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일(남도일보 대기자)

 

금호아시아나그룹 김성산 부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주기가 다가온다.

지난해 10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김 부회장은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광주일고, 전남대 무역학과를 나와 1973년 금호고속(옛 광주고속)에 입사한 후 대표이사로 20년간 기업을 이끌었다. 김 부회장은 금호아시아나그룹에 48년 동안 몸담으면서 그룹 부회장까지 지낸 뼛속까지 영원한 금호맨이다.

김 부회장은 회사의 오너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다가 가셨다. 죽음 이후 여려 평가가 양존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김 부회장에 대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큰 어른, 존경하는 인물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정권에 의해 언론 통폐합 조치로 7년 넘게 보도기능을 박탈당했던 CBS의 보도기능 회복과 함께 1987년 광주CBS 기자로 입사했던 필자는 주로 경제 분야를 취재하면서 김성산 부회장과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필자는 말단 기자였고 김 부회장은 광주고속 경리부 차장으로 재직했을 때였다.

1988년인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다. 그 무렵 광주는 5월만 되면 열병처럼 금남로에서, 대학가에서 매일같이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데모가 끊이질 않았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뒤범벅이 된 광주의 일상이었다. 5월 18일이 다가오면서 광주CBS는 당시 5·18유족회 전계량 회장과 부상자회 이지헌 회장 등 5·18단체들과 추모공연을 준비했다. 연출은 손호상 PD가 맡았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5공 군사정권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라 여러 기업과 돈 좀 있다는 독지가를 수소문 했으나 5·18 추모 행사라고 하니 모두 손사래를 쳤다.

그때 필자가 김 부회장을 찾아가 행사 취지를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하자 500만 원을 선뜻 주셨다. CBS와 5·18단체는 그 돈으로 관과 상여를 준비했고 5·18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살풀이 춤 공연을 준비했다.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바닥과 스탠드를 가득 매운 지금의 광주문화재단이 있는 추억의 구동 실내체육관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미처 들어오지 못한 시민들이 체육관 주변에 가득 찼다. 그리고 경찰버스와 전경들도 체육관을 에워싸고 있었다. 불상사 없이 행사를 무사히 마친 스태프들은 감격했고 눈물을 흘렸다.

30년 전 500만 원은 큰돈이었다. 지금이야 국가차원의 5·18 명예회복이 이뤄져 매년 정부 주관 아래 5·18 추모식을 치르고 있지만 군사정권하에서 5·18 행사에 돈을 마련해주었던 형님을 두고두고 잊을 수 없었다. 특히 그때는 지금의 국가정보원 전신인 중앙정보부나 경찰 정보과에서 5·18 관련 행사의 자금줄을 차단하려고 혈안이 돼 있을 때였다.

그리고 이듬해 겨울 무렵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5·18기념재단은 1994년 8월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공식 출범했지만 80년 5·18 이후부터 그전까지는 5·18기념사업회로 존속해 왔다. 그 무렵 금남로 3가에 광주은행 본점이 있었는데 그 건물 7∼8층에 5·18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2월쯤이었는데 30여 평의 사무실에 5·18 당시 내란수괴로 지목돼 군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후일에 특별 사면됐던 지금의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등이 난로 하나도 없이 두꺼운 옷을 입고 겨울을 나고 있었다. 또 김 부회장께 손을 벌렸다. 그러자 50만 원 정도 되는 석유난로를 선물해 주셨다. 당시 석유난로 중에는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뿐이랴. CBS가 7년 넘도록 보도기능은 물론 광고기능까지 박탈당하면서 수입은 오로지 교회에 의존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 1987년 보도 광고기능을 회복했다고 하지만 입사초기에는 매월 급여를 주는 25일이 되면 경영진은 늘 걱정이었다. 그때도 김 부회장이 나서 금호에서 매월 300만∼500만 원을 일정하게 광고협찬을 해주면서 CBS는 한숨을 돌리게 됐다.

김 부회장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30년 넘게 인연을 맺어 오면서 개인적으로는 친형님 같은 분이었다. 형님은 회사일이든 개인사든 어떤 상담을 하면 어떻게든 그 고민을 해결해 주려고 애썼다. 후일에 들은 얘기지만 형님은 선후배와 동료들에게도 한결 같았다. 특히 궁핍한 처지에 있었던 재야 운동권 세력과도 각별하게 지내며 외면하지 않으셨다. 필자는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시골집에서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 1년 정도는 만나지 못했던 터라 죄송한 마음이 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영전에 국화 한 송이를 바치고 엎드려 절을 한 것이 전부였다. 이제는 만날 수 없다는 상실감이 너무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필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김성산 형님에 대한 고마움이지만 주변의 많은 분들께도 같은 덕을 베풀다가 가셨다. 30년 전, 혹은 20년 전 기억이라서 모두들 까마득하게 잊고 살다가 또 그 선행의 당사자인 형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제 하나의 추억일 뿐이다. 그럼에도 형님이 그립다. 평생을 한 눈 팔지 않고 기업인의 길, 그것도 금호인으로만 살다가 가셨다. 말년에 금호아시아나그룹이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셨을 것이다. 형님. 이제 모든 일상 내려놓으시고 천국에서 편이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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