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동화작가)

 

이성자 동화작가
이성자 동화작가

정월대보름이 지났는데도 펄펄 눈이 내리던 날, 나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갔다. 어른들은 잠깐 옆 마을에 일 보러 가고, 혼자 집을 지키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점심 무렵 스님 한 분이 목탁을 두드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나는 얼른 안방에 붙어있던 광으로 들어가 쌀을 한 바가지 퍼온 후, 마루를 내려가 스님의 바랑에 부어드렸다. 뒤로 몇 발작 물러서 할머니가 했던 것처럼 두 손을 합장하고 인사까지 했다. 스님이 이름과 나이를 물어 대답했더니 “이름값을 하겠구나”라며 인자하게 웃어주었다.

그날 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스님이 했던 말씀을 그대로 전해드렸다. 물론 쌀을 시주했다는 말까지도…. 직접 내 이름 ‘성자(成子)’를 지어주신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좋아하셨다. 내 밑으로 남동생만 네 명 있었으니, ‘아들로 이룬다’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때서야 항아리 바닥에 남아있던 쌀이 생각났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햅쌀이 나올 때까지 아껴서 먹어야 되는데 생각도 없이 박박 긁어 퍼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쌀을 볼 때마다 할머니가 내뱉던 한숨이 잊히지 않아, 매사 귀하고 소중한 것을 지혜롭게 구별할 줄 아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토록 귀하고 소중했던 쌀이 요즈음 남아돌아간다고 한다. 남아돌아간다는 것은 소중한 만큼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들이 하루에 먹는 쌀의 양이 밥 두 공기도 채 되지 않는다는 조사결과를 봐도 알 수 있다. 젊은이들의 다이어트 때문에 또는 바쁜 현대인들이 간편하게 먹는 빵이나 최근 유행하는 간편조리세트 등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식생활습관이 바뀐 게 쌀 소비량이 줄어든 이유라고 한다.

얼마 전 가깝게 지냈던 이웃이 이사하던 날이었다. 그녀는 직장 때문에 이삿날을 일요일로 택할 수밖에 없었기에 일부러 손 없는 날을 잡아두었다고 했다. 그날 밥솥에 쌀을 가득 채운 뒤 소중하게 안고는 이사 갈 집의 방 한가가운데 미리 갖다 놓고 기도하는 걸 보았다. 그래야 가족들이 새 집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쌀과 밥솥을 소중이 생각하는 그녀의 겸손한 삶의 모습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반대로 자취생이었던 어떤 젊은이의 이삿짐에는 밥솥도 쌀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나에게 간편식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홀가분해서 좋다고 했다.

우리나라 속담에 ‘한 톨의 쌀을 생산하는 데 농부는 일곱 근의 땀을 흘린다’는 말이 있다. 더 나아가 한자로 쓴 쌀미(米)를 풀어보면 팔십팔(八+八)이 되니 한 톨의 쌀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여든여덟 번의 농부 손길을 거쳐야한다는 것이다. 쌀 한 톨이 우리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있었는지 알만한 내용들이다. 솔직히 그동안 음식문화의 발달로 우리가 쌀 한 톨의 의미를 너무 가볍게 여겼던 건 사실이다. 아무리 음식문화가 발달해도 밥상의 주인공이었던 쌀, 그 쌀 한 톨의 무게는 바로 우리 생명의 무게였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입춘이 지나서인지 여기저기서 봄꽃 소식이 들려온다. 서둘러 우리의 생명줄인 소중한 쌀이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각 지자체마다 차별화된 어머니의 ‘간편 밥상’ 아이디어를 모아 볼 일이다. 더 나아가 개발된 간편 밥상정보를 유튜브 등 온라인 매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너도 나도 구입할 수 있도록 붐을 일으켜보면 어떨까. 쌀이 비만의 근원이라고 하지만 주성분인 탄수화물은 간 기능을 회복하고 두뇌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영양소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끝으로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피해자들이 빠르게 구호되고 지원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고개 숙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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