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2부-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전라도인 디아스포라
(1) 임시정부의 전라도사람들
(2)임시정부 의정원의 전라도 사람들-장병준을 중심으로
(3)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독립군들
(4)임시정부의 ‘비밀금고’ 전라도
(5)백범 김구와  전라도

‘장산도 만세운동’ 주도한 장병준…통합임정 출범 기여
고향서 청년들 규합 거리 시위…암태도 소작쟁의에 영향
탁월한 균형감각으로 의정원 의원 선출 뒤 임정 통합 노력
목포서 신간회 활동…조선민족의 정치·경제적 해방 앞장
平等과 仁愛 실천한 사상가…형제들 모두 독립운동 헌신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자조섞인 말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적이 있었다. 독립운동 후손들의 극심한 생활고를 반영하는 슬픈 현실을 나타내는 표현일 것이다. 구국의 일념으로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에 희사한 개인, 물심양면으로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했던 민족기업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온갖 고통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남출신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중에 장병준 선생에 대해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장산도 3·18 만세운동

장산도 표지석./네이버
올해 3월 18일에 장산도 3·18 만세운동 100주년 행사가 전남 신안군 장산도 현지에서 신안군 주관으로 박우량 군수, 장병준기념사업회 장하진 회장, 장산면민, 학생 등 300여명이 참여한 독립선언문 낭독과 헌화 및 만세행렬 재현행사가 열렸다./신안군 제공

1893년 6월에 신안군 장산에서 태어난 장병준 선생은 12세에 혼례를 치르고 신학문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인 아버지의 권유로 출도하여 목포의 영흥학교를 거쳐 서울의 보성전문 법학과를 졸업했다. 1915년 도일하여 니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지만 3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던 것은 합방과 함께 탄압이 시작된 일제에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수순으로 풀이된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3월 18일 오전 10시 대리(大里)마을에서 청년들에게 서울의 만세소식을 전하며 섬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당일 청년들이 대거 참여하여 도창리(道昌里), 공수리(公需里)까지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 소식을 접한 목포경찰은 장병준을 주모자로 지목하고 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했다. 경찰의 포위망을 피한 장병준은 상경, 한성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대한국민대회’ 조직에 참여했다.
 

신안군 장산면 대리에 복원된 장병준 생가(본래는 초가집)./장병준 평전

장산도 3·18 만세운동은 서울에 이어 바다 건너 섬 지역에서는 무안(3월 19일), 목포(4월 8일)보다 앞서 일어났다. 이후 일어난 암태도 소작쟁의를 비롯한 하의 3도(하의도·상태도·하태도)와 자은도, 도초도 등 도서지역의 농민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올해 지난 3월 18일에는 장산도 3·18 만세운동 100주년 행사가 장산도 현지에서 신안군 주관으로 박우량 군수, 장병준기념사업회 장하진 회장, 장산면민, 학생 등 300여명이 참여해 독립선언문 낭독과 헌화 및 만세행렬 재현행사가 열렸다.

◇통합임시정부 출범 역할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한남수(韓南洙)·김철(金徹)과 함께 피선되었다. 제4차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손두환(孫斗煥)·한위건(韓偉健)·장도정(張道政)·임봉래(林鳳來) 등 의원과 연서(連署)하여 “한 나라에 국회가 둘이 될 수 없으니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는 시급히 통일하여야 한다는 것과, 상해(上海)에 설립된 의정원은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이를 분립(分立)하기 어려운 즉 다른 곳에 설립된 의회를 속히 본 의정원에 통일케 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여 통과하도록 하였다. 당시 세 곳에 임시정부가 존재하였는데 1919년 3월 17일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1919년 4월 11일의 ‘상해임시정부’, 그리고 1919년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가 그것이다. 세 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효율적인 정부운영과 독립운동을 병행해야 한다는 비등한 여론에 힘입어 마침내 1919년 9월 11일 통합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병준 의원의 재임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사실이다. ‘임시의정원기사록제4회’에는 회기가 1919년 4월30일~5월12일로 채 2주가 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때 의원으로 선출되어 회기 중에 해임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구체적인 해임사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분산된 임시정부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의 역할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앞서 언급한 통합임시정부 필요성을 의정원에서 역설하여 결의안을 제출한 것으로 볼 때 임정 통합의 연락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해에 상주할 수 없는 상황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의원직에서 해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구와 함께
광주 장병상의 사택을 방문한 김구와 함께한 가족들(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활동 관련)./ 장병준 평전

◇목포에서의 신간회(新幹會)활동

장병준은 1927년 신간회 목포지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지역에서의 민족운동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좌우를 망라한 민족통일 전선인 신간회에 초기 임시정부 통합운동의 중심이었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모두에게 신망이 컸던 선생은 중요한 임무를 맡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목포지회는 같은 해 6월 결성되었다. 목포가 전남 지역의 중심도시였고 근대 도시 목포와 주변 도서 지역을 연결하는데 입지가 좋았기에 활동에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목포지회 조사부 총간사로 활동하면서 신간회의 취지인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 근검·절약운동 전개, 청년운동 지원 등을 실천하기 위해 맹활약을 펼쳤다. 신간회는 좌우세력이 연대하여 창립되었지만 운영과정에서 주도권을 놓고 불협화음이 계속되고 민족주의 진영의 간부들이 투옥되는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자 창립 4년째를 맞던 1931년 5월에 해산되고 말았다. 해산에 따른 기반 상실로 인해 목포 신간회 활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해방이후 정치권서 활동
 

장병준

해방 이후 장병준 선생은 정치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46년 한민당 광주지부장, 전남도당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셋째 동생인 홍염은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무안을구에 당선되어 재선까지 의정활동을 하였다. 이후 정중동의 행보속에서 정치참여를 다시 시작한 계기는 이승만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1959년 민주당 전남도당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당원들과 함께 적극 참여하면서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1961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과 함께 정치활동을 접었으며 1972년 3월 15일 향년 7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인 박금례 여사와 사이에 9남매를 둔 호남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선생은 열정과 냉정을 조절하는 탁월한 균형감각을 발휘하여 주변인들을 통합의 길로 끌어냈다. 자신의 역할이 끝나면 뒤로 물러났으며 불의에 저항하는 인간의 참모습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는 평생동안 ‘평등(平等)’과 인애(仁愛)‘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온 진정한 사상가였다. 오늘날 장산도의 장씨 가문은 1세대인 4형제 모두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2세대인 4형제는 6·25전쟁 참전 및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고 정치인과 관료·의사로 족적을 남겼다.

3세대는 사회참여가 활발한 학계의 거목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호남의 명문가이다. 또한 이들은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신앙과 같이 실천하는 모범 가문이기도 하다./이승훈 광주통일교육센터 연구원
 

이승훈

정치학 박사(전남대학교)인 이승훈 연구원은 전남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고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선거제도, 로비제도, 남북관계 등을 집중 연구하고 있다. 현재 민주평통 자문위원과 광주통일교육센터 연구원, 민주연구원 객원연구위원, 선박안전기술공단 이사로 활동중이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