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역사이야기-85.신안 천사대교 개통과 암태도 소작쟁의

천사대교 개통으로 ‘보물섬’들이 곁으로 오다

신안 중부권 4개면 7개 섬 육지연결 1일 생활권
암태·자은·팔금·안좌·4개면과 추포·박지·반월도 등

<신안군 천사대교 스토리 북>매우 유익한 안내서
목포대학교 강봉룡 도서문화연구원장 등이 저술

섬 곳곳에 스며있는 역사·문화자원은 ‘보물창고’

암태도-소작쟁의의 섬
자은도-자비롭고 은혜로운 섬
팔금도-시인 최하림의 섬
안좌도-수화 김환기의 섬

암태도 주민들, 대지주와 일제 맞서 권리쟁취
인근에 소작쟁의 확산 계기 농민운동사 큰 획
 

개통된 천사대교. 신안군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국도 2호선 천사대교가 9년 여 동안의 공사 끝에 지난 4월 4일 개통됐다. 역사와 문화의 보고인 4개면 7개 섬이 육지가 됐다. 신안군은 암태·자은·팔금·안좌도와 인근 섬등이 품고 있는 역사·문화자원,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널리 알리는 홍보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천사대교 개통

전남 신안군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국도 2호선 천사대교가 9년 여 동안의 공사 끝에 지난 4월 4일 개통됐다. 천사대교가 개통되면서 4개면 7개 섬이 육지가 됐다. 신안 중부권의 대표적인 섬인 암태, 자은, 안좌, 팔금, 자라도, 추포도, 박지도, 반월도 등이 1일 생활권으로 편입되면서 지역경제발전 및 관광객 증가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천사대교는 2010년 9월에 착공돼 8년 5개월만인 2019년 4월 4일 공식 개통됐다. 총 길이 7천224m로서 인천대교, 광안대교, 서해대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긴 다리이다. 당초에는 새천년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가칭 ‘새천년대교’라 명명됐으나 ‘천사의 섬’ 신안군 다도해의 상징성을 부각시키자는 취지에서 2018년 12월 13일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천사대교’로 최종 의결됐다.

천사대교는 국내 최초로 현수교와 사장교가 공존하는 다리다. 현수교는 압해도 쪽에 국내 최초 3주탑 방식으로 가설됐다. 사장교는 암태도 쪽에 ‘천사의 섬’ 신안군을 상징하여 1004m의 길이로 가설됐다. ‘천사대교’가 개통되면서 신안의 5개 ‘읍면섬’(읍 혹은 면 소재지 섬-압해도, 암태도,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이 6개의 다리에 의해 한꺼번에 육지와 연결되는 신기원이 열렸다.

압해도는 이미 2개의 다리로 육지와 연결돼 있는 상태다. 남동쪽으로 목포와 서해안고속 도로로 통하는 ‘압해대교’가 있다. 북으로는 무안국제공항으로 통하는 ‘김대중대교’가 있다. 나머지 네 개의 섬은 이미 3개의 다리로 이어져 하나의 섬이나 마찬가지다. 자은도-(은암대교)-암태도-(중앙대교)-팔금도-(신안제1교)-안좌도 형태로 섬과 다리가 연결돼 있다.

천사대교스토리북

■암태도(巖泰島)

○간척지가 지천인 암태도

암태도는 일제강점기 농민운동 및 민족저항운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암태도 주민들은 대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이를 비호하는 일제에 맞서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1년여에 걸쳐 소작쟁의를 벌여 결국은 승리했다. 이를 암태도 소작쟁의라 한다. 부당한 지주의 압력과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암태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했다는 점에서 한국농민운동사에 있어 매우 의미가 깊다.

강봉룡 원장은 암태도 소작쟁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첫째 일제와 지주 측의 강압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소작인 측의 승리로 귀결되었다는 점, 둘째 그 승리는 1925년 도초도, 1926년 자은도, 1927년 지도에서 소작쟁의가 잇따라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 셋째, 서태석과 박복영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이자 소작쟁의 영웅을 탄생시켰다는 점 등이다.

암태도 승봉산 삼형제바위

이밖에도 일개 섬에서 일어난 소작쟁의가 전국적인 이슈를 넘어 국제적인 이슈로 발전해 암태도의 이름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언론기관은 암태도 소작쟁의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또 성금을 모아 기탁하면서 응원했다. 언론기관의 관심과 보도는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성금기탁과 무료변론이 줄을 이었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강 원장은 암태도라는 일개 섬에서 일어난 소작쟁의가 현대사에 일으킨 파란이 지대하다는 점이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소작쟁의를 일으킬 정도로 넓은 경작지가 섬에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강 원장은 “그러나 이는 편견”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암태도의 너른 평야는 대부분 바다를 메워 만든 것이고 그래서, 암태도는 간척의 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암태도에서는 조선후기부터 자연마을 단위로 소규모 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광복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방조제가 더 외곽으로 대규모로 축조되면서 암태도의 너른 평야가 형성됐다. 지금은 바다와 인접해 있는 방조제 28개만이 관리대상이다. 그렇지만 암태도에는 100여개의 크고 작은 방조제가 확인되고 있다. 방조제 너머로 또 간척을 해 새로운 방조제가 생기는 일들이 반복된 것이다.

암태도는 간척하기에 적합한 갯벌로 둘러싸여 있는 섬이다. 이것이 암태도에 넓디넓은 평야 가 생기는 배경이 됐다. 그리고 또한 소작쟁의가 일어난 원인으로 작용했다. 갯벌 섬이라는 암태도의 자연환경, 간척과정에서 축조된 방조제, 그리고 그 결과물인 평야는 암태도 소작쟁의를 발생시킨 자연환경인 셈이다.

○암태도 소작쟁의

암태도 소작쟁의기념탑. 1923년 암태도 소작인들은 일제의 비호를 받는 대지주 문재철에 맞서 1년여 동안 소작쟁의를 벌여 대지주의 부당한 요구를 물리쳤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인근 지역에 소작쟁의를 널리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우리 농민운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문재철(文在喆)과 일제, 그리고 암태도 소작인들 간에 벌어진 소작료 갈등이다. 문재철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암태도·자은도 등의 섬과 전북 고창 등지에 755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문재철이 1923년 쟁의 발발 당시 암태도에 소유하고 있던 농지는 약 140정보다. 이때 소작료는 지세(地稅)와 농사경비를 공동부담으로 하는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를 기본으로 해 징수됐다.

그러나 일제의 저미가정책(低米價政策)으로 수익이 감소하자 문재철은 7~8할의 소작료를 징수하려 했다. 이에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재철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소작인들은 추수거부와 소작료 불납동맹으로 맞섰다. 이때 목포경찰서는 일본경찰을 출동시켜 소작인들을 위협했다. 일본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문재철은 소작료를 강제로 징수하려고 했다.

소작인들은 문재철의 소작인에 대한 개인별 회유 및 협박에 대응하기 위해 자체 순찰대를 조직하고 1924년 봄까지 소작료불납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1924년 3월 27일에는 면민대회를 열어 소작인의 단합을 결의했다. 또 5월 15일까지 소작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암태도에 있는 문재철 아버지의 송덕비를 파괴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때 지주 측에서는 면민대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소작인들을 습격하고 소작인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이에 소작인들은 4월 22일 송덕비를 부숴버렸다. 이때 지주 측 청년들과 충돌이 있었고 50여 명의 소작인이 일본경찰에 붙들려갔다. 소작인들은 6월 2일 면민대회를 다시 열고 강경투쟁을 다짐했다. 400여 명의 소작인은 6월 4일부터 8일까지 목포경찰서·법원 앞에서 시위농성을 벌였다. 7월 8일부터는 600명이 법원 앞에서 아사동맹(餓死同盟)을 맺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7월 11일에는 문재철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26명이 체포됐다.

암태도 소작농민들의 투쟁 소식에 각계각층 인사들이 지지를 보냈다. 일제는 소작쟁의가 더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소작료는 4할로 조정됐고 쌍방 간의 고소도 모두 취하됐다. 부서진 비석은 소작인들의 부담으로 다시 세우기로 했다. 1년간에 걸친 쟁의는 소작인 측의 승리로 끝났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이후 도초·자은·지도의 소작쟁의로 이어졌다. 소작농들의 분연한 외침은 대지주와 일제의 부당함을 시정케 하는 힘이 됐다.

○매향비와 추포도 노둣길

암태도 송곡리매향비

암태도는 원래 3개의 섬이었다. 토사의 퇴적으로 하나의 섬으로 연결된 것이다. 암태도 송곡리 바닷가에서는 매향비(埋香碑)를 볼 수 있다. 매향비는 바닷가에 향나무를 묻는 의식(매향의식)을 거행하고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다. 매향의식은 바닷가 사람들이 해양활동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행하는 공동체적 해양신앙의 일종이다. 송곡리 매향비는 1405년에 세워졌다.

암태도와 인접 부속섬인 추포도 사이에는 3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노두길이 있다. 3천600여개의 돌을 놓아 만들었다. 길이가 2.5㎞에 달한다. 노두길은 썰물 때 드러난 갯벌에 돌을 놓아 ‘돌 징검다리’를 만들어 섬에서 섬으로 건너가는 통로로 삼은 길을 말한다. 노두길 옆에는 처음 노둣길을 만들 때 세운 노도비(路道碑)가 있다. 2000년 6월 30일에 노두길 옆에 2차선 콘크리트 도로가 들어서면서 추포도 노두길은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졌다.

암태도 추포 노두길

도움말/강봉룡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장

사진제공/서대승,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신안군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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