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현(재미 피아니스트 겸 작가)

 

이인현 재미 피아니스트 겸 작가

사춘기 시절,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영화가 있었다.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 (David Helfgott)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샤인’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데이비드 헬프갓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필자는 그처럼 천재적인 연주자는 아니지만 그가 느끼는 고통과 부담감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주인공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애잔하면서도 슬프고 폭풍우 같으면서도 잔잔한 바다 같았다.

거대한 블록버스터에 인간의 희노애락을 잘 녹여낸 영화를 본 듯한 이 기분은 음악공부를 시작한 이래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자 설렘이었다.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들으면 들을 수록 그 어떤 음악보다 여운이 깊게 남았고 가끔은 나도 모르게 울컥하기도 했다. 가장 인간의 감정을 잘 표현한 음악가라 생각하는 필자에게 그는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이자 나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힐링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귀족 집안의 자제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피아노를 접했다. 어머니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가 남다른 재능을 보이자 어머님은 아들이 좀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입학을 계기로 피아노 뿐 아니라 작곡까지 음악적 영역을 넓혔고, 그의 비범한 음악적 재능은 작곡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천재 음악가에게 끊임없는 극찬과 찬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20대 중반에 얻은 혹평은 가히 충격이었다.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가 느낀 상실감과 우울감은 그를 깊고 어두운 동굴에 가두기에 충분했다.

무기력과 우울증에 음악 작업이 힘들어 보이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정신과 의학박사 니콜라이 달의 치료는 꽤 효과적이었다. 평생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어두운 동굴에서 그는 세상으로 나왔으며, 그가 만든 음악들은 과거에 비해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를 오가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리던 그에게 러시아의 정치적인 상황은 그를 또 한번 충격속으로 빠뜨렸다. 2월 혁명으로 그의 재산은 몰수당했고 그와 가족들의 신변을 위협받았다. 가족을 위해 조국을 버리고 망명을 택한 그는 생계를 위해 기계처럼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다. 누구보다 조국사랑이 강했던 그였기에 조국을 향한 그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언젠간 꼭 돌아가리라 다짐했고 모스크바에 묻히길 원했던 라흐마니노프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 베버리 힐즈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2023년 그의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여러 나라에서는 그의 음악을 연주하고 그의 삶을 재조명하며 그와 관련된 작품을 준비 중이다. 미국에 망명하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렀던 베버리 힐즈에서는 라흐마니노프 페스티벌을 준비 중이며, 한국에서는 그의 생일인 4월 1일에 맞춰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를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통영 국제 음악제와 다양한 오케스트라들의 콘서트의 많은 곡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으로 라인업 되어있기도 하다.

필자에게 있어 그의 음악은 나를 깨우는 에너지이자 나의 어두움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불빛이다.

그가 음악 속에 풀어내는 희노애락이 필자가 느끼는 희노애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면서 그의 음악은 더욱 애착이 갔는지도 모른다. 그가 어릴 때 느꼈던 좌절과 방황, 그리고 조국을 향한 그리움 등 인생의 여러 굴곡이 음악에 녹아들면서 관객들 역시 마음으로서 음악을 듣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연주자들보다 1.5배 큰 손을 가졌기에 그가 만든 곡들은 다른 사람의 음악보다 고도의 기술적인 테크닉을 요구하지만, 그 부분이 음악을 더욱 화려하고 탄탄하게 보이게 만든다. 완벽한 신체에서 나오는 테크닉과 감성적인 멜로디, 그리고 다양한 경험에서 나오는 감정선까지, 이런 음악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필자의 음악 인생에 있어 그의 탄생은 그 어떤 음악가의 탄생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건이지 않나 싶다.

작년 코로나로 인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우리에게 피아니스트 임윤찬 씨의 국제 콩쿨 우승 소식은 마른 땅에 단비 같은 일이었다. 그 때 그에게 우승을 안겨준 곡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다. 만일 당신에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피아니스트 임윤찬 씨의 연주가 아니더라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어 보길 추천한다. 이 곡은 임윤찬 씨에게 우승을 안겨준 곡이기도 하지만 필자에게는 라흐마니노프를 사랑하게 된 계기를 준 음악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피아노 곡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음악가라면 죽기전에 꼭 한번 연주해보고 싶은 곡이기도 하다. 필자는 삶이 답답하거나 현실을 벗어나고 싶을 때 이 음악을 듣는다. 혹시 필자와 비슷한 상황을 느끼는 독자라면 이 곡을 감상하길 적극 추천한다. 마음 한 켠이 찌릿하면서도 꿈틀거리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