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 중심 보성여관 등 볼거리 ‘풍성’
항일 정신 깃든 ‘주먹’·‘꼬막’ 등 유명세
애환서린 중도방죽, 갈대밭 탐방로 변신

 

보성군 벌교읍 소재 중도방죽 위 갈대밭과 산책길 전경.

옛말에 ‘벌교 가서 주먹 자랑 말고, 순천에서 얼굴 자랑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 말라’는 말이 있다.

그동안 ‘벌교 주먹’이란 말은 다소 부정적 시각이 없지 않았으나 ‘벌교 100년사’를 편찬하면서 ‘벌교 주먹’의 연원에 대해 낙안군의 폐군(廢郡)과 관련된 의병 투쟁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 내 인식의 전환을 시켜줬다.

이 책에선 1908년 안규홍으로 불리던 젊은 장사가 벌교 장터에서 일본 헌병을 맨주먹으로 때려 죽인 사건이 발생,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당시 벌교 지역이었던 낙안군을 없애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규홍 장사의 항일의 저항 정신은 해방 후에도 벌교의 지역적 특성으로 남아 ‘벌교 주먹’의 전통으로 전해지고,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정의의 주먹’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는 ‘주먹’ 외에도 또다른 유명한 것으로 ‘꼬막’과 ‘태백산맥문학관’을 빼 놓을 수가 없다.

특히 광복 이후 한국전쟁까지 격동의 시기에 벌어진 여순사건과 이데올로기 갈등을 다룬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육필원고를 비롯해 취재수첩 등 다양한 자료가 비치돼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은 이제 남도 문학기행의 1번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소설이 전국적 유명세를 타다 보니 벌교읍내의 도로 이름까지 ‘태백산맥길’로 지어진데다 ‘태백산맥 문학거리’도 조성되는 등 현재는 방문객들이 벌교에 오면 꼭 거쳐가야 할 여행지 중 한 곳이 됐다.

‘태백산맥 문학거리’를 걷노라면 이 소설 속의 주인공 정하섭과 벌교 주먹계를 평정한 염상구가 맘껏 활보할 것만 같은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투영(投影)되는 것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여기에다 벌교읍 곳곳에는 문학관을 중심으로 현부자 집, 소화의 집, 홍교, 벌교 포구의 소화다리(부용교), 애환서린 중도방죽과 갈대밭, 남도여관(현재 보성여관), 김범우의 집 등 소설 속 무대가 그대로 재현돼 있다.

이처럼 벌교는 소설 ‘태백산맥’ 속에 등장하는 옛 모습이 잘 녹아 있어 가을철에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추억여행을 떠나기에는 제격이다.

동부취재본부/허광욱 기자 hkw@namdonews.com

◇ 작가 집필 산고(産苦) 보여주는 ‘태백산맥문학관’

순천에서 자가용으로 15~20분이면 도착하는 보성군 벌교읍.

오전 이른 시간에 도착해 조정래 작가의 대작 ‘태백산맥’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태백산맥문학관’을 찾았다.

이곳은 작가의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문학 정신을 기리는 곳으로, 국내 최대의 단일문학작품 전시관이다.

벌교읍에서 문학기행의 센터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한 이 문학관은 2008년 11월 21일 개관했으며, 소설 ‘태백산맥’이 염원하는 통일의 마음을 담아 북향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1983년 집필을 시작으로 6년 만에 완결, 이적성 시비 등 유형무형의 산고를 겪고 분단문학의 최고봉에 올랐던 작가 조정래의 ‘소설을 위한 준비와 집필’, ‘소설의 탈고’, ‘출간 이후’, ‘작가의 삶과 문학’, 1만 6천여 매 분량의 태백산맥 육필원고를 비롯한 737점의 증여 작품이 전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일본식 가미한 독특한 구조 ‘현부자네 집’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현부자집

‘태백산맥’은 20세기 한국의 근현대사가 녹아 있는 소설로 1983년 집필을 시작해 1986년 10월 ‘제1부 한(恨)의 모닥불’ 1∼3권이 출간된 이후 1989년 10월 ‘제4부 전쟁과 분단’ 8∼10권으로 완간됐다.

소설에는 김범우, 염상구, 새끼무당 소화 등 270여 명이 등장하고 현재 벌교에는 소설 속 공간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태백산맥문학관과 인접한 바로 오른쪽에는 무당 소화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 무당집으로 낮은 토담과 풍성한 대나무숲이 집을 포근하게 감싸고 감나무도 한 그루 서 있는 정갈하고 아담한 집이었다고 한다. 1988년 태풍에 쓰러진 뒤 폐허로 방치됐다가 2008년 소화의 집으로 복원된 곳이다.

당시의 무당집은 실제로 제각으로 들어서는 울안의 앞터에 있었다고 한다.

또 집 둘레로는 낮춤한 토담이 둘러져 있었고, 뒤로는 풍성한 대나무 숲이 집을 보듬듯 하고 있었다.

뒤란으로 도는 길목의 장독대 옆에는 감나무도 한 그루 서 있는, 소설에서 그려진 소화의 모습처럼 정갈하고 아담한 집이다.

소화의 집 맞은편에 있는 ‘태백산맥’의 첫 장면이 묘사된 현부자네 집이 나오는데, 기본 틀은 한옥이지만 곳곳에 일본식을 가미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집은 소설에서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로 묘사된다.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이 집은 1900년대 초 일제 강점기에 건축된 제각과 별장이다.

신축할 때 벽돌부터 시멘트까지 모두 일본에서 들여와 지었다고 하는 이 집은 대문 위에 창문이 달린 방이 설치된 구조로 안으로 들어서면 웅장한 목조건물이 위세 당당하던 집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본래 밀양 박씨 문중의 소유였으나 지난 2002년 보성군에 기부체납해 복원된 곳이다.

이 집은 현부자가 누각에 올라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면서 자기 소유의 농토와 중도방죽을 내려다보는 곳이면서,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로 묘사된 곳이기도 하다.

◇ 주민 애환 간직한 ‘중도방죽’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나카시마(中島)가 1929년부터 1930년대 초반에 완공한 간척지 뚝길이 바로 ‘중도방죽’이다.

중도(中島)는 나카시마의 이름을 따 불러진 것으로 지금도 현지 주민들은 ‘중도방죽’, ‘중도방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

이처럼 소설 태백산맥에선 중도방죽 쌓은 과정에 동원된 당시 사람들의 힘겨웠던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 86년 오랜 역사 간직한 ‘보성여관’
 

태백산맥 소설 속에 등장하는 보성여관.

등록문화재 제132호이자 소설 속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보성여관’은 1935년에 지어진 검은 판자벽에 함석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목조 2층 일본식 건물이다.

여관 문을 열고 여관 안으로 들어서면 아담한 카페에 흑백TV, 재봉틀 등 다양한 소품이 더해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 안마당 정원수를 둘러싼 객실 디딤돌에는 손님을 위한 고무신이 가지런하게 놓여 이채를 띤다.

당시 교통의 중심지였던 벌교는 일본인의 왕래가 잦아지며 유동인구가 증가했고, 그 역사의 중심에 있던 ‘보성여관’은 당시의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의 큰 규모였다고 한다.

2008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보성여관의 관리단체로 지정되어 새롭게 복원된 보성여관은 벌교와 보성여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전시장과 카페, 다양한 문화체험의 공간인 소극장, 그리고 소설 속 남도여관을 느낄 수 있는 숙박동으로 이뤄져 있으며, 2층은 다다미방으로 다목적 문화체험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박영기 관장은 “당시 강하람이라는 강진출신의 토목업자가 많은 돈을 벌어 지은 300평이나 되는 보성여관은 당시 순천이나 여수보다 상권이 활발한 벌교에 건립했다”며 “윤보선 대통령을 비롯해 김대중 대통령, 장면 수상, 박순천 야당 총재 등이 묵었던 역사 깊은 곳이다”고 말했다.

이어 박 관장은 “벌교에는 당시 경찰서, 세무서 등 군단위 기관이 다 있었다”며 “2층 다다미방은 서편제 등 영화촬영도 많이 했던 곳이며, 여순사건때 지휘부로 썼던 곳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 번화한 삼거리에 자리한 ‘벌교금융조합’

등록문화재 제226호인 벌교금융조합은 붉은 벽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깎아 박아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관공서형 건물로 즐겨 지었던 모습이다.

1919년에 지어진 건물은 아직도 선명한 벌교금융조합이라는 건물 이름과 함께 외견과 내부의 영업대, 금고 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조합장 사택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가장 번화한 거리 중심의 삼거리에 위치를 잡아 일본사람들의 편리를 도모한 세심함도 보여주고 있다.

◇ 홍수 불편 해소위해 건립된 홍교(횡갯다리)

 

벌교읍 보물304호 홍교

보물 제304호인 홍교(횡갯다리)는 서기 1728(영조4년)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보시로 건립했다고 한다.

철다리, 부용교(소화다리)와 함께 벌교 포구의 양안을 연결 짓는 중요한 다리로, 원래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홍수 때마다 끊기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석교를 건립했다.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 이 지역 사람들로부터 ‘횡갯다리’라고 불리는 홍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물로 지정된 4개의 홍애 교량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기능면에서도 바닷물을 건너는 다리이기에 다른 교량과는 차별된다.

◇ 여순사건 처참상 간직한 ‘소화다리’

소화다리는 지난 1931년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 원래 부용교(芙蓉橋)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소화 6년에 건설됐다고 해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지금도 대부분 소화다리라고 부른다.

지금은 낡고 쇠락해 차량 통행조차 할 수 없는 다리이지만, 1970년대 후반 새로운 국도가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광주-고흥, 목포-순천을 잇는 교통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다리는 여순사건과 6·25를 거치면서 양 진영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이뤄진,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소설에서는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사람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태백산맥, 1권 69쪽)’라는 표현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포구의 갈대밭에 마구 버려진 시체들을 찾아가는 장면의 묘사 등으로 그 때의 처참상(悽慘相)을 상상해 보면 또다른 모습의 다리로 다가와 서글픔마저 안겨준다.

동부취재본부/허광욱 기자 hkw@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