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귀농인-남도愛 산다 <21> 광양 김장익 세풍정미소 대표

훈련 중 다쳐 전역한 직업군인에서 ‘억대 부농’으로

귀농 5년차…30대 초반에 연 매출 5억 ‘성공신화’

핵가족·1인 가구 위한 소량판매 포장방식 도입

지역경제 활성화 위한 ‘로컬푸드 전도사’ 역할

“불굴의 의지로 노력해야만 성공할 수 있을 것”
 

지난 2014년 1월 전남 광양시 광양읍 해광로로 귀농해 귀농 5년 차에 접어든 김장익(34) 세풍정미소 대표는 연 매출 5억 원을 올리는 등 대표 귀농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간단하다. 성공하려면 노력해야 한다. 나는 노력했고 이 자리에 올랐다. 광양시 대표 청년 귀농인의 마음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전남 광양 노지 19만8천347㎡(약 6만 평)에서 쌀농사를 지으며 연 매출 5억 원을 올리는 귀농인이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2014년 1월 전남 광양시 광양읍 해광로로 귀농해 귀농 5년 차에 접어든 김장익(34) 세풍정미소 대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광양만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백운산·천왕산의 고즈넉한 산세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는 광양은 벼농사를 짓기 위한 최적의 공간이다. 더구나 시에서 청년 귀농인을 위한 지원 정책 및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 새내기 귀농인들에게는 출발지로 안성맞춤이다.

이런 풍부한 자연환경을 조력자 삼아 김 대표는 연간 100t에 달하는 조곡을 생산하며 지역 경제를 위해 ‘로컬푸드 전도사’를 자처하는 등 광양시 대표 청년 농업경영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장익 세풍정미소 대표가 생산하는 쌀(20kg).

◇위기를 기회로

지난 2008월 3월부터 직업군인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생활한 김 대표는 애국애족 정신이 투철한 사나이였다. ‘포기하지 않는 이상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인생 좌우명을 바탕으로 주변 군인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다. 한평생 군인으로 근무하겠다는 뜻도 지녔다.

하지만 군 훈련 도중 발목이 골절됐고 더 이상 군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는 군의관의 말에 약 3년간의 군 생활을 뒤로 한 채 전역하게 됐다. 완치되지 않은 몸이었지만 김 대표는 전역한 지 2주일 만에 경기도 평택에서 대기업 유통업자로 취업했다. 이유는 평소 흥미를 느꼈던 농산물과 유통업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서였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는 부모님의 일손을 위해 귀농하겠다는 막연한 계획도 세웠다.

김 대표는 물류센터에서 ‘인스펙터’라고 불리는 농산물 품위 관리 업무를 맡았다. 25년 동안 전남을 벗어난 적이 없던 그에게 타향살이는 고됐지만 꿈을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주중에는 일터에서 농산물의 특성을 파악했고 휴일에는 고향에 내려가 농업 지식을 쌓았다.

그러던 중 29살인 지난 2014년 1월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자 김 대표는 본격적인 계획을 세우고 귀농했다.
 

김장익 세풍정미소 대표가 생산하는 쌀(20kg).

◇귀농도 사업이다

귀농 초기 김 대표의 생활과 주위 환경은 녹록하지 않았다. 나이도 어린 데다 아직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족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김 대표를 만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여타 새내기 귀농인들과는 달랐다. 4년간 인스펙터로 근무하면서 청년 귀농인들이 가지지 못한 농업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농산물의 품질 상태부터 관리법, 대처법까지 꿰차고 있었다. 그 빠삭한 지식을 바탕으로 아버지가 관리하셨던 논농사를 직접 운영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귀농 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 김 대표는 단순 농사꾼에서 ‘사업하는 농사꾼’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심해지는 핵가족화와 늘어나는 1인 가구에 발맞춰 소량판매를 도입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초 20㎏·40㎏ 등 대용량 판매 방식에서 1.5㎏·2㎏·10㎏ 등 소량 판매로 변경한 결과 3천만 원이었던 연 매출이 1억 원 가까이 올랐다. 김 대표 본인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이듬해에는 아버지가 보유한 가공시설을 100% 활용하기 위해서 마을 주민 5명과 함께 곡간 영농조합법인을 세웠다. 그 일환으로 김 대표는 농협에 수매를 맡기지 않기로 했다. 투자한 시간과 노력 대비 이익 창출이 크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김 대표는 “농민을 위한 농협이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농협의 행태가 불만족스러웠다”며 “나라면 저렇게 안할 것 같다는 생각에 법인을 세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장익 세풍정미소 대표의 조곡 가공시설.

◇노력의 결실은 달다

김 대표는 본인이 직접 발품 팔아 전남 여수시, 고흥군, 구례군으로 거래처를 확보해나갔다. 성실한 청년 농사꾼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쌀을 직접 배송하며 날랐다. 그 결과 현재 지역 내 식당을 비롯해 누룽지 가공공장, 떡 가공업체, 도시락업체 등의 거래처가 생기는 등 본인의 입지를 구축해냈다. 연간 조곡 생산량은 100t(본인 60t·주민 40t)을 넘겼고 인근 농가와 지역내 대농가 공공비축미 초과 물량을 수매해 가공하고 있다.

여기에 김 대표는 지역 사회 공헌을 위해 판로개척에 힘쓰고 있다. 지난 2015년부터 지역 내 작목반을 구성해 광양주조공사와 계약재배를 통해 주조용 햅쌀을 생산하고 있다.

또한 쌀 소비량 증가와 로컬푸드 활성화를 위해 지난 2015년 4월에는 매장을 오픈했다. 매장에서만 하루 평균 50만 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로컬푸드 전도사’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김장익 세풍정미소 대표가 수매한 공공비축벼.

◇“두려움 극복하고 경쟁력 갖춰야”

김장익 대표는 예비 귀농인들에게 소비자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농산물 품질관리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대표는 “요즘에는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도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시대다”며 “소비자들이 수많은 브랜드 중 내 제품을 구매해야 하는 이유를 나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매하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 중 농작물의 품질과 상태가 가장 중요하다”며 “일말의 거짓 없이 소비자들과 신뢰를 쌓아가며 관계를 형성하다 보면 주 거래처가 생길 것이다”고 역설했다.

또한 김 대표는 귀농생활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일단 부딪혀보고 판단하라고 귀띔했다. 그는 “단순히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경험한 농촌의 생활은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며 “분명히 도시 생활보다 성과를 내는 것이 어렵지만 꾸준히 노력한다면 전문 농업경영인으로 성공할 것이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는 농한기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김 대표는 “농업에 종사할 경우,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농한기에 놀기 마련이다”며 “이 시간에 웹 사이트 제작하는 방법과 마케팅 공부 등의 생산적 시간을 보내야 남들보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공부 머리와 사회 머리, 일 머리는 모두 다르다. 미래 계획을 꼼꼼히 세우고 노력한다면 분명 성공은 다가올 것이다”고 조언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정다움 기자 jdu@namdonews.com 영상·사진/송민섭 기자 song@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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