(全海山)과 영산강 동쪽과 남해안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던 심남일(沈南一), 동부 산악 지대 일대에서 일본군과 일본인을 괴롭히던 안규홍(安圭洪)의병장이 붙잡혔다.

심남일과 선봉장 강무경(姜武景)은 1909년 10월 능주에서 장흥으로 넘어가는 바람재 고개(風峙)에서 일본군 제2연대 및 제3중대와 전투를 벌이다 체포됐다. 이들은 1910년과 이듬해에 각각 처형당했다. 앞서 밝힌 대로 쌍산의소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 다른 의병부대에 합류한 임낙균과 안찬재 등은 남한대토벌작전 기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다.

남한 대토벌 작전 직전까지 화순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1909년 1월에 일단의 의병들이 화순의 헌병 분견대와 교전했다. 3~4월에는 군용품을 수집했으며 화순 일진회 회장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다. 7월에는 당시 동복군 사평리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대규모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 벌어진 전투에는 100여명의 의병이 참가했다.

당시 화순 지역은 일본군 제2연대의 작전 지구에 속했다. 일본군은 일단 의병들이 몸을 피할 수 있는 마을을 철저히 봉쇄한 다음 추격대를 보냈다. 그리고 예상되는 의병이동로에 미리 병력을 매복시켜 의병들을 사살했다.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추격해오는 일본군의 공격에 의병들은 어쩌지 못하고 전사하거나 체포당할 수밖에 없었다.

포로가 된 의병 중 300~600여 명은 일제에 의해 목포~광주 간 국도 1호선과 해남에서 하동에 이르는 국도 2호선 일부 구간 공사에 투입됐다. 이들은 족쇄에 묶인 채 짐승 같은 대우를 받으며 돌을 깨고 땅을 파는 노역에 시달렸다. 일제는 이렇게 건설된 지금의 국도 1·2호선 일부 구간을 ‘폭도도로’라고 불렀다.

지난해 10월25일에 열린 한말 호남의병 추모제. 맨 좌측이 광주전남광복회 김갑제지부장
그렇지만 이 도로는 ‘폭도도로’가 아니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일제와 싸우던 의병들의 원한과 울분이 사무쳐 있는, ‘의병도로’다. 허투루 지나치고 바라볼 곳이 아니다. 호남의병들의 장한 뜻과 충정을 생각하면서 옷깃을 여며야 할 곳이다. 의병들을 수감했던 광주·목포형무소에 대한 역사적 의미도 부각돼야할 필요가 크다. 의병들의 거룩한 뜻을 후손들이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 국가기정문화재 사적지 쌍산의소

쌍산의소는 2007년 8월 3일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이를 기념해서 문병란 시인은 시를 지어 쌍산의병에게 바쳤다. 헌시는 다음과 같다.

불멸의 사랑(쌍산의소 항일의병에 부침)

명예를 탐하지 않았기에/호화로운 무덤이 필요 없었고/황금을 구하지 않았기에/빛나는 청석(靑石)을 원하지 않았다.//

족보에 새기고/사서에 장식하고/공과 훈을 원하지 않았기에//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슬프지 않았다.//

캄캄한 하늘 아래/그 어느 꽃보다 더 눈부신 꽃/양귀비꽃 같은 그 붉은 마음을 안고/차마 눈 뜨고 바라보기마저 현기증 나는//저기 저 깨끗한 고결한 무덤 속 침묵을 보아라.//

산 사람들 이욕에 눈멀어 변절하고/육신 아픔에 못 이겨 굴복할 때도/썩어 그 향기 진흙 속 연꽃으로/너무도 당당한 백골의 울부짖음/날이 갈수록 고와지는 저 숭엄한 증언을 들으라.//

목숨보다 소중한/내 조국 내 고향/그 향기론 흙 속에 묻혀/날로 고와가는 그 붉은 마음/여기 영원히 썩지 않는 사랑이 있다.

(2007. 9. 14. 서은(瑞隱) 문병란 삼가 칭송함)

쌍산의소는 능주출신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이 쌍산(계당산)자락과 증동(甑洞)마을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의로운 장소를 일컫는다. 쌍산의소는 증동마을과 계당산 항일의병 유적지를 통칭한다. 계당산에는 의병들의 막사와 방어용 성벽, 무기 제조터 등이 남아있다. 보기 드문 의병유적지이다.

증동마을에는 양회일의병장이 1906년 12월에 증동마을 유지인 임노복을 찾아봐 의병활동을 논의하고 증동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의병활동에 나서기로 결의한 집이 자리하고 있다. 화순군에서는 지난 2006년에 임노복의 집이 있었던 토지를 매입하고 민가를 복원했다.

박도 선생이 지은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책 표지
최근 들어 쌍산의소에 대한 학계와 사학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쌍산의소가 차츰 널리 알려지면서 선열들의 장한 뜻을 기리고자 하는 발걸음도 많아지고 있다. 중국대륙을 비롯 전국 곳곳을 누비면서 항일의병·독립투사들의 항쟁사를 정리하고 있는 박도선생 역시 쌍산의소가 지니고 있는 항일역사의 의미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쌍산의소에 대한 내용은 그가 쓴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도움말/홍영기, 심홍섭, 박도


사진제공/위직량, 양기수, 낮달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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