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역사이야기-86. 김태원 의병장

“나라가 위태롭거늘 어찌 앉아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김태원 의병장이 아우 율에게 보낸 편지 中>

김태원 의병장 아우 율과 함께 의병부대 조직 맹활약
법성·고창·담양 무동촌 전투 등에서 日軍 크게 무찔러

어등산에서 일군과 전투 끝 순국, 아우 율도 총살당해
김의병장 아내 능욕 피해 인두로 스스로 얼굴 등 지져

일경, 7살 된 아들 경천씨 전기고문 반신불수로 만들어
동료의병들이 돌아가며 1년씩 아들 경천씨 데리고 살아

竹峰손자가 김갑제 광복회광주전남지부장…애국혼 계승
광주시 호남의병전적지 어등산에 의병박물관 건립추진

창극 개벽의 한 장면. /전남도립국악단 제공

2019년 4월 12일, 전남 무안군 남도소리울림터 공연장에서는 전남도립국악단의 특별기획공연 창극 ‘개벽-민초의 노래’가 공연됐다. 이 공연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특별 기획·제작된 것으로 12일부터 이틀 동안 무대에 올려졌다. 이 창극의 주인공들은 정미의병(1907년) 당시 호남지역에서 활동했던 김태원 의병장과 의병들이었다.

창극 ‘개벽-민초의 노래’ 총감독을 맡은 전남도립국악단 유장영 예술감독은 “작품을 통해 자주독립의 진정한 의미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의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감독의 바람대로 관객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틀에 걸쳐 실시된 이번 공연에는 많은 이들이 찾아와 호남의병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되새겼다. 특히 김태원 의병장의 손자인 김갑제 광복회광부전남지부장을 비롯 독립유공자 유가족들은 감회가 깊은 모습이었다.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 호남의병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었던 육군 제31사단 예하 군 장병들도 큰 감명을 받은 표정이었다.

개벽공연에 참석한 김갑제 광복회광주전남지부장(왼쪽)과 개벽공연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김명원 전남도 관광문화체육국장(가운데).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저 멀리로는 원 제국에 맞서 싸웠던 삼별초와 고려백성들, 임진·정유재란의 의병, 청군과 싸웠던 조선백성들이 이 땅을 지키다 숨졌다. 또 조선의 국권을 무너뜨리는 일제에 항거해 수많은 이들이 조선 산하와 만주·연해주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 땅의 산하에는 그들의 숭고한 정신이 담겨있다.

김태원 의병장은 그중 한 분이다. 김태원 의병장은 동생 김율을 비롯 여러 의병들과 함께 4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김태원 의병장은 전남 나주 출신으로 1907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나주와 함평·담양 등지에서 일본군경과 40여회전투를 치렀다. 이후 1908년 4월 25일 벌어진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김태원 의병장 동상과 유적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 광장에 세워져 있는 김태원 의병장 동상. 김태원의병장이 장렬히 순국한 어등산 방향으로 세워졌다.

그렇지만 조선을 지키다 숨진 김태원 의병장과 아우 김율을 제대로 알고 있는 청소년들이 별로 없다.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김태원 의병장과 관련된 유적지와 기념물은 주변에 산재해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대할 수 있는 인물이다. 현장중심의 역사교육이 아쉽다. 역사의 현장에서 영웅들의 숨결을 느끼는 살아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광주 도심 속에서 김태원 의병장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서구 농성동광장이다. 농성동 광장에는 김태원의병장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태원장군 의적사업추진위원회’에서 1975년에 세운 것이다. 광주상공회의소 건물 외에는 주변에 이렇다 할 건물이 없었던 2000년 이전만 하더라도 이 동상은 이곳을 지나치는 버스 안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높이 솟은 동상에 절로 시선이 갔다.

그러나 지금은 농성동 4거리에 들어서 있는 전철입구 및 엘리베이터 시설 등에 가려 유심히 살펴봐야 동상을 볼 수 있다. 이 동상은 왼쪽에 화승총을 든 김태원 의병장이 의병들을 지휘하는 모습이다. 오른손이 가리키는 곳은 어등산이다. 동상의 김태원 의병장 얼굴은 사진이나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아 아들과 손자인 김갑제 회장의 얼굴 윤곽을 참조해 제작됐다.

김태원 의병장의 동상은 담양군 남초등학교 인남 분교에도 있다. 김태원 의병장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요시다를 사살한 전적지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나주시민공원과 담양 무동촌(舞童村)에 김태원 의병장 기적비와 김태원 의병장 전적지비가 있다. 나주 문평 북동 갈마지마을에는 김태원, 김율 형제의병장의 생가 터가 자리하고 있다.

담양초등학교 인남분교에 세워져 있는 김태원 의병장 동상.

■죽봉 김태원 의병장

흔히들 그를 ‘죽봉(竹峰) 김태원 장군’이라고 한다. 죽봉은 호다. ‘태원’(泰元)은 본 이름이 아니고 자(字)다. 본명은 준(準)이다. 자(字)는 성인 남자가 20세를 넘기면 윗사람이 당사자의 기호나 성품 됨됨이를 고려해 붙여 주는 이름이다. 본관은 경주(慶州)다. 김태원 의병장은 1870년 전남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 갈마지에서 태어났다. 청년기는 함평에서 보냈다.

김태원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에 투신했다. 그러나 일부 동학군의 행태에 실망하고 동학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수원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을 아전들의 수탈로 백성들의 고통이 크자 관찰사에게 호소해 폐단을 시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태원 의병장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생 율과 함께 의병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1906년 7월에 나주·함평·영광·장성·무안·광주 등지에 사는 김돈·조경환·강길환·이덕삼·유병기·양상기·오영모·김찬문·김해도 등과 함께 일단의 부대를 꾸렸다. 1907년 9월 장성의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이 주도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참여해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된 곳은 영광과 장성의 경계인 삼계면 수연산이었다. 기삼연 의병부대는 김태원을 선봉장으로 해 고창과 법성 등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이후 기삼연부대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부대를 이끌고 전남 서부지역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김태원 의병장 부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던 담양 무동촌 모습. /dmook 블로그

1908년 설날 전야에 김태원 의병장 부대는 설을 조용한 곳에서 보내기 위해 담양군 남면 무동촌으로 잠입했다. 이때 무동촌에 사는 밀정이 이 사실을 광주지구 수비대 일본군에 알렸다. 수비대장은 청일, 러일전쟁을 치른 야전군 출신 요시다였다. 일본군이 마을을 포위해 공격해오자 김태원 의병장은 돌담장 일대에 의병들을 매복시키고 다가오는 일본군을 기습공격했다.

의병들은 요시다와 일본군 상당수를 죽이는 쾌거를 올렸다. 당시 요시다 부대는 ‘의병 잡는 부대’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이런 요시다를 죽였으니 조선의병들의 사기가 매우 높아졌다. 김태원 의병부대의 용맹스러움도 널리 알려졌다. 당시 유행했던 동요에는 호남의병들의 용맹함이 잘 나타나있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 같다 전해산/잘 싸운다 김죽봉 /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 되나 못 되나 박포대’ 여기서 김죽봉은 김태원을, 박포대는 기삼연 포대장 박도경을, 안담살이는 머슴 출신 의병장 안규홍을 일컫는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 김태원 의병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기발한 전략을 많이 이용하여 1여 년 동안 수백의 일병을 죽였으며, 부하를 엄히 다스려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담양 무동촌 승리는 쾌거였으나 곧이어 좋지 않은 일도 일어났다. 1908년 1월 말, 기삼연 의병장은 부대를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으로 잠입했다. 이 첩보를 접한 일본군은 기삼연 의병부대를 기습했다. 기삼연은 다리에 부상을 입어 순창에 은신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광주로 압송되고 말았다.

담양 무동촌에 있는 의병전적비와 김태원 의병장 전적비. /dmook 블로그

기삼연이 광주로 압송되고 있다는 소식에 김태원 의병장은 부하 30명을 이끌고 광주의 경양역(지금의 두암동 일대)까지 추적했다. 그러나 기삼연 의병장은 광주로 호송이 끝난 뒤였다. 일본군은 김태원 의병부대가 기삼연을 탈출시키려 한다는 첩보에 기삼연을 광주천 백사장에서 곧장 총살에 처해버렸다. 정상적인 재판절차를 생략해버린 것이다.

기삼연의 순국 후 김태원·김율 형제는 호남창의회맹소를 정비하고 호남의소(湖南義所)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조선백성들은 김태원 의병부대를 ‘참봉진’(參奉陣), 김율 의병부대를 ‘박사진’(博士陣)이라 불렀다. 사람들이 죽봉부대를 참봉진이라 한 것은 김태원 의병장이 한때 참봉을 지냈기 때문이다.

이들 형제 의병장은 맹렬하게 유격전을 펼쳤다. 1908년 3월 26일 장성(長城) 토물(土泉) 뒷산에 성을 쌓고 전투를 벌여 일본군 30여명을 사상케 했다. 당시 일본군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김태원 의병부대였다. 김태원 의병부대는 일본군뿐만 아니라 친일파인 일진회원과 밀정, 자율단원들을 처단·징치했다.

이에 일본군은 김태원·김율의병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고 토벌작전에 나섰다. 일본군 대병력의 치밀한 공격으로 김태원·김율의병부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영광 낭월산 전투에서 도포장(都砲將) 최동학(崔東鶴)을 잃었고, 대곡전투에서도 피해를 입었다. 3월 29일에는 김율이 광주 소지방(현 송정읍)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됐다.

일본군의 파상공세에 김태원 의병장은 어등산 매봉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밀정의 제보로 일제가 김태원 의병장의 은신처를 알아내고 압박해 들어왔다. 1908년 4월 25일 일제 기병대와 특설순사대는 김태원 의병장 부대를 공격해왔다. 김태원 의병장은 부하들을 피신시킨 뒤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김해도와 함께 총격전을 벌이다 일본군의 집중사격에 쓰러졌다.

일제는 광주감옥에 수감돼 있던 아우 김율 의병장을 데려와 형의 시신이 맞는지를 확인시켰다. 형의 시신을 본 김율이 통곡하자 김태원 의병장의 죽음을 확인한 일본군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김율 의병장을 총살시켰다. 김태원·김율 형제 의병장은 이렇듯 조선의 산하와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다 안타깝게 숨졌다. 김태원 의병장의 나이 39세, 김율 의병장의 나이 28세였다.

김태원 의병장이 아우에게 보낸 편지(여사제심서)

김태원 의병장은 자신의 삶을 조선국권회복을 위해 바쳤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의로운 일이기에 고통스럽고 위험한 의병의 길도 기쁜 마음으로 걸었다. 김태원 의병장이 1908년 2월에 아우 율에게 남긴 시에는 그의 기개와 초연한 마음이 담겨 있다.

國家安危在頃刻 (국가의 위태로움이 시급하거늘)

意氣男兒何待亡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盡忠竭力義當事 (온 힘을 쏟아 충성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志濟蒼生不爲名 (백성들을 구하려는 마음일 뿐, 이름을 남기려는 것은 아니라네)

兵死地含笑入地可也 戊申 二月十九日 舍兄金準書

(싸운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 웃음 짓고 지하로 가리라. 무신년 2월19일 형 김준이 쓰다)
 

■김태원 의병장 유족들의 비참했던 삶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할 당시 김의병장에게는 아내(낙안 오씨)와 어린 아들(김동술, 아명 김경천)·딸(김채봉)이 있었다. 남편을 죽인 일본헌병들이 붙잡으러 오자 낙안 오씨는 벌건 인두로 얼굴과 가슴을 지져버렸다.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본 헌병들은 얼굴과 몸이 만신창이가 된 낙안 오씨를 주재소 마당에 내팽개치고 7살 된 어린 아들에게 고문을 했다.

일제는 어린아이를 거꾸로 매달고 고춧가루 물을 눈과 코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전기고문까지 가했다. 김태원 의병장의 아들인 경천은 어찌해서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이후로는 왼쪽 팔과 다리를 영영 쓰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딱하게 여긴 김태원 의병장 친구(함께 의병생활을 했던 동료)들은 경천을 데려와 1년씩 돌아가며 키웠다.

이중 한 분이 고 신기하 의원의 증조부다. 그래서 김태원 의병장 아들 경천은 고 신기하 의원의 조부인 신동욱씨와 함께 자라났다. 김의병장의 아내 낙안 오씨는 일제의 고문과 감시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러다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태원 의병장의 딸(김채봉)은 김남순으로 이름을 바꾸고 13살 때 부산의 제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폭도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시가와 일가친척들이 욕을 당하니 평생 동안 의병장 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그러다가 임종 때 세 아들에게 외할아버지가 의병장 김태원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김남순의 세 아들 중 한명인 제기두씨는 지난 1975년 광주 농성동에 김태원 의병장 동상이 세워질 때 광주를 방문했다. 그리고 의병장 외할아버지의 웅혼했던 기상과 기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외할아버지의 담대한 정신과 기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김태원 의병장의 손자이자 김경천씨의 아들이 바로 2019년 현재 광복회광주전남지부장을 맡아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갑제씨다. 김갑제 지부장은 아버지를 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잃었다. 김갑제 지부장은 아버지 경천씨가 51세에 얻은, 귀한 늦둥이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평생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56세라는 젊은 나이로 일찍 돌아가시자 갑제씨는 홀로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참으로 지난한 삶을 살았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어렸을 때는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철이 들어가면서 할아버지가 참으로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의병장 가문에 대한 자긍심도 커졌다고 한다. 자연 나라에 대한 생각이 다른 아이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고 애국심도 남달랐다. 그래서 김갑제 지부장 삶의 여정 역시 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나라에 애국하고 민족에 충성하는 길을 따라 갔다.

의병의 날에 헌화하고 있는 김갑제 지부장.

김 지부장은 80년대에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88년 언론사에 입사, 30여 년 동안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지역발전과 후배들의 애국심함양을 위해 노력했다. 8년 여 동안 광복회광주전남지부장과 국가보훈위원직을 맡아 민족정기선양과 남북평화통일 여건조성에 힘쓰고 있다. 광주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광주상무시민공원에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올해는 관계기관의 도움을 받아 전남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전남도청 앞 도서관 마당에 건립할 예정이다. 광주광역시 등에 한말호남의병기념관 건립을 줄기차게 건의한 결과 광주시가 현재 기본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광주시교육청이 광주지역 고교생과 역사교사 등을 대상으로 해외독립운동사적지 탐방프로그램을 도입·실시케 한 것도 큰 보람이다.

김갑제 지부장은 역사특강을 통해 광주·전남지역 학생들에게 이 지역출신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 독립운동역사를 알리고 있다. 또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독립운동사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고 있다. 김갑제 지부장은 “미력하나마 민족정기를 살리고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데 앞장서며 무등산처럼 푸르고 후덕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기회가 날 때마다 밝히고 있다.

■어등산과 의병기념관

2018년 어등산 의병의 날 기념식 장면.

최근 학계의 고증을 받아 어등산에 김태원의병장이 전사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확인됐다. 이 전적지는 광산구 서봉 마을에서 등산로를 따라 1km 정도 위에 위치한 마당바위 근처의 토굴이다. 이 토굴은 마당바위에서 3백여m 떨어진 토굴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제보한 소촌동 거주 전수종씨는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마을어른들이 마당바위는 김태원 의병장이 일본 군경과 최후의 전투를 벌인 곳이라 했다”며 “마을 노인들이 돌아가시면 사적지가 영원히 묻힐 것 같아 10여 차례나 답사해 장소를 기억해두었다”고 말했다.

이에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가 현장답사를 통해 어등산 일대 전적지로 추정되는 지형기록과 1908년 일본 경무국이 편찬해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제2특설순사대에 관한 편책’ 기록을 비교해 두 곳이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홍 교수는 “우선 표지석을 세우고 등산로를 정비하는 일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또 홍 교수는 “어등산은 김태원 의병부대 뿐만 아니라 조경환 의병부대 등 수많은 의병부대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곳이다”며 “한말 의병 전적지에는 표지석을 세우는 등 소규모 사업부터 시작해 종합적인 어등산 한말의병전적지에 대한 기념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군 장병과 경찰 등이 의병선열에 대한 추모사를 읽으며 국가보위에 대한 다짐을 하고 있다.

어등산은 한말 호남 의병의 본거지이자 최후 최대 격전지인 만큼 이를 기념할 수 있는 시설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때문에 김갑제 광복회광주전남지부장 등은 어등산에 의병기념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이 같은 건의와 주장에 따라 광주시는 어등산에 의병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어등산은 ‘의향(義鄕) 1번지’라 해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의로움과 용맹함이 가득한 곳이다. 임진·정유재란 당시 호남의병들은 어등산을 무대로 해 기병했다. 구한말에는 호남 8대 의병장 중 김태원, 김율, 조경환, 김원범, 오상열 의병장 등 5명과 100여 명의 의병이 어등산 전투에서 순국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광산구청은 2009년 조례제정을 통해 매년 10월 25일을 ‘어등산 의병의 날’로 정하고 광복회광주전남지부와 함께 어등산 박산마을에서 추모제와 기념식을 거행해 왔다. 또 5월 25일에는 박산마을에서 ‘조선 의병 축제’가 예정돼 있다. 어등산은 구한말 구국의병들의 요람으로 가꿔져야하고 의미가 더해져야 한다.

■어등산과 박산마을의 역사

어등산(魚登山,338m)은 풍수지리로 보면 광주의 안산(案山: 혈穴 앞의 낮고 작은 산으로 주산主山·청룡靑龍·백호白虎와 함께 풍수학상의 네 가지 요소 중 하나)이다. 향토사학자 김정호선생에 따르면 1914년 전까지 이 산의 동쪽은 광주군 소지면(所旨面)이었고 서쪽은 함평군 오산면(烏山面)이었다. 오산면은 1906년까지는 나주 땅이었으나 후에 함평으로 속해졌다.

지금의 운수동 일대가 옛 소지면 일대다. 선암역이 있었던 어등산 남쪽자락은 1914년에 선암동(仙岩洞)이 됐다. 옛 나주 땅인 어등산 서쪽 자락은 박호동(博瑚洞)이 됐다. 1986년 황룡강변의 선암, 서봉, 박호 세 동네와 어등산 중턱 운수동을 합해 용운동(龍雲洞)이라는 행정동이 만들어졌다.

이후 1998년 용운동과 소촌동을 합쳐 어룡동(魚龍洞)이라는 행정동을 만들었다. 어룡동 중의 법정동네인 박호동은 임곡면에 속해 있었으나 1983년에 송정읍에 속하게 된다. 지명에 대한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光州), 광산(光山)이라는 이름은 어등산에서 비롯됐다. 광산(光山)은 ‘산 그림자가 물에 비친다’는 뜻이다.

본디 광주와 광산이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한다. 중국 하남성 신양시(信陽市)에는 광산현이 있다. 광산현의 또 다른 이름이 광주다. 광산은 원래 산 이름으로 부광산(浮光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산은 중국 회수강(淮水江)중류에 있는 산으로 회수강물에 떠오르는 물그림자가 아름다워 부광산이라 했다. 그런데 ‘빛 그림자 산’이라는 뜻이 강조돼 광산으로 약칭됐다. 이 광산 별칭이 익양산이다. 광주의 옛 이름이 익주였던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황룡강물에 어등산(魚登山)이 비쳤다고 전해진다. 물에 비치는 산 그림자가 아름다웠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중국 회수강변 광산의 아름다움을 연상하면서 이곳의 이름을 광산이라 했다. 고려 때 어등산 서쪽 자락은 여황현(艅?縣)이었다. 여황은 ‘나룻배’라는 뜻으로 지금의 본량면 일대 들녘이 바다처럼 물이 고여 있어 나룻배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만큼 이 일대는 물이 많았던 것이다.

결국 어등산은 이 땅에 광산이라는 이름을 낳게 했다. 그리고 ‘광주의 광산’ 역할을 했다. 어등산의 뜻은 ‘고기가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른 산’이다. 김정호 선생은 ‘광주고을의 종산(종산)인 무등산이 평등의 뜻과 함께 유아독존의 부처님을 상징했다면 비록 무등산에 비길 수 없는 작은 동산에 불과한 어등산은 강 속의 물고기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고 용도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의 뜻을 품고 있다’고 풀이한다.

박뫼(朴山)의 이름은 본디 죽산 박씨들이 많이 산데서 비롯됐다. 1571년 화순에 살던 양팽손의 셋째 아들 송촌 양응정(1591~1581)이 박씨 집에 장가들어 살면서 대사성에 올랐다. 이후 양씨 자손들은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고 병자호란 때는 큰 공을 세웠다. 박씨들이 살아 박산(박뫼)라 불리던 동네는 양씨들의 세가 커지면서 박산(博山)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죽산 박씨들은 강 건너 임곡으로 옮겨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도움말/김정호, 김갑제, 홍영기, 전수종

사진제공/김갑제, 광복회광주전남지부, dmook(블로그)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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