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화엄사와 자족(自足)
최혁(남도일보 주필)

얼굴무늬 수막새./연합뉴스

며칠 전 이른 아침 구례 화엄사에 들렸다. 겨울비가 흩뿌려지던 날이라 하늘은 낮았다. 제법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산사(山寺)를 찾아가기에는 더 없이 적당한 날씨였다. 절을 찾기에는 아무래도 이런 날씨가 어울린다. 햇볕 가득한 여름철보다 이렇듯 스산하고 헐벗은 초겨울이 제격이다. 인적이 없다보니,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의 계곡 물소리도 더 짱짱했다. 물소리가 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부수면서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날, 화엄사에서 여러 번 놀랐다. 계곡의 물소리에 놀라고, ‘화엄사 일주문에는 문짝이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했다. 얕은 지식에 부끄러움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보제루에서 대웅전 너른 마당으로 들어설 때 감격했다. 구층암으로 향할 때 마주한, 스님들의 공양행렬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구층암의 굽은 기둥에도 탄성을 질렀다. 뿐만이 아니다. 대웅전과 각황전을 오르내리던 텃새 양비둘기의 비상(飛翔)과 각황전 앞 석등의 우람함에도 손뼉을 쳤다. 놀라고 또 놀랐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예전과 다르다. 무심코 지나치던 판액의 서체에 눈길이 가고, 주춧돌의 모양새에 마음이 쓰인다. 오래된 기둥을 보면 자연 손이 뻗어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 부드러운 나뭇결을 손바닥으로 쓰다듬는다. 세월의 깊이를 느끼고 싶은 것이다. 뜰을 건너가는 스님들의 발걸음도 심상하게 버려두지 않는다. 그 발걸음들을 내 마음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느낀다. 발걸음은 스님이 걷지만 한편으로 그 발걸음은, 내 마음이 걷는 것이기도 하다.

공양 길 스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 스님들은 어떤 사연이 있기에 세상을 등졌을까? 어쩌자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 했을까? 구층암에 들어서니 덕제(德濟)스님이 차를 우려내 주었다. 뜨거운 차를 마시니 얼어붙은 몸이 풀렸다. 스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했다. 기자 역시 평소에 다짐하는 생각이다. 감사는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지만 비교하는 마음은 우리를 지옥으로 이끈다.

화엄사 차밭 옆에 서니 새삼, 세상사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잠시다. 산문을 나서면 바로 생활인 신세로 돌아가야 하는데, 출가인(出家人)양 하는 것이 허세다. 그렇지만 그 허세가 실은 호사다. 많이 누리는 것을 부질없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은, 아직은 그렇게까지 몹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애써 위로 삼는다. 아니, 분명 자기위로일 것이다. “저 포도는 분명 실거야”라고 돌아서는 여우의 마음이, 내 마음일수도 있다.

구층암에 오르기 전, 보제루 옆 종루에서는 “내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고래만 보면 울어대는 포뢰의 성향을 염두에 두고 종루에 배치시킨, 목어와 범종의 관계가 떠올려진 탓이다. 범종의 용뉴(고리)는 용왕의 셋째 아들인 포뢰(蒲牢)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포뢰가 달린 종(鐘)이 잘 울리도록 당목(撞木:종을 치는 나무)을 고래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고래가 나타나 때려대니 용이 조각돼 있는 종이 잘 울릴 수밖에 없다.

아마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을 울리는 가장 큰 당목은 자리욕심일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그런 생각을 접은 지 오래다. 역사와 관련된 좋은 글을 많이 쓰고, 사람들 앞에서 의미있는 강의를 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그러니 명예욕이 당목이 될 우려는 없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궁색하지 않고, 건강도 그만하면 좋으니 이렇다 할 근심이 없다. 있다면 “자식들이 외국에서 살고 있기에 나중에는 보살펴줄 사람이 곁에 없을 것이니, 이를 어쩌지~”하는 정도다.

화엄사 대웅전은 최근 지붕공사를 한 듯싶었다. 수막새가 아주 새것이다. 수막새는 추녀나 담장 끝에 기와를 마무리하기 위해 만든 둥그런 기와를 말한다. 동행했던 사진기자가 찍은 양비둘기 사진 배경에 ‘신라인의 미소’가 새겨져 있는 수막새 모습이 보였다. 이 ‘신라인의 미소’가 담겨진 수막새는 일제강점기에 경주 사정리에서 출토됐다. 지난 11월 27일 문화재청은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慶州 人面文 圓瓦當)를 보물 제2010호로 지정했다.

화엄사에서 내려와 창평에서 고등어김치조림에 저녁밥을 먹었다. 동행했던 사진기자와 후배기자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먹는 저녁밥이 꿀밥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친 뒤 식사하며 웃는 그들의 모습이 수막새에 있는, 바로 그 웃는 얼굴이었다. ‘이만하면 족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겨울계곡의 물소리에 귀를 씻었고, 화엄사 가람의 단정함에 마음을 세웠고, 구층암 차 한 잔에 자족함을 얻었으니 행복한 날이었다. 생각해보면 올 한해도 족했던 한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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