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호남대학교 작업치료학과 교수)

 

김은성 호남대학교 작업치료학과 교수

사춘기라고 하기엔 조금은 이른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의 반항과 적대감에 안절부절못하던 부모는 “조금 기다려 주자”와 “언제까지고 기다리다 더 엇나가면 그때는 어떡하냐”는 의견이 엇갈려 급기야 부부싸움을 하고야 말았다. 화면 속 부부의 모습에 ‘만약에 나라면’이라는 가정이 따라붙었다. 선뜻 둘 중 하나를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아이의 모습을 생각하면 밀어붙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에 대화를 거부하는 아이를 기다려야 할 것만 같았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스스로 고민 끝에 내린 답을 가지고 잠시 정지해 둔 영상을 이어갔다. 어렵사리 마주 앉은 부모와 아이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필자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약속이나 한 듯 계주 달리기 선수처럼 아빠의 질문 폭격에 엄마의 핀잔이 이어진다. 그러자 동굴 속 사자가 포효하듯 아이가 내뱉은 “언제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준 적 있었냐”는 한마디는 부모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쏟아진 울분에 아이가 그동안 담기에 버거웠을 상처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금만 더 참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줬더라면 하는 때늦은 후회는 부모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에는 믿음이 있고,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이 있을 때 가능하다. 물론, 그 기다림이 불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비단 위 가족의 사례만이 기다림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아이를 출산하기까지 약 10개월의 시간을 기다리고, 그 아이가 말을 하고 걸을 때까지도 기다린다. 원하는 직장이나 시험의 합격을 위해서도 차근차근 준비하며 기다리고 인생의 동반자를 찾고 알아보는 데까지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하물며 기다리지 못해 자꾸 채근하고 재촉하는 것에 지쳐 닫혀버린 마음의 빗장을 거둬내는 시간은 그보다 곱절은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 전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린다면 그 후의 기다림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소하게 겪는 오해의 순간도, 순간의 충동을 어찌하지 못해 ‘욱’해 버린 찰나의 사고도 ‘여유의 부재’에서 오는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느림의 미학’보다 ‘빨리빨리’ 문화에 더 익숙해져 직장에서는 물론, 가정 내에서도 자기만의 적정 속도에 미치지 못하면 더 불안해하고 상대방을 재촉하게 된다.

오늘 직장에서 화가 났던 일을 이야기하고 위로받고 싶었던 남편, 물가가 너무 올라 반찬거리 걱정을 하다 가계부를 뒤적거렸던 아내, 학교에서 친구들과 싸우고 속상한 아이 모두 자신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정작 배우자의 이야기, 부모의 이야기, 자녀의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가 없다.

기다림이란 어떤 시기(때)나 사람이 오기를 바라는 것인 동시에 기대하는 것이다.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배우자의 속마음도, 갑자기 입을 다문 자녀도, 오해가 깊은 친구 사이도 응어리진 상처가 아물 때가 되기를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 물론, 그 기다림의 시간이 단 몇 시간일 수도 있고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산다면 그 기다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상대방이 먼저 충분히 이야기하기를 기다려보고, 조금 뒤처진 친구가 여러분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고, 신입 직원이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기를 기다려보자. 여러분은 지금 간절한 마음, 마음에 어떤 기다림을 품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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